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25)
마음이 이끄는 대로-125화(125/134)
#1-3
무의미한 논쟁이 완전히 종식된 건 갑자기 그들을 찾아온 사람 때문이었다.
이재에게는 뜻밖이었으나, 국왕은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곳의 영주인 글래스딘 후작이었다.
“폐하,이 먼 곳까진 어찐 일이십니까?”
“멀긴. 왕후랑 바람 좀 쐴까 해서. 왜. 너무 갑작스러웠나?”
실제로 후작은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국왕은 따로 기별 같은 건 하지 않고 영지에 걸음 했다.
굳이 떠들썩하게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검문소를 정식으로 통과 한 이상, 후작에게 소식이 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후작은 당치도 않다는 둣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페하와 왕후 폐하를 뵈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이재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 그런 것 치고는 땀을 너무 많이 홀리고 계신 것 같아요.
그녀는 내심 미안했지만,후작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폐하.”
“어,말해.”
“성으로 바로 돌아가십니까?”
“아니. 근처 사택에서 하루 이 틀 정도는 쉬고 갈 생각이다.”
국왕의 대답을 들은 그는 더더 욱 조심스럽게 청했다.
“괜찮으시다면…… 물론 누추하 긴 합니다만, 후작저에서 쉬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게 아니면 식사라도……”
로더릭은 픽, 웃으며 후작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는데, 잠시 자리 좀 피해 줘.”
후작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국왕은 곧바로 이재에게 의향 을 물었다.
“어떡하고 싶어? 식사라도 할래? 다 안 내키면 내가 적당히 사양하고.”
“전 뭐든 상관없는데요. 방금 후작이 우리를 굉장히 불편해하는 것 같지 않았나요?”
“부인. 그럼 왕이 편하겠어?”
“이상하네요. 난 편하던데.”
국왕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 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같이 웃던 이재는 궁금한 둣 물었다.
“속으로는 그냥 가 줬으면 하지 않을까요?”
“그래 보였어?”
또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알쏭달쏭해진 이재는 인상을 썼다.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능숙하지만,정치 지형 에는 큰 흥미를 못 느낀 결과였다.
그런 이재를 귀엽다는 둣 바라 보던 왕은 곧바로 답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그냥 가면,후작은 아마 땅을 치고 울 거다.”
이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정도라고? 하는 의심이 들긴 했으나 남편의 말을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국왕과 이재는 영지를 하루종일 구경하고 해가 질 무렵 후작 저에 당도했다.
글래스딘 후작과는 달리 후작 부인은 이재와 꽤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접견 명부에 여러 번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후작보다는 조금 더 여 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그들을 맞이했다.
국왕은 언젠가 이재에게 말한 적이 있다.
국왕 내외가 하룻밤 묵고 간다는 건 귀족들에겐 크나 큰 영광이라고.
농담처럼 말했으나,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왕은 종종 식사 를 겸한 정찬, 석찬 회의를 열곤 했지만,아무하고나 사적으로 식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래스딘 후작은 오랜 시간 중도에 가까운 입장을 고수해 왔다.
반왕파가 완전히 무너진 지금,후작이 이 기회를 어떻게든 부여잡고 싶은 건 당연했다.
저녁 식사는 최선을 다해 힘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융숭하기만 했다.
국왕의 시종들이 한발 먼저 와서 확인을 끝마친 음식들이었다.
후작 부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왕후 폐하. 정말 영광입니다. 준비가 부족한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재는 아니라는 둣 고개를 저었고,국왕은 픽 웃으며 말했다.
“겸양이 지나치군. 이런 식으로 찾아온 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 해.”
국왕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자, 후작은 또 땀을 홀리기 시작했다.
국왕이 갈 수 없는 땅이란 카이엔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건 불필요한 사과였기 때문이다.
이재는 왕을 힐끔 바라보았다.
페하, 이게 뭐예요. 우리가 왔는데도 울 것 같잖아요.
로더릭은 이재에게 어깨를 으쑥해 보였고,후작 부인은 눈치를 주듯 후작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후작은 한발 늦게 답변했다.
“아,아닙니다. 정말로 영광입 니다. 그저 찾아 주실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폐하,제가 그간 지은 죄가 정말로 많습니다.”
그간의 행보에 대한 뼈 있는 사죄였다.
그래서 물끄러미 바라 보던 왕도 뼈 있는 말로 화답했다.
“그대가 지은 죄는 없다.”
“송구합……”
“물론 딱히 잘한 것도 없는 것 같긴 해.”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하자,이번엔 이재가 눈치를 주듯 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할 거면 그냥 사택으로 가지,왜 제 의를 수락했냐는 뜻이었다.
후작 은 딱히 업보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던 로더릭의 머릿속에는 순간 새로 운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는 왕후랑 이렇게 여행 삼아 종종 영지 시찰이나 다녀야 겠다고.
로더릭은 픽 웃으며 후작에게 말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정말 큰 의도 없이 왔으니까 식사나 하지.”
다소 심술궂은 시작이었으나,
식사는 그 뒤로 꽤 매끄럽게 진 행되었다.
이재와 후작 부인이 그 간의 안부를 도란도란 주고받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마디를 건넨 이후, 이재는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국왕과 후작이 영지 사정이나 정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이었다. 끼고 싶지도, 대화를 방 해할 의사도 없었던 그녀는 그저 음식에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왕은 그런 이재가 무척 이나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후작과 말을 나누며 틈틈이 그녀에 게 시선을 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미 몸에 밴 습관을 어쩌지 못한 그는 이재에게 말했다.
“부인,이거 한번 먹어 봐. 부인 입맛에 잘 맞을 것 같다.”
“알았어요.”
“이것도.”
“네,그럴게요.”
“생각만큼 그렇게 안 달아.”
“……폐하,알았으니까 하던 얘 기는 마저 하세요.”
이재는 조용히 속삭였으나,그 대화가 사람들 귀에 안 들릴 리는 없었다.
글래스딘 후작은 좀 오묘한 표정이었다.
후작은 아내에게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낯간지러운 건 또 못하는 편이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국왕이 원래 저런 남자 였나? 매번 퉁명스럽게 특,특 내 뱉는 것이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변하는 순간만 보았던 후작은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국왕과 왕후의 결혼 생활은 귀 족들에게는 언제나 초미의 관심 사였다.
두 사람은 매번 사교계의 예상을 보란 둣이 뒤엎곤 했기 때문이다.
사이가 좋다는 건 이제 말하기도 입 아픈 이야기였다.
국왕은 광증이 있었을 때도 왕후의 의견은 귀담아들었다.
왕후가 국왕의 편에 서 있다는 것도,이번 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사교계 호사가들은 또 제멋대로 예상했다.
왕후의 가문인데 조금 은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
그러나 왕은 큰 자비 없이 던컨가를 실각시켰다. 재산마저 몰수했다.
심지어 정계에서 물러난 왕후의 부친은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고있었다.
닮고 닮은 귀족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왕후는 변함없이 애틋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상황이 어떻든,서로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둣이.
한편 후작 부인은 조금 더 세세한 부분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국왕은 지금 왕후에게 음식을 그냥 권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왕후의 음식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편 쪽보다는 뛰어난 관찰력이었으나, 그녀의 결론도 결국 남편과 유사했다.
폐하가 소문보다 자상한 면이 있었구나.
그리고 후작 부부의 눈에 신기한 일은 그 뒤로도 계속 벌어졌다.
후작은 조금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아껴 두었던 술을 내어 왔다.
국왕 눈에야 차지 않겠지만,왕실 격에 맞출 수 있는 귀족가는 카이엔에 거의 없었다.
“폐하,부끄럽지만 대접할 게 마땅치 않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국왕은 이런 술을 내오든 저런 술을 내오든 그런 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종들이 적포도주를 확인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술은 우리끼리만 하지. 왕후가 술이 좀 약해서.”
그러자 이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두 모금은 괜찮아요.”
“까불…… 무리하지 말고.”
“아니, 그 정도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차분한 말투였지만 이재가 지금 발끈했다는 걸 나홀로 느낀 국왕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부인,이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 낭비야.”
“………”
“또 앓아누울 거야?”
국왕이 손을 뻗어 살구색 머리 칼을 쓸어 넘겼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결국 못 본 척하기 힘들어진 후작 부인은 말했다.
“폐하께서 왕후 폐하에 대해 정말 잘 알고 계신가 봐요. 왕후 폐하는 좋으시겠습니다.”
그러자 멋쩍어진 이재를 대신해서 국왕이 답변했다.
“내가 왕후를 자세히 알고 싶어서 연구를 좀 많이 했거든.”
“………”
“나도 나름 노력했다는 뜻이야. 원래 사람 마음을 얻으려면,누구나 이 정도 노력은 하는 거잖나.”
그 연구를 시작한 이유를 돌이켜보면 미화된 감이 있었다. 하지 만 국왕이 사람들 앞에서 하기에 는 상당히 허심탄회한 발언이기 도 했다.
자리는 그 뒤로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계속되었다.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에 국왕도 몹시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가 끝나 갈 무렵, 왕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려야만 했다. 계속 사담을 나누던 후작 부인이 이재에게 이상한 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왕후 폐하. 제가 그 거래로 잃는 것은 없겠습니까? 얻는 게 있으면 더욱 좋지만요.”
국왕은 점점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저런 논조의 말은 국왕 앞에서는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 는 이재가 뭔가를 답해 줄 때마다 기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런데 왕후의 휴식을 훼방 놓다 못해 일을 시키니 심기가 살짝 불편해지려 했던 것이
“고견 있으시면,감사하게 새겨 듣겠습니다.”
“혹시 지금 접견 중이었나?”
국왕이 조금 까칠하게 묻자,분위기는 냉각될 뻔했다.
그러나 이재는 식탁 밑으로 왕의 손을 잡으며 웃는 낯으로 답해 주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을 거라고.
그런데 사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야말로 좋은 일이라고.
모든 것을 해탈한 사람 같은 발언이었다.
국왕은 왕후가 웃고 있는데,굳이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