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7)
마음이 이끄는 대로-17화(17/134)
#17.
그리고 이재의 섬세한 손길을 받고 있던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제이드는 입을 살짝 벌렸다.
시종들은 수군거렸다.
수면초다. 확실히 인간 수면초야.
하지만 이재의 시각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귀를 떼어 내고,자신이 기가 흐르는 통로를 다시금 열어 주고 있으니 몸이 노곤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본래 고질적인 불면증 환자였다.
그녀는 또 로더릭을 자신의 무름에 눕히고 그가 편하게 자게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왕의 몸을 더듬고 있는 그녀의 표정만큼은 굉장히 심각 했다.
그 고운 미간에 주름마저 잡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기묘해졌다.
둘은 부부였고, 굳이 짐승과를 고르라면 왕일 텐데 이상하게 왕후가 열심히 왕을 덮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사람들은 더욱 민망해서 시선을 떨궜다. 국왕이 또 지난번처럼 왕후의 허리춤을 움켜쥐고 나른한 신음을 홀렸기 때문이다.
새카만 늑대가 작은 여우에게 체급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자기 체중을 싣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은 여우가 심히 가련해 보였다.
이제 왕의 시종들은 왕후의 시녀들을 완전히 불신하게 됐다.
그들은 눈치 없는 왕후의 시녀 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 둘이 아무 일도 없었는데 매번 저러고 붙어 있올 수가 있는 거냐?!
왕후궁에서는 일을 정말 이딴 식으로 할 거냐?!
한편 숨 막혀 죽겠다는 얼굴로 로더릭을 바로 눕힌 이재는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을 묻기로 했다.
그녀는 제이드를 입 모양으로 불렀다.
그가 발소리를 죽여 다가오자 이재는 속삭이듯 물었다.
“폐하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오늘 오전부터 좀 좋지 않으셨습니다.”
제이드는 그녀의 질문을 오인했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던 이재는 말했다.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성격이 나빠지신 거냐고.”
더 좋게 표현할 능력이 안 돼 서 이재는 헛웃음을 홀렸다.
그녀의 곤란함을 알았는지 제이드도 헛기침을 했다.
입가를 매만지던 기사단장은 곰 곰이 생각하다가 답변했다.
“사실 두통은 꽤 오래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예,선왕께서 승하하시고 즉위 하신 이래로 간혹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심해지신 건 그렇게 오래 안 되셨습니다.”
27대 왕,로더릭 페루스 블레이 크,즉위 497년.
이재는 왕실 계보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삼 년이나 이 고생을 한 거구나.
대단하다,정말.
이재는 평온한 얼굴로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를 간지럽히고 있 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그가 잠결에 으음, 하는 소리를 홀렸다.
염주 팔찌와 소매에 숨겨 둔 부적 때문이라는 걸 눈치챈 그녀는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그의 이마 위에 올려 두었다.
폐하,착한 생각. 좋은 생각. 그런 생각만 하세요. 맑아져라, 머리머리!
이마를 쓰다듬던 이재는 다시 기사단장을 불렀다. 부탁하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제이드.”
“예.”
“폐하랑 지난번처럼 대련도 자주 하고 그래 주면 안 될까?”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제이드 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무기를 드시면 훨씬 더 난폭해지실 때가 많아서……”
“그래?”
동의할 수도, 그렇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서 이재는 고개를 기곳 했다.
살생은 하지 말라고, 무기를 놓으라고,혹은 들라고 그렇게 쉽사리 단언할 수는 없었다.
로더릭은 장수의 골상,제왕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서의 숲,거기라도 종종 모시고 가. 공기 좋더라. 제이드, 폐하랑 친구라면서.”
이재는 국왕을 요양이 필요한 환자 대하듯 말했다. 나름 상냥한 관점이긴 했지만 기사단장은 이 번에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왕후 폐하,그곳은 왕실분들 말고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아,참 그랬지.”
본인 기억에 몇십 년분이 추가되니까 이 모양이었다.
혀를 차던 그녀는 깊게 잠든 국왕의 머리칼을 몇 번 더 쓰다듬었다.
겨우 진정된 짐승의 검은 털을 어루만지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왕후의 눈빛에는 계속 어떤 수심 같은 게 엿보여서 제이드는 그 모습을 뻔히 바라보았다.
이재가 또 헤일리의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국왕의 시종 하나가 기별했다. 데보라는 이재 에게 알렸다.
“국왕 폐하가 이쪽으로 오고 계신답니다.”
이재는 곧바로 일기장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가 이재의 방에 들이닥쳤고,그 중심에는 로더릭이 있었다.
이재는 로더릭의 뒤를 따르던 원령 두엇이 튕겨 나가는 걸 보고, 결계가 아직 건재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왜인지 살짝 인상을 쓰 고 있는 로더릭을 보며 이재는 물었다.
“오늘도 제 아버지가 미쳐 날뛰고 있나요?”
로더릭은 걸어오다 말고 멈칫했고, 왕의 시종들도 움찔했다.
왕의 시종들이 왕후의 시녀들을 죽일 둣이 노려보았다.
왕후 폐하는 뭐 저렇게 악의 없는 말투로 폐하를 물 먹이시냐.
그러나 왕후의 시녀들은 대체로 왕의 시종들보다는 기가 셌다. 귀나 후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백전무패의 시녀장,데보라가 있었다.
왕후 폐하가 확실히 우리 생각 보단 잘 안 지시는 것 같다.
왕후궁에 시녀로 배정된 이상, 그들은 어차피 왕후와 운명 공동체가 될 팔자였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럼 오늘은 어찐 일이세요?”
상태도 괜찮아 보이고,잠도 잘 잔 것 같다. 이재는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랫사람들끼리 계속 무의미한 기 싸음이나 벌이고 있을 때, 로더릭은 자신이 정말로 아무 용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사실 병원을 정기 방문하는 환자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지만,로더릭이 그 사실을 정확 히 인지하기는 힘들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곧 그녀에게 되물었다.
“난 아내 방에 용건 없이 올 수는 없는 건가?”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설핏 웃으며 말했다.
“정인 있는 아내 선물……”
“너도 1절만 해라.”
“네.”
또 예고 없이 까불어서 죄송해요.
“누가 던컨 아니랄까 봐 한번 문 건 안 놓네. 장인이 그럴 때마다 짜증 나는데 너까지 그러진 마라.”
이를 갈던 왕도 사이좋게 가문 욕을 하며 물을 먹였다.
하지만 이재는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웃었고,그 모습에 로더릭도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이재를 지나쳐서 먼저 자리 잡은 로더릭은 말했다.
“그때 못 마신 차나 같이하지.”
이재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왕 후궁 시녀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데보라가 귀엣말을 하고,시녀 하나가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물끄 러미 보던 이재는 말없이 로더릭 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차를 기다리던 로더릭은 맑은 눈으로 이재를 응시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너 이리 와서 그것 좀 해봐”
“어떤 거요?”
로더릭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왜 네가 서재에서 하던 거 있잖아. 고양이들 앞발로 누르는 거 같은 거.”
저게 뭐지? 한참 동안 생각하던 이재는 살짝 발끈했다.
지금 무속인들의 그 신성한 의료 행위를 고양이 꾹꾹이에 비유하신 거예요?
전 정말 없는 실력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어떻게 피드백이 그래요?
“또 잠을 못 잤다.”
“………”
“네 기원이 어제는 닿지 않았어. 어젯밤엔 다른 사람 생각 했나 보지.”
“……그런 것치고는 꽤 잘 주무신 얼굴이신데요. 안색이 좋아요.”
용건 없이 찾아온 국왕이 개수작을 걸고,왕후가 튕겨내는 것같은 모양새를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마를 긁적이며 고민하던 이재는 난감해했다.
저게 그가 잃지않으려는 투철한 이성인지 타고난 육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눈에 띄는 짓은 안 하는 건데.
반면 이재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자, 로더릭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말고 좀 해 줘 봐. 부탁하고 있는 거잖아.”
“………”
“왜 갑자기 눈치 없는 척해.”
결국 왕과 사이좋게 한 번씩 한숨을 쉰 이재는 자리를 그의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번과는 달리 대충 아무데나 주물럭거리고는 말았다.
의심을 키우고 싶지도 않았고,어차피 약도 아픈 사람한테나 효과가 있는 거였다.
로더릭은 오늘 상태가 꽤 괜찮아 보였고,그녀는 그의 상태가 대체 왜 이렇게 기복이 심한 건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로더릭은 이재의 우려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의심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기사들이야 원래 자기 몸을 다 룰 줄 안다.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혼자 대고,빠진 어깨 정도는 직접 맞출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자가 치료가 가능한 인종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연하게 운동이 어쩌고 한 사람치고 왕후는 손끝의 촉감이 너무나…… 말랑거렸다.
결국 그는 이재의 손을 떼어 내고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확실히 검은커녕 험한 일 한번 해 본 적 없는 딱 제 또래 귀족 여자들의 손이다. 심지어는 너무 말랑말랑한 나머지 조각도를 쥐었던 손마디마저 아직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곧 물집이 잡힐 둣한 작은 손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뭐? 네 취미가 정말 조각이야?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내려놓은 로더릭은 얼굴을 매만 졌다.
그는 이재 쪽을 보며 뭔가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잠시 멈칫해야만 했다.
시선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한 그는 말했다.
“유혹이라도 하는 건가?”
“또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이재가 잘 못 알아듣는 눈치이자, 로더릭은 시선을 그대로 옆으로 둔 채 조용히 말했다.
“앞에 다 풀어졌잖아.”
“……네?”
이재는 자신을 훌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여기저기 막 아무렇게나 누르며 몸을 음직이느라 드레스 가슴 부근을 조였던 끈이 헐겁게 풀어져 있었던 것이다.
놀란 나머지 옷매무새를 추스르 던 그녀의 손가락은 자꾸 애먼 곳을 헤맸다.
이재가 가슴께를 가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왕의 시종들은 보 이는 게 왕후의 등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게 더욱 창피했던 이재는 구원을 바라는 얼굴로 데보라를 바라봤다.
빨리 와서 이 빌어먹게 복잡하 게 생긴 옷을 어떻게 좀 해 봐.
속옷이 보여요. 내 눈빛이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 그래도 지금껏 손발 꽤 잘 맞았잖아!
그러나 시녀장은 몇백 년 묵은 귀신만큼은 아니어도 반백 년 정도는 묵은 귀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데보라는 금세 상황 판단 을 마치고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몹시 당황하는 왕후와 그런 그녀를 외면해 주고 있는 국왕을 보며,시녀들은 이번에야 말로 확신했다.
안 잔 거다. 저건 안 잔 게 맞아. 확실해.
그녀들은 복수심에 불타서 시종들을 죽일 둣이 노려보았다.
너희들이 우리 눈치를 의심해? 어디 눈치라고는 수프에 썰어 넣고 끓여 먹을래도 없는 것들이?!
그리고 왕후의 간절한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시녀장을 보며 로더릭은 헛웃음을 지었다.
‘일을 참 쓸데없는 쪽으로 열심히 하는군.’
내심 혀를 차던 로더릭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옷 매무새를 더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이재의 손을 밀어냈다.
“치워 봐.”
그는 재주 좋게 끈을 끼우고 살짝 조였다. 손가락이 옷자락에 약간씩 스쳤지만,그는 꽤 깔끔하고 빠른 동작으로 매듭을 지은 후 떨어졌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이재는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속옷이 보인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대체로 늘 순순하던 그녀가 답지 않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이런 건 추행이에요.”
“……뭐?”
옷을 제대로 입혀 주었는데도 도리어 욕을 먹은 로더릭은 중얼거렸다.
“그럼 나보고 뭐,어쩌라는 건지.”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시선은 다시 또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씨. 아니라더니 벌레 보듯이 하는 거 맞네.
“끝까지 모른 척해 주셨어야죠”
“그러면 다른 놈들이 보잖아.”
“다른 방법으로 알려 줄 수도 있었잖아요?”
그도 시녀들 보고 와서 하라고 말한 거였다. 그리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럼 뭐,나보고 종이에 적어서 새처럼 날리라는 건가.”
왕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사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왕후 앞에서 더 변명을 해 봐야 자신만 모자란 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그냥 인정했다.
“그래,내 잘못이라고 하자.”
“………”
“나만 개새끼였다.”
“………”
“헤일리,미안하다고. 대답 좀 해라.”
이재는 몹시 인상을 쓰다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싫어요. 지금 진짜 싫어졌어요.”
“그래. 싫어하는 건 괜찮은데, 너무 많이 싫어하지는 말고. 나는…… 너 처음보다는 괜찮은 것 같으니까.”
그러자 이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금 무심결에 진심을 말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진 평정심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대답했다.
“네. 저도 뭐……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마음이 참 알뜰도 하군”
아직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재를 힐끗 본 로더릭은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