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18)
마음이 이끄는 대로-18화(18/134)
#18.
“카이엔에 영광을.”
1기사단장은 교본 같은 경례를 붙이고,로더릭의 안색을 살폈다.
심심치 않게 도지던 국왕의 광증은 최근 놀랍게도 그 횟수가 점점 잦아드는 것 같았다.
한번 증세가 있을 때마다 그 기세가 예전보다 폭발적이긴 했지만,그는 쉽게 진정되기도 했다.
그건 로더릭을 자극하는 원귀는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그걸 방어하는 사람도 점점 많은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재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지만,원귀와 이재는 결국 기 싸음을 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제이드는 밀봉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무어 남작가 장녀의 사고에 확실히 인위적인 흔적이 있다는 소견서 입니다.”
로더릭의 첫 번째 정혼녀에 관 한 얘기였다.
처음에는 굉장히 우 연한 사고처럼 보였지만,이어 두 번째 정혼녀마저 음독으로 사망하자 왕실은 뒤늦게 조사를 시작한 바 있다.
예상과 별다를 바 없는 결과에 로더릭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또 다른 화제를 내밀었다.
“그리고 폐하,왕후 폐하가 공작저에서부터 가져온 일기장이 있으신가 봅니다.”
“일기?”
“예. 열 권 정도 되는데 성에 들어오신 뒤로는 통 쓰진 않으시고 그냥 읽기만 하신답니다.”
다소 기이하게도 들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성 안의 사람들이 기록에 주의하는 건 흔한 일이긴 했다.
그건 기록의 중요성과 동시에 위험성 또한 알기 때문이다. 왕족 들은 그들만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중요한 사실들을 후대에 전 승하지 않던가.
제이드가 헤일리의 일기장에 관심을 가지는 건 그런 이유였다.
중요한 정보들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은 착실하게 헤일리를 당겨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때로 는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이드는 무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용을 좀 조사해 볼까요?”
왕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턱을 매만졌다.
“던컨 공작의 동향은 요즘 어떻지?”
“큰 움직임은 없습니다. 귀족들 에게 알버트 던컨의 복직을 계속 주장하고 다니기는 한답니다.”
로더릭은 혀를 쯧,찼다. 그리 고 일기장에 대해 조금 더 고민 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후도 그 정도는 간직하게 내버려 둬라.”
“……폐하.”
기사단장이 다소 반대하는 눈치였지만,로더릭은 다시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내 어린 시절 일기장까지 들춰 보는 천박한 남자는 안 되고 싶다.”
제이드는 어릴 때의 말투로 돌아가 고작 그런 자존심이 왕좌를 지켜 주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제이드도 헤일리의 일기 장이 다섯 줄이상 쓰인 적 없는 단문의 나열인 줄 알았더라면,굳이 이런 추접스러운 간언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로더릭은 조금 다른 생 각에 빠져 있었다.
그도 이재가 그랬듯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중 이었다.
어찌 되었든 헤일리 던컨은 이미 던컨가의 청탁을 두 번이나 본인 선에서 잘라 준 바 있다.
비록 그녀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로더릭은 더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나 풀러 가지.”
왕이 먼저 제안하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제이 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뒤 를 따랐다.
이재는 호숫가에서 한참이나 떨 어져 있는 곳에 앉아 있었다. 전 처럼 화단에 앉아 있었지만,그녀의 눈은 웅장한 호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나 서양귀가 또 자신의 옆 에 불쑥 나타나자,그녀는 시선을 흙바닥으로 떨구었다.
아,저거 또 왔어. 이재는 속으로 끙얼댔다.
-너,왜 나 또 모른 척해?
이재는 못 들은 척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찾아 흙바닥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귀신을 격퇴하는 주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 기세가 대단한 서양귀는 끄떡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주문에 영향받는 원귀도 아니었지만, 이재도 그냥 불만을 표출했을 뿐이었다.
-나랑 말 섞는 게 싫어? 나 나름 호감형일 텐데.
“………”
-요즘 세상에는 나 같은 얼굴은 경쟁력이 떨어지나?
어쩐지 표정 관리가 점점 되지 않아서 이재는 땅바닥에 낙서를 하다 말고 나뭇가지를 우지끈 끊었다.
귀신들은 어찜 저렇게 하나같이 수다스러운 걸까.
물론 강이재는 그 이유도 안다. 귀신들은 원래 인간들한테 관심 이 많고 말을 붙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부러워하고 시샘한다. 그건 단지,인간은 살아 있지만 저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 보다 보니까 무서운 것 이상으로 짜증스러웠던 이재는 그냥 시비를 텄다. 그녀는 혼잣말 을 하듯 중얼거렸다.
“경쟁력이 있으면 자기가 뭐, 어쩔 거야. 여자 귀신이라도 꼬실 건가?”
그러자 소년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재는 완전히 포기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녀들과 기사들은 왕후의 조용한 휴 식을 위하여 몇십 보 떨어진 곳 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재는 둥둥 떠 있는 소년 얼굴의 귀신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제발 저한테 말 좀 그만 시킬 수 없어요?”
-나 나쁜 귀신 아니야.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래.
그러자 이재는 정말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윤택한 사후 생활 에 관심이 있다지만, 귀접 같은 건 거절한다.
할 거면 그래도 법적 배우자랑 할 거야.
-아니,야,너무 갔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고. 물론 그쪽도 전혀 안 끌리는 건 아닌데.
이재가 아까보다 더욱 혐오감을 표출하자 소년귀는 당황한 둣 손 사래를 쳤다.
-그냥 너라는 인간한테 관심이 있다고. 나 원령 아니고 수호령이야. 아닌 것 같으면 지박령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원귀든 아니든 저는 당신들 때 문에 자꾸 사후 세계랑 엮이게 되잖아요. 저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단 말이에요.”
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재도 알고 있었다. 영안을 갖고 태어난 이상 그녀는 어떻게 해도 남들처럼은 살 수 없었다. 그게 이재의 팔자였다.
문득 궁금한 게 생긴 그녀는 소년귀에게 물었다.
“이 성의 수호령이라면서 저 사람은 왜 안 도와주는 거예요? 저 사람 잘못되면, 카이엔 국운도 흔들리는 거 아닌가요.”
이재가 보고 있는 건 저 멀리서 제이드와 합을 겨루고 있는 로더릭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검을 부딪칠 때마다 탕,탕 신명나게 원령귀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 이 보였다.
이재는 다시 소년귀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받는 게 합당할 만큼 큰 죄를 지은 건가요? 알고 싶어요.”
소년귀는 인간 특유의 완성되지 못한 눈동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천기니까. 너희들이 알아내야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재는 기대도 안 했다는 둣 다시 흙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속으로 툴툴댔다.
역시 귀신이랑 말 섞어 봐야 나만 손해야. 순 지들 마음대로 지.
이재가 반토막 남은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다시 귀신을 격퇴하는 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팔패도 그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 었다.
그걸 유쾌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소년귀는 물었다.
-그런데 내 얼굴이 그렇게 별로야? 나 정도면 귀신이라도 괜찮지 않아?
“별로예요. 그리고 저는 저보다 어린 남자한테는 안 끌려요. 제가 자란 환경이 좀 그래서 애늙은이 같거든요.”
-나 나이 많아. 오백 살도 넘었어.
“죽은 사람 나이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아요!”
이재는 울컥했다.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번 생도 지난 생 못지않게 망해 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던 그녀 는 갑자기 손바닥을 폈다.
그리고 헤일리의 손금을 봤다.
“……얘는 관상도 그렇더니 손금도 별로네.”
왕은 다 가졌던데 어찜 이렇게 사람 타고난 팔자가 불공평하니.
이재는 상처받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나뭇가지로 이번에는 아무 의미없는 선을 긋고있을 때,소년귀의 음성이 들렸다.
-강이재.
그녀는 멈칫했다.
그가 알려 주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가 뚜렷하고 인간보다 삼라 만상의 이치에 더 깊이 닿아 있는 존재.
역시 평범한 귀신은 아니었다.
이재가 다소 긴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을 때,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헤일리도 이미 한 번 죽은 거잖아. 아니야?
“………”
-그런데 넌 뭘 자꾸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싱그럽게 웃고 있는 소년을 바라 보기만 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질문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어깨를 으쏙하며 앞을 가리켰다.
-앞에 봐. 로더릭이 오고 있어.
“………”
-뭔가 되게 신경 쓰이는 얼굴이네.
이재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로더릭은 찌푸린 낯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대련을 멈추자,주변만을 맴돌던 원령들은 기회를 잡고 싶은 듯했다. 헐레벌떡 쫓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일리 던컨.”
이재는 그의 목소리에 얼핏 웃으려고 했다.
소년귀의 말마따나 뭔가 조금 거슬린 게 있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못했다.
이재가 로더릭 근처에 있을 때 에도 어지간한 잡귀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로더릭을 쫓아오던 원령들은 감히 더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다시금 멀어지고 있었다.
이재는 힐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 그의 주변이 그렇게 말끔했던 것은 결국 이 소년귀가 홀을 지키고 있어서였나?
세긴 세네. 그럼 좀 몸 사리지 말고 성심껏 도와주지.
물론 몸을 사리고 있는 건 이재도 피차일반이었다.
하지만 절대 뚫릴 것 같지 않은 강력한 성능의 방패를 발견한 그녀는 홈,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