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21)
마음이 이끄는 대로-121화(121/134)
#121
피를 울컥거리던 이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발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국왕을 본 그녀는 절박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지 마세요! 제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괜찮으니까 제발 뒤로 가 있으란 말이에요!”
강경한 외침이었으나 로더릭은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져 주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하지만 차마 갈무리하지 못하는 격한 감정이 배어나고 있었다.
“난 앞으로 네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
“네 괜찮다는 말은 어차피 다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 나도 속아 줄 게 아닌가?”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물었다.
“어디야. 여기야?”
“………”
“어딜 끊으면 되는 거냐고.”
“………”
“나 진짜로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빨리 말해!”
“………”
“나와.”
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하는 이재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재가 방금 전까지 손을 대고있던 위치에 내리치듯 검을 휘둘렀다.
물리력이 영력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 국왕의 입에서는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재는 제발 하지 말라고 그 의 팔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국왕은 이 무형의 결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몹시 참담한 얼굴이었다.
‘이재. 사실 나는 괴로워. 네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나한테는 보이질 않아. 그게 나를 항상 비 참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너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도 네 앞에 서서…… 이 마음을 너에게 알려 줄 수 있을 텐데.
네가 그랬던 것처럼,나도 언제 나 너를 지켜 주고 싶은데.
국왕은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며 간절하게 염원했다.
그리고 온 힘 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검에 실었다.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검 끝에는 비현실적인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소년왕은 그 상서로운 광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대업의 완수를 위해 오백 년을 기다려 온 영가였다.
대의를 품에 안은 자는 언제나 비난을 견뎌야 한다.
그는 이재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었지만,자신이 수호하는 인간이 목숨을 걸고 염원하는 건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 게 수호령이 짊어진 역할이었다.
카이엔의 영속. 대업의 완수.
그의 대의와 로더릭의 염원이 교차한 순간,그는 비로소 법칙을 또 한 번 깨고 인세에 관여할 수 있었다.
소년왕은 손을 뻗어 로더릭에게 시야를 허락해 주었다.
그러자 로더릭의 눈앞에는 지금껏 상상치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재. 이게…… 대체 뭐야.”
결계 안팎에는 신음하는 원령들이 들끓고 있었다.
피 홀리고 썩 어 문드러진 끔찍한 얼굴로 인간을 조소하며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고택 앞에는 새카만 구덩이가 열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 기어 나오는 악귀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형상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지만, 황망한 듯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국왕은 이내 슬퍼지고 말았다.
“너…… 설마 이런 걸 보면서 나한테 웃어 준 건가?”
“아,안 돼……”
“어떻게 항상 그럴 수 있었어……. 왜 그랬어……”
강이재는 절규하듯이 흐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소년왕을 바라보았다.
원망과 비탄이 가득한 눈이었다.
“거두어 주세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감히 사람들과 같은 풍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제 마음이 잘못됐습니다!”
너무 외로워서 그랬어요. 저도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런데 사랑은 이런 게 아니잖아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떻 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제가 잘못했으면 벌은 저한테 주시면 되는 거잖아요! 왜 제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이런걸 봐야 하느난 말이에요!”
이재는 소년왕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한참 동안 그녀가 구슬피 우는 걸 보고 있던 로더릭은 그녀를 일으켰다.
아니라고. 이재,사랑은 이런 게 맞다고.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은 그의 푸른 눈은 한없이 강인했다.
“이재. 나는 너와 같은 풍경을 보게 된 것에 평생 감사하겠다.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천운이었다 여기며 살 거다.”
“………”
“그러니까 울지 마.”
이재를 다시 등 뒤로 보낸 국왕은 그들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기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결계의 실체를 파악한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왕은 다시 한번 검에 자기 자신을 실었고, 비범한 자가 마음을 실은 검이 곧 성검이었다.
결계는 와장창,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왕의 입가에선 아까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검올 놓지 않고, 계속해서 왕가의 기운을 쏟아부었다.
흔들리는 결계와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뒷모습.
이재는 그 굳건한 등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을 쥐고 있는 그의 손 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로더릭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재. 만인이 나를 저주해도 상관없어. 이 세상에 단 한 명. 너만 나를 믿어 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폐하, 할 수 있어요.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이재는 성검에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의 검에 흐른다.
분명 상이한 기운이었으나,그들이 같은 것을 간절히 기원하는 순간,검에서는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로더릭과 이재는 그 눈부신 광경을 함께 지켜보았다.
영험한 푸른빛이 결계 안에 가득하다.
인간을 넘보던 원귀들은 그 빛의 영역에서 마치 한 줌의 재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곧 유리성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두 사람의 귓가에 울렸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국왕은 등 뒤를 바라보며 곧바로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지체 하지 말고, 어서 왕제 일행을 쫓으라는 신호였다.
이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손은 아까보다 더욱 떨려 왔지만,그녀는 손가락으로 저택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귀문을 파괴해야 해요.”
하지만 국왕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초조해진 그녀는 국왕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빨리요. 저대로 놔두면 다른 사람들이 죽어요.”
국왕은 말없이 이재를 안아 올리더니,지시를 내리고 있는 기사 단장에게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친우에게 그녀의 작은 몸을 맡겼다.
“제이드,내 아내 좀 부탁한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재,금방 올 거다. 조금만 기다려라.”
제이드는 기사들에게 로브를 깔게 하고는 그 위에 이재를 눕혔다.
사람들은 곧 그녀의 주변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귀문을 향해 걸어가는 국왕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이재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도와주고 싶은데,힘든 건 내가 다 해 주고 싶었는데.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그녀는 더는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몹시 초조해하던 이재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호위하던 기사들은 모두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그녀는 곧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아까보다 더한 기운이 온 세상을 덮고있었다.
국왕은 귀문에 성검을 찔러 넣었고, 마침내 그 통로를 파괴한 것이다.
눈앞에서 넘실대는 푸른 기운이 한없이 맑기만 했다. 이재는 중얼거렸다.
“물이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 물속에 자신의 손을 담가 보았다.
이재는 깜빡거리며 눈을 떴다.
아까 그 장소였고,그녀는 여전히 로브 위에 누워있었다.
찰나였지만, 의식을 잃은 듯했다.
“왕후 폐하,괜찮으십니까?”
“다 정리됐으니 폐하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제이드와 기사들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그들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
소년왕이었다.
-나 그만 간다.
“어디로요?”
이재가 허공에 대고 말을 하자, 기사들은 사정을 다 알고있음에도 흠칫했다. 물론 소년왕도 그녀도 개의치 않았다.
-대업이 완수되는 걸 봤으니 나도 성불해야지. 오백 년이나 기다렸는데,설마 여기 더 있으라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소년왕은 장난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
내심 이겨 먹고 싶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을 써 주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저기요. 죄송해요.”
-또 뭐가.
“모든 걸 아는데 참는 건,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힘든 거죠. 잘 알면서 원망하고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딱히 마음에 담아 둔 적도 없 었고,그냥 귀엽게만 보았던 소년 왕은 어깨를 으쑥해 보였다.
-너도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는 거 잘 안다.
“네. 그리고 폐하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지킨 거다. 강이재. 고생 많았어.
이재는 쑥스럽기도 하고,먹먹 하기도 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소년왕은 그녀의 어깨를 툭,쳐 주었다.
-앞으론 좋은 일만 있을 테니 이제 죽상은 그만하고. 그거 굉장히 보기 안 좋아.
-좀 행복하게 살라고.
“전 늘 행복했는데요.”
-다 컸네. 우리 가재.
소년왕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로더릭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시야를 잠글 수 있을 거다. 사실 갠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오히려 지금 굉장히 만족하는 것 같은데 네가 하도 서러워해서 주는 선물이야. 너한테 따로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넌 이걸 제일 바랄 것 같아서.
“너무…… 너무나 감사합니다.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래. 잘 있어라. 강이재.
이재는 일어나서 절을 하고 싶었는데,그럴 기력이 안 돼서 턱 만 아래로 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소년왕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로더릭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이재를 의식한 둣 피 묻은 검부터 검집에 넣었다.
“폐하.”
로더릭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소매로 핏자국을 닦으려고 들었다.
“어떡해. 많이 아프지.”
“아니에요.”
“이재,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아니라고요. 저 안 아프다고요.”
“진짜 어떡해.”
“……그러게요, 진짜 어떡하면 좋아요. 제 말이 또 안 들리시나 봐요.”
이재가 농담을 걸었으나,애타하는 국왕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것을 물으며 말을 돌렸다.
“폐하. 이기셨나요?”
“그래. 전부 잡아들였다. 다 끝났어.”
“다행이다. 사실 전 폐하가 이길 줄은 알았어요.”
대운이라는 거 어디 안 가거든요.
그녀는 국왕의 잘생긴 얼굴을 어루만졌다.
왕은 그 작은 손등에 자신의 손을 덧대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거의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말 조금만 있다 하면 안 될 까? 아직도 피가 안 멎는 것 같아서.”
“……멎은 것 같은데.”
“혹시 졸려서 그러는 거야? 민가로 갈 테니까 의원 찾을 때까지만 참아 봐. 힘들어도 지금은 눈 감으면 안 된다.”
국왕은 여전히 그녀의 말이 잘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입가의 핏 자국을 반복적으로 닦는 그는 조만간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국왕이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이재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얘기는 나중에 하고. 부탁이야.”
“싫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할 거야.”
“………”
“폐하,저는 역시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도 되는 거였어요.”
운명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 앞에 움츠리지 않고.
왕은 이재가 왜 저렇게 후련한 둣 웃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 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여 주었다.
“그래. 우리 부인께선 항상 맞는 말만 하지.”
“그렇진 않고요.”
“아니야,전부 다 맞다.”
“다 맞다면서 아니라는 건 또 뭐지.”
이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둣 말하면서도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국왕과 자신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말했다.
“폐하,물이 너무 예쁘네요. 그렇지 않나요?”
“……응. 내 눈에도 그래. 나도 보여.”
“고마워요. 폐하가 아니었으면 전 평생 이런 용기는 못 냈을 것같아요.”
넘실대는 푸른 기운을 향해 다 시 한번 손을 뻗어 본다.
멋진 미소를 지어 본다.
이 모든 순간은 산 자에게 주 어진 선물이었다.
의지를 갖고 인 생을 살아 낸 자가 가질 수 있는 특권.
이재는 더 이상 물 앞에서 떨지 않았다.
생은 찬란했고, 사랑은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