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3)
마음이 이끄는 대로-13화(13/134)
#13.
그날 이후 로더릭은 왕후의 처소에 발길을 뚝 끊었다.
국왕의 사람들은 모두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왕은 발길을 뚝 끊어 놓고도 오히려 왕후한테 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던컨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그의 일과였지만, 그렇다고 왕이 그들에게 사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의 시종들은 모두 왕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확신하게 된 것에는 한 가지 계기가 있었다.
왕이 꽤 오랜시간 보석 세공품을 보고있자 사람들은 힐끔힐끔 눈치를 봤다. 광산이 있는 영지에서 보내온 것으로 일종의 진상품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혹시 이것도 광증의 전조인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로더릭은 그냥 팔찌 하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팔찌를 보며 왕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팔찌도 제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저 조각도 다시 주시면 안 돼요?’
“확실히 좀 이상한 여자야.”
국왕이 피식 웃자 제이드와 시종장은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와 달리 오늘 로더릭의 상태는 아주 괜찮았다.
그는 왕후가 자신을 불편해할 것 같아서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래도 남편인데 그렇게 치한 보듯 할 건 없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럼 그보다 더한 짓은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왕후가 이 결혼을 억지로 한 것도 사실이었다.
로더릭은 팔찌를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제이드.”
“예,페하.”
“이거 왕후 갖다줘라.”
제이드는 당황해서 잠시 쭈삣거렸지만 곧 정중한 태도로 팔찌를 받아 들었다.
“너도 지금 하고 있는 팔찌 봤나?”
“……예,봤습니다.”
로더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아주 별로라고 전해. 그건 괴작이야.”
“………”
“시대를 역행한 건지 앞서간 건 지 알 수가 없더군.”
왜 가만 계시는 왕후 폐하한테 시비를 거세요?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그들은 미묘하게 다른 느낌도 받았다.
국왕은 지금 그냥 진심이 높은 농도로 섞인 농담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저건 던컨에게 거는 시비라기보다 관심이 가는 여자에게 한 번쯤 부려 보는 심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왕의 시종들은 확신했다.
역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반면 왕후의 시녀들은 아무 일 도 없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침대와 몸 상태는 물론 이번에 는 옷마저 말끔했기 때문이다.
남녀가 한방에 있는데도 장작에 불이 안 붙네.
거울만 봐도 즐거울 미남미녀에 한창때인데, 도대체 어느 분께 문제가 있는 거야?
게다가 왕후는 왕이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전혀 상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물론 이재는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자신이 혹시 무안올 준 건가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체격이 좋은 남자가 위에서 덮치듯이 몸을 눌러 오니까 그녀도 순간 평정을 유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 무섭냐는 왕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재가 크게 상심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외면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고,고아라서 외면받고,신기가 있어서 사람들 틈에도 섞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항상 그녀를 향해 일관되게 가지는 거리감과 온도가 있었다.
그게 강이재의 지난 일생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제이드와 왕의 시종은 이재의 처소를 방문했다.
로더릭이 보낸 팔찌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뭐야?”
“페하께서 지금 하고 계신 팔찌 별로시랍니다.”
사실은 괴작이라고도 하셨습니다만…… 현 시대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도 하셨습니 다만…… 그걸 대체 제 입으로 어떻게 말하지요?
말을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이재는 살짝 발끈했다.
“왜 이젠 내 취향까지 폐하가 판단하고 난……”
“원래 늘 말만 그렇게 하십니다.”
왕후의 반응을 확인한 제이드는 친구를 슬쩍 두둔했다.
사실은 로더릭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꽤 많았던 이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예. 예전에는 확실히 그러셨습니다. 요즘은……”
말보다 행동이 포악할 때가 간혹 있긴 하지요.
“뭐,아무튼 오다 주웠다고까지는 안 하셨습니다. 또 아예 없는 말은 잘 안 하시거든요.”
제이드와 왕의 시종은 지들끼리만 아는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고, 이재는 그들을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데보라는 전달하는 놈들이 죄다 반푼이 같은 놈들뿐인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눈을 부라렸다.
딱 봐도 마음을 쓴 선물인데 저렇게밖에 포장을 못하나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재는 왕이 보낸 팔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찌는 사과의 연장인 것 같기도 했고,조각도는 안 된다는 의사 표현인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재가 사용하던 조각도 중에는 단검 수준으로 날이 길고 날카로운 것들이 있었다. 자해의 용도로 충분히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로더릭은 그런 물건을 쥐여 줄 정도로 왕후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기분은 나쁘지 않아서 이재는 픽 웃었다.
이재는 차고 있던 팔찌는 오른 쪽에 그대로 놔두고,왕이 보낸 팔찌를 왼쪽에 착용했다.
왕이 모를 뿐이지 그녀의 무기는 겨우 조각도 같은 게 아니라 이 염주 팔찌였다.
그러니 예쁜 팔찌가 생겼어도 무기를 떼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폐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진심으로.”
그러자 제이드와 왕의 시종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틈틈이 접견 일정을 소화하며 이재는 다시 헤일리의 일기장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헤일리의 일기장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몇 차례나 느꼈다.
이게 바로 원귀에 시달리는 국 왕의 폭력적인 기분일까?
헤일리의 작문 습관에 문제가 있는 건가,자신에게 난독중이 있는 건가 햇갈릴 지경이었다.
강이재의 이곳에서의 지식은 헤일리 던컨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 있다.
그런데 헤일리의 관심사는 이재 와는 많이 달랐다.
또 엄청나게 박식한 사람도 아닌 듯했다.
결국 이재는 불친절한 일기장은 다시 넣어 두고 사관을 찾기로 결심했다.
“왕실 계보 같은 거 없을까? 이건가?”
왕후가 책 한 권을 꺼내들고 묻자 깡마른 사관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건 왕족분들만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기록을 드리겠습니다.”
이재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난처해하는 사관과 데 보라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답을 얻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폐하의 배우자인데……”
그러니까 난 왕후인데,나는 왕족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자 사관은 자신이 정말 무엄한 말실수를 했다는 둣 창백해 졌다.
“아,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 라 몇몇 왕족분들만 읽으실 수 있는 글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건 그걸 옮겨 적은 사본입니다. 따로 익히시진 않으셨을 것 같기에……”
이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것 참 식사 중에도 외국어로 대화하는 재벌가 같은 이야기네.
하지만 그녀가 살던 곳에도 그런 비밀스러운 기록은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건 가장 정확하고 진실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줘. 깔끔하게 구경하고 다시 가져올게.”
시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읽어 달라고,혹은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는 요즘 국왕과 왕후의 사이가 무척 데면데면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썩 다정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이재는 정말로 볼 수 있을 것 같기에 빌려 온 것이다.
역대 왕후들이 쓰던 방에서 몇 백 년을 살아온 그 요사한 것이라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방에 돌아온 그녀는 대뜸 함의 정령부터 불렀다.
“너 이리 좀 나와 봐.”
-나아?
“그래. 너 이거 읽을 수 있지?”
-……..
정령은 댕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침묵에서 대답을 읽은 이재는 코웃음을 쳤다.
“너도 몇백 년을 놀고먹었으면 부적값을 해라.”
-그런 말은 없었잖아! 그리고 난 놀았지만 단 한 번도 먹진 않았어.
“……참 부러운 팔자다.”
하지만 정령의 입장에서 지금 이재의 존재는 액운이자 재난이었다.
난생처음 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 정령은 이 상황이 혼 란스러운 듯했다.
-아니야. 이재. 이런 건 말도 안 돼. 역시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야.
“너 원래부터 코 없었잖아. 이게 지난번부터 누구한테 계속 사기를 치고 있어.”
결국 어린아이 모습을 한 정령은 얌전하게 이재 옆에서 왕실 족보를 낭독했다.
-1 대 왕,소년왕 아서 룩스 블 레이크. 카이엔력 20년, 38세로 승하. 사특한 주술로 대륙을 지배 하던 다이몬 제국을 성검으로 제패하다. 이어 제후국들의 독립과 카이엔 건국을 선포하였다.
-4대 왕,라이언 블레이크. 카이엔 건국 100년을 맞이하여 적극적인 민족 융합 정책을 펼치다. 멜런,러셀,던컨과 왕실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27대 왕,로더릭 페루스 블레이크. 카이엔력 470년 탄생. 카이엔력 497년 즉위.
“………”
-끝인데?
“왜 벌써 끝이야? 폐하는 그거 밖에 없어?”
-아직 왕위에 있으니까 그렇지. 원래 업적은 다음 왕이 적는 거야.
“아아.”
공정하고 합리적인 말에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그녀는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폐하가 스물아흡 살이었구나. 보기보다 나이가 많네.”
이재와는 딱 네 살 차이였지만,
헤일리 던컨과는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이재는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왕이 아주 가끔씩 이상한 말투를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 너무 고맙네,좀 떠들어 볼래,나랑 이제 말 안 할 거야? 퉁명스럽게 굴다가도 그녀가 표정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저런 말투가 툭, 툭 튀어나오곤 했다. 무심코 달래 주려는 사람처럼.
당신은 그래서 제가 까불어도 목을 자르지 않고 참아 주는 거였군요.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영가들 앞에 저희는 어차피 다 똑같은 어린아이들일 겁니다.
그런데 이재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의 대운은 보통 십 년 단위로 바뀐다.
그렇다면 로더릭은 지금 그 지점에 임박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의 국운은 오백 년 단위로 바뀐다.
왕조 국가가 오백 년이나 천 년 단위로 급격히 쇠락하곤 하는 것은 그런 국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이엔력 499년.
왕의 대운이 곧 나라의 국운이다.
그런데 국왕의 대운과 나라의 국운이 바뀌는 시기가 겹쳐 있다.
그게 참 공교롭다고 생각하며 이재는 쥐고있던 펜대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