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23)
마음이 이끄는 대로-123화 (외전)(123/134)
#외전 1. 안식
#1-1
이재는 강물 앞에 서서 부적을 태우고 있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반짝임은 국왕만 볼 수 있었지만,등 뒤에 선 사람들은 모두 고요했다. 그녀가 지금 정성올 다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다들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게 대체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 했다.
행동에 과함이 없는 시종장은 가만히 있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람들의 의아함은 깊어졌고, 그는 결국 모두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왕후 폐하께서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 건지……”
국왕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살짝 짜증이 밀려온 얼굴이었다.
사실은 그도 무척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안이 있으면 뭐 하나.
왕후는 정말 잡다한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어도 설명해 주지 않으면 행동의 이유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 국왕을 대신해서 쓴소리를 한 건 데보라였다.
“눈치가 없으면 입이라도 무거워야지. 명색이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 모시는 분들의 의도를 알아야 더 잘 보좌할 수 있을 게 아닌가.”
“필요한 거면 어련히 말씀을 해 주셨겠지.”
“왕후 폐하는 본래 말씀을 아끼시는 분이지 않나. 이런 건 왕후 궁 쪽에서 먼저 챙겨야 한다고 보는데.”
그들은 성 사람들답게 소리를 죽여 가며 언쟁하고 있었다.
물론 국왕의 귀에는 모두 들렸고,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뭐 하나 싶었다.
“둘이 요즘 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던 왕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사귀겠다.”
“………”
“아닐 거 같지?”
카이엔은 시종, 시녀들의 자유로운 혼인을 허가한 나라였다.
그 러나 시종장과 시녀장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독신을 고수하고 있었다.
둘 다 맡은 소임에 대한 책임감과 몰입도가 과했기 때문이다.
데보라는 몹시 억울한 얼굴로 국왕을 바라보았고,왕은 고개를 까닥였다.
“어,말해.”
“폐하,저처럼 미천한 이에게도…… 인격은 있습니다. 저는 시종장과는 그런 식으로 묶이고 싶지 않습니다.”
면전에서 이런 식으로 공격적인 발언을 하면 시종장도 참기 힘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종장과 데보라는 눈빛으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있었다.
국왕은 별 희한한 짓을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뭐 하나? 왕 앞에서. 내가 친구 같지.”
사실 왕은 출정식 이후로 둘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 알고 있었다.
손수건이 도화선이 된 것 같았다.
왕은 자신과 왕후의 최측근에게 그걸 성 사람들의 언어로 말해 준 거였다. 이런 얘기가 있으니 알고는 있으라고.
그런데 지금 보니 둘 다 아예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알고도 저러니 말 많은 사람들이 더 떠들어 대는 거였다.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진 왕은 알아서 하라고 픽,웃었다.
“죄송합니다,폐하.”
“죄송할 건 없고. 시녀장, 왕후한테 가서 언제쯤 끝나겠냐고 물어봐. 재촉하지는 말고.”
“예,염려 마십시오. 눈치껏 잘 여쭙겠습니다.”
시녀장은 고개를 조아리고는 이재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곳에서 한두 시간을 더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다 성에서 온갖 환난을 버텨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후는 그들과는 또 결이 달랐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가 없는데, 면벽 수행을 하루 종일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데보라는 그런 왕후에게 상냥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왕후 폐하,송구합니다.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만, 점심 식사는 몇 시쯤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아,많이 기다렸지. 난 다 끝 났어.”
이재는 재가 묻은 손바닥을 탁, 탁 털었다.
그러자 데보라는 이재 대신 그녀 발 앞에 있는 우묵한 물그릇을 챙겼다.
시녀장과 함께 걸어오는 이재를 보고 있던 국왕은 어서 오라며 다정하게 손을 뻗었다.
“어,하던 건 다 끝났나?”
“네. 뭐 하고 계셨어요?”
“하긴 뭘 해. 그냥 너 구경하고 있었지.”
“미안해요. 많이 심심하셨겠네.”
“그게 참 의문이야. 왜 난 널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가 않지. 좀 알려 줄래?”
이재는 웃음을 홀렸으나,그는 슬쩍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사실 국왕을 비롯한 몇몇 사람 들은 지금 이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이 공식적으로는 왕후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오늘은 헤일리의 생일이었다.
왕후가 영능력자라는 건,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헤일리가 아니라는 걸 아는 이는 제이드와 데보라를 비롯한 소수뿐이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조금 난감해지고 말았다.
왕후의 생일을 안 챙기자니 위신이 떨어질 것 같았고,챙기자니 본인 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행사를 어떻게 매끄럽게 넘길 수 있을까, 몇 주 전부터 고심했다.
그리고 그때 왕후는 난데없는 외출을 선언했다.
사실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물 색없이 찾아와서 축하 인사를 늘 어놓을 귀족들을 다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문제 가 있었다. 외출을 선언한 왕후가 향한 곳이 강가였다는 것이다. 헤일리가 몸을 던진 바로 그 장소였다.
“부인,우리 잠깐만 앉을까? 근 처에서 식사나 하고 들어가지.”
“그래요. 좋아요.”
로더릭은 곧바로 바닥에 본인의 상의를 깔고,이재를 앉혔다.
그 는 둥 뒤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 안으며 다리를 얽었고,두 사람은 오랜만에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 보았다.
이재의 정수리에 턱을 얹은 왕은 물었다.
“부인. 물 보니까 또 좋아?”
“네,그러네요.”
“이제 진짜 때가 왔지 싶다. 조만간 왕후궁에 호수 하나 파 줄게.”
그녀는 말간 미소를 지었고,그 소리 없는 진동을 느끼고 있던 로더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헤일리 생일이라서 여기 온 건가?”
“네,축하도 해 주고 싶고 추모도 해 주고 싶어서.”
“………”
“근데 불러도 안 오네요.”
“부인도 그런 거 할 수 있었어?”
이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새벽녘부터 부적을 태운 건 초혼 의식을 해 보기 위함이었다.
어떤 말이라도,어떤 바람이라도 다 괜찮으니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보통은 그런데요. 제가 보내는 건 신호고,어떻게 응답할지는 영가의 의지예요. 근데 그 애는 아마 조용히 쉬고 싶은가 봐요.”
한이 있으면 인세를 떠도는 게 보통의 영가였다.
헤일리도 손톱 만큼의 미련 정도는 남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응답하지 않는 건 오로지 산 사람들을 배려해서일 것이다.
망자의 그림자로 남은 이들의 미래를 가리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사실 이런 의식은 살아 있는 사람 마음만 편해지겠다는 이기심일지도 몰라요. 자기만족 같은 거요.”
“………”
“그래도 그렇지. 하소연을 할 법도 한데, 헤일리는 왜 이렇게 호인이었을까요.”
이재는 씁쓸하게 웃었고,비로소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로더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사연임은 분명했다.
운명을 비튼 시작점이 헤일리였다는 점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국왕에게 가장 중요한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었다.
왕은 사실 이재에게 정말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그런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이게 무신경한 질문처럼 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싶으니 늘 다가가고, 용기를 내는 것뿐이었다.
“이재.”
“네?”
“그럼…… 네 생일은 언제야?”
이재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에는 점차 재미있다는 기색이 깃들었다.
“그게 중요하세요?”
역술인이에요? 사주팔자나 궁 합 보실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그곳과 이곳의 시간이 일치할 리 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별걸 다 묻는다는 식으 로 나오자,국왕은 조금 머쏙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중요했다.”
로더릭은 이 말이 과한 것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온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게 그렇게 유난스러운 행동인가?”
“와. 낭만적이시다.”
이재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로더릭도 어렵사리 물었지만,이재에게도 썩 즐거운 화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아라고 다 본인 생일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는 정확한 생일을 알고 있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이재의 경우, 부모가 이름은 적어 주었지만 태어난 날까지는 알지 못했다. 워낙 갓난쟁이였기 때문에 나이만 유추했을 뿐 이다.
그녀의 서류상 생일은 시설 앞 에 버려진 날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든 나중에 알게 되었든 딱히 기념할 의욕이 안 드는 것도 당 연했다.
“솔직히 얘기해도 되죠?”
“그럼.”
“사실 저도 진짜 날짜는 몰라요. 이렇게 제 입으로 말씀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지만,전 고아거든요.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셨죠?”
“………”
“저는 전혀 신경 안 쓰니까 폐하도 신경 쓰지 마세요.”
“………”
“이렇게까지 마음 써 줘서 고맙고요.”
이재는 미소를 머금고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하다 못해 밝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국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죄 많고 불쌍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머리를 여러 차례 쓸어 올리는 그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어릴 때 누가 함부로 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옆에서 보살펴 준 사람이 없었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본인이 태어난 날짜조차도 모르고 컸을 줄이야.
로더릭은 일단 이재를 꼭 안아 주었다.
“미안. 나 때문에 지금 상처받았지.”
“제가 왜 상처를 받아요.”
“괜한 거 물어봐서. 네 남편이 너한테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래. 그냥 귀엽게 봐 줘라.”
이재는 몸을 들썩이며 웃다가 등을 돌려 남편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보다 더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늠름한 왕은 지금 세상 누구보다 가없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처는 본인 혼자 받은 것 같았다.
왜 저러는 거야,정말.
“이런. 우시겠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재의 목소리는 농담조였다.
사실 국왕을 반쯤 놀리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무척 신기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유쾌하게 웃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의 얼굴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무척 미안해진 그 는 결국 오늘도 기혼자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비록 본인의 진짜 생일은 아니 었으나,어떻게든 아내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선물처럼.
“우리 식사하고 다음엔 어디 갈까.”
그러자 이재는 놀란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으로 안 돌아가나요?”
“이왕 나왔는데 하루 이틀 더 놀다 가지.”
“정말 여관에서라도 주무실 셈이세요?”
이재가 그 언젠가 외출했을 때의 농담을 떠올리며 묻자, 국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널 그런 허름한 곳에 재우겠어? 남편 자존심을 자꾸 이런 식으로 밟지 마라.”
너는 좋은 것만 먹고,좋은 것 만 입고,안락한 곳에서 자야지.
왕은 그녀가 자신 때문에 힘들 었던 것에 더해,어린 시절 포기했던 것들까지 다 보상해 주고 싶었다. 평생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이재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