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20)
마음이 이끄는 대로-20화(20/134)
#5장. 너를 너무 그리워해
#20.
로더릭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 씩 이재를 방문하곤 했다. 여전히 던컨 공작의 흉을 보고,가끔은 의심스러운 눈을 하기도 했다.
이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본인의 직감을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 어둠이 가리고 있었 을 뿐,그는 사실은 명석하고 예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재가 그의 불신을 느끼고 거리를 두려고 하면,그는 의심하던 것도 잊고 몹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더릭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이드는 심란한 기분이었다.
감아 오랬더니 저쪽으로 완전히 말려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은 겨우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종종 이재의 침대를 차지하고서 낮잠까지 자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도 낮에 한 차례 다녀간 바 있는 그는 저녁 무렵 다시 한 번 이재의 처소를 찾아와 있었다.
“나는 헤일리 던컨이 유행에 꽤 관심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로더릭은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거였다.
그는 이재가 깎고 있는 팔찌를 바라보다 가 이번에는 제이드 쪽을 바라보 았다.
보고서의 신빙성에 대해 묻는 것이다.
현시대가 품을 수 없는 감각이 라는 왕의 감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제이드는 시선을 회피했다.
“이건 예뻐서 하는 게 아니라니 까요.”
“그래,정신 집중.”
“수양,수양.”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덧붙인 이재는 울퉁불퉁한 나무 알 하나를 마지막으로 다듬었다.
그녀는 사실 염주 팔찌를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팔찌가 그을다 못해 금이 가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로더릭 주변을 쫓아다니는 원귀 들을 보는 족족 쳐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오백 년 묵은 소년귀를 방패로 요긴하게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귀신은 귀신이었다.
이재의 검은 속셈을 알았는지 로더릭과 함께 있을 때는 코빼기 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원귀를 잠시 쫓는 걸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건 성불과 퇴마였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심하게 벗어난 일이라는 것 또한 인지하 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제 나무 알에 차례로 뭔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축,멀,참,파,온갖 살벌한 한 자들을 파자하여 새기는 그녀는 평소와 다른 눈이었다. 집중하는 날카로운 눈에서는 번뜩이는 안 광이 비쳤다.
그리고 로더릭은 이재의 얼굴과 그 낙서 같은 문양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고 싶 긴 했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이재가 지금 평상시보다 훨씬 집중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본인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 물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조각을 마친 이재가 완성품을 금이 간 궤에 보관하자 로더릭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왕의 시종들은 갈 준비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나가는 줄 알았던 왕이 그대로 왕후의 침대에 누웠기 때문이다.
밤이라고 하기에는 뭐했지만, 그래도 밤이 가까워 오는 시각이 었다.
시종들이 머뭇머뭇하자 데보라 는 시종장을 또 죽일 둣이 노려 보았다.
너희 애들 뭐 해?! 제발 눈치 챙겨.
왕후궁 시녀들은 이미 죄 빠져 나간 후였다.
남은 시종들마저 모두 빠져나가자 방 안에는 로더릭과 이재뿐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로더릭을 이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더릭이 자신의 침대를 자꾸 뺏어 쓰는 이유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곳이 안전한 곳이자,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한두 시간의 낮잠으로 끝날 시각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의 의도를 추측해 보고 있었다.
이제 밤잠도 여기서 잘 건가? 같이 자자는 건가? 그걸 하자는 뜻인가?
아직 부부답지 못한 부부는 이런 부분에 있어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그리고 이재가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기 때문일까. 왕은 말없이 일어났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이재를 일으켜 세워서 그대로 침대에 쭉 끌어다 앉혔다.
“침대에서 편하게 자.”
나가려나 싶었던 그는 조금 떨어져 있는 소파에 가서 길게 누웠다.
이불을 만지작만지작하던 그녀는 조금 고민했다.
당신도 당신 침대에 가서 편하게 자라고 쫓아낼 수 없는 아이러니가 그녀에게는 항상 있었다.
장승 친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겠지만 그곳은 흉가니까.
“폐하.”
“……왜.”
“불렀으면 말을 해.”
“침대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여기 와서 같이 누워요.”
그는 바로 일어났다. 꼭 그 말 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그런데 침대로 걸어오는 그의
눈은 딱히 졸려서 잠을 청하려는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재는 물론이고 로더릭 자신도 잘 깨닫지 못했다.
이재가 창가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자 로더릭은 그녀가 내어 준 자리로 올라왔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본 게 벌써 세 번째였지만 이재는 아직도 조금 어색해했다.
턱을 관 그는 그런 이재를 보 고 있다가 툭,내뱉었다.
“네가 왕을 소파에 재우는 간 큰 인간인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큰 불충인 줄 알아?”
“여긴 제 방인데요. 그리고 제 침대인데요. ……가끔 이상한 소리 해.”
“그 정도로 매정한 아내는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란 뜻이야.”
장인은 마음에 안 드는데,너는 갈수록 마음에 드는 것 같단 말 이야.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왜 가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을까? 네가 숨기고 있는 건 대체 뭘까.
로더릭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잘 준비를 시작한 이재를 계속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금 더 짓궂게 말했다.
“너, 나랑 한 침대에서 자기 시 작하면 뭐 해야 되는지 알아?”
“우리 한번 할 때도 되지 않았 나?”
하지만 움찔하던 이재의 동공이
여기저기를 방황하자 그는 금세 덧붙였다.
“헤일리. 농담이었어. 아니,솔직히 농담은 아니었는데 네가 거절을 어려워할 필요는 없어.”
그러자 이재의 표정은 더욱 복 잡해졌다.
그녀도 해 보고 싶었다.
사실 꼭 해 보고 죽어야 할 만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도 선뜻 긍정의 신호가
나오지 않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 껴졌기 때문이다.
페하는 제가 결혼까지 해 놓고 왜 이렇게 모자라게 구는지 혹시 아세요?
전 귀신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제 마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바보 천치였나 봐요.
한편 더욱 복잡해진 이재의 표정을 보고 로더릭은 피식 웃었다.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 구나,싶었기 때문이다.
왕후는 강에 투신할 정도로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남편이라 해도 바로 몸을 섞는 데는 거부감이 있겠지,하는 정서적 이해도 있었다.
물론 미묘하게 잘못된 이해였다.
그는 곤란해하는 이재를 위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려 주었다.
“손수건 정말 나한테 줄 건가?”
“……사냥 진짜로 가시게요?”
“네 아버지 그 빈정대는 꼴을 지켜볼 인내심이 없다.”
그것도 진심이었지만,사실 왕 과 귀족이 모여 여는 사냥 대회는 왕실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 한 목적이 컸다.
작년이야 국혼이 어그러졌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올해는 그것도 아니었다. 로더릭은 이미 사냥 대회를 개최할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어 줘야 하는 게 정치였다.
로더릭은 고작 사냥 대회 때문에 뭔가를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손수건 드린다는 말이 거짓말 같으셨어요?”
“글쎄.”
로더릭은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홀렸다.
이재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득 로렌스가 참가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 손수건 같은 거 받아서 어디다 쓰시게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걸.”
그건 아마 행운과 안전을 기원 하는 카이엔의 풍습일 것이다.
하지만 이재 생각에 로더릭한테 필 요한 건 손수건 같은 게 아니라 부적이었다.
그녀의 말에서 부정적인 뉘앙스 를 읽었는지 로더릭은 살짝 인상을 썼다.
“주기 싫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좀 덜 미안한가 보지? 그리고 이런 말은 좀 치사하지만,먼저 준다고 한 건 너였잖아.”
“저도 이 말은 좀 치사한 것 같지만, 사실 제일 처음 말을 꺼내신 건 폐하셨는데요.”
그러자 그는 반듯하게 누우며 팔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넌 콩알만 한 게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진다.”
이재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홀렸다.
자신이 그리 크지 않은 것도 맞긴 했다. 헤일리의 키는 백육십이 될까 말까 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더릭은 백구십에 육박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깨가 넓고 타고난 골격이 좋아서 본인 신장보다도 커 보였다.
역시 왕위 계승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장수가 되었을 골상이 었다.
“제가 작은 게 아니라 폐하가 크신 거예요.”
“알았으니까 그만 자. 참고로 상처뿐인 대화였다.”
미안한 것보다는 일단 웃겨서 이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상황에 웃는 얼굴을 보이면 그가 황당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이재는 말했다.
“폐하.”
“왜.”
“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저 너무…… 의심하지 마세요.”
“………….”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은 좋은 꿈 꿔요.”
로더릭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왕후가 방금 이중적인 의미로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말라고.
희한하게 나이나 사교계 경험에 비해 눈치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공작가에서 재한테 심하게 눈칫
밥을 먹였나. 남의 온도를 계속 가늠해 보고 금방 알아첸다.
그런데 사실 로더릭은 그런 점까지 조금씩 마음에 들고 있었다.
이러다 나중에는 던컨인 것도 마 음에 들까 봐 그도 어이가 없었다.
한숨을 쉬듯 웃은 그는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잘 자라.”
평온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