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22)
마음이 이끄는 대로-22화(22/134)
#22.
소년귀가 사라진 뒤 이재는 억울하게 당한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얼굴을 감싸쥐고 분을 삼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재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로더 릭이 었다.
“헤일리. 너,울어?”
그는 저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이미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왕후가 호숫가 근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실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뺨 이나 눈가가 붉긴 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로더릭은 장소와 정황상 그녀가 울었다고 결론지었다.
“신경 쓰여서 나와 봤더니만 더 신경 쓰이게 하네.”
그가 자신의 옆에 앉으며 짜증을 내자 이재는 물었다.
“폐하도 제가 신경 쓰이세요?”
“그럼 안 쓰이겠나?”
로더릭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헤일리는 한 번 강물에 몸을 던졌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매일같이 호숫가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누구라도 마음이 쓰일 것이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로더릭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그리고 이재에 게 건넸다.
“자, 흙장난하고 놀아.”
이재는 그걸 건네받고 조금 웃었다.
“제가 많이 애 같아요? 저도 어른인데요. 성인식도 한참 예전에 지났어요.”
“내가 지금 네가 애 같아서 그러겠어? 그만 울고 좋아하는 거 하고 놀라는 거잖아.”
“나 운 적 없는데?”
“……아니야?”
“네.”
“……아니라고?”
“네.”
그는 정말 돌아 버리겠다는 얼 굴로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들어가자고.”
이재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일어난 뒤에는 또 조심스 럽게 손을 떼어 냈다.
이재를 침실까지 데려다 놓은 왕은 턱을 관 채 한참 동안 그녀 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왕의 표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그녀는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침대에 누워 버리자,시종들과 시녀들은 이번에는 경쟁이라도 하둣 방을 빠져나갔다.
왕의 시종들은 결연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들이 이기고 말겠다.
그래도 데보라가 이끄는 시녀들이 훨씬 빨랐다.
데보라는 역시 기 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는 백전노장이었고,그 밑에서 다져진 시녀들은 누구보다 능숙했다.
이재는 로더릭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벌써 주무시게요?”
“왜. 이젠 나랑은 같이 눕지도 못하겠나? 나 또 소파로 가?”
왜 이렇게 공격적이지?
그녀는 옆에 따라 누우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말 했다.
“저 잘못한 거 없는데……. 화내시는 거면 저도 화낼 거예요.”
로더릭은 픽 웃었다.
“야. 네가 제대로 화낼 줄은 알 아?”
“왜 못 낸다고 생각하세요? 저 엄청 으아아,으아아아 하는 사람 인데?”
로더릭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서 입가를 문지르다가 말했다.
“그건 뭐야.”
어? 웃네? 싶었던 이재는 주먹을 쥐고 막 고개를 내밀었다.
“내 안에도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존재한다고. 으아, 으아아.”
어린 짐승이 최대한 사나운 표정을 흉내 내는 것을 본 로더릭은 얼굴을 가리고 몸을 들썩였다.
그런데 로더릭은 정말로 왕후가 그다지 화는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따박따박 말을 하다가도 그녀는 입을 다물고 한 걸음씩 물러선다.
바로 멀어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그렇지만 이상하게 외롭고 서러 워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저건 아비란 놈이 손찌검하고 윽박지르면서 키워서 저러는 건 가?
로더릭은 원래도 던컨 공작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자기 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헤일리. 팔베개해 줘?”
누군가 국왕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더라면 또 개수작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들은 부부였고,이곳은 침실이었다.
이재가 머뭇거리다가 손목 쪽에 머리를 뉘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사람을 경계하는 얄미운 고양이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 누우면 피 안 통해. 이런 것도 안 해 봤어?”
그러자 이재는 조금 더 안쪽으 로 꾸물꾸물 몸을 옮겼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하면서도 긴가민 가하는 표정이었다.
로더릭은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하,웃었다.
힐끔거리면서 계속 그의 눈치를 보던 이재가 물었다.
“이젠 제 베개가 되어 주시는 거예요?”
“어. 사실 난 이불도 되어 줄수 있다.”
또 추행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 를 할 줄 알았는데,이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솔직히 그 이불은 너무 무거웠어요.”
“뭐 이렇게 까다로워?”
던컨 어쩌고 하려던 로더릭은 이번만큼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 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올 물었다.
“헤일리. 뭐가 문젠데.”
바로 네가 문제예요.
오늘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에 안은 이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맨날 거기 나가서 죽을상을 하고 있냐고.”
“폐하,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헤일리와 제가 일찍 죽을 관상 을 갖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시면 저도 상처받아요.
허튼 생각을 하던 이재는 물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주시게요?”
“그래.”
“정말? 왜?”
“신경 쓰여서?”
당신도 이 결혼,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잖아요.
나도 어쩔 수 없었지만,사실은 당신도 필요해서 한 거잖아요.
로더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도 이재처럼 잠시 고민에 빠졌다.
“헤일리. 남들이 뒤에서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는 나도 잘 알아.”
폭군. 광인. 이중인격자.
“그래도 나는 아내를 학대하고 싶지는 않아.”
“………….”
“믿을 수 없겠지만,나는 그런행동이 정말로 즐겁지 않다.”
로더릭은 꼭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재는 바로 대답했다.
“……알아요.”
그러자 로더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재를 바라보았다.
그래 서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 시 한번 말해 주었다.
“안다고요. 저는 폐하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거 잘 알아요.”
사실은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게 잘 보여서 로더릭에게 마음이 쓰이는 거였다.
무속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시야가 있다.
그리고 영산할매가 이재에게 했던 말이 있다.
‘할매, 저 사람 왜 안 도와줘?’
‘난년. ……혹시 너도 보이더냐?’
‘응……. 저 사람 저렇게 가면 죽는 거잖아.’
‘이재야. 인간이 알고 죽는 게 행복할 거 같으냐,모르고 죽는 게 행복할 거 같으냐. 저런 것도 보이니까 설마 네가 이젠 신이라도 된 것 같으냐?’
능력 밖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복 채가 갈수록 커져 가는 느낌이다.
이재는 그가 자신에게 자꾸만 뭘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온기.
이재의 지난 생은 그걸 간절히 바라고,구걸하는 순간의 연속이 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창피해서 그의 팔에 잠시 얼굴을 숨겼다가 힐끔 고개를 들고 물었다.
“폐하는 그럼 혹시 아내 아닌 사람한테는 막 대하나요?”
알입고 고약한 농담에 그는 코 웃음을 쳤다.
“아니, 아내 외의 여자한테는 딱히 잘해 줄 필요도 못 느낀다는 뜻이다.”
“와. 건실한 남편이었네요.”
“알면 잘해라.”
“아니야,그런 말은 재수 없어.”
“얘 또 콩알만 한 게 난리 났네.”
둘은 그 뒤로도 킬킬거리며 한 참 동안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왕후가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끝까지 받아 주려던 로더릭은 드물게도 그녀의 얼굴에서 졸음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을 확인했다.
한쪽은 매일같이 원기를 회복하 고, 한쪽은 그 사람 때문에 매일 같이 원기를 소진하고 있는 결과 였다.
왕은 슬쩍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 주었다.
“그만 팩짹거리고 자. 너 눈 감긴다.”
“네,참새는 아니지만 그만 짹짹거릴게요.”
“………….”
“폐하.”
“……왜 또. 자라니까.”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도 좋은 꿈 꿔야 해요.”
“……재 자꾸 이상하게 사람 미 치게 하네.”
로더릭은 눈을 가리고 웃었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떴을 때,둘 은 또 어김없이 얽혀 있었다.
로더릭은 자신이 왕후의 허리를 구명줄 부여잡듯 동여매고 있는 것에 혀를 찼다.
어제는 아예 시작부터 붙어서 잤으니 크게 난감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거머리 같을 정도로 붙어 있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로더릭은 이재의 작은 몸을 짓 누르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든 얼 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헤일리. 너는 진짜 뭘까.”
인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직감을 낚아철 수 없다.
그러나 그 직감이 반복되면 누구든 잡아서 구체화시키고 싶어 하는 법이다.
왕실에서 왕후를 맞이하기 전, 조사한 보고서의 분량은 마혼 장이 넘었다. 그녀가 던컨이었기 때 문에 기존의 약혼자들보다 훨씬 많은 분량이었다.
로더릭은 최근 서랍 깊숙한 곳 에 넣어 두었던 보고서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정독했다.
왕은 제이드를 불러 그간 거슬렸던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최근 원귀와 멀어진 뒤,예리함이 드러난 결과로 이건 어쩌면 강이재가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
‘왕후 취미가 조각이라잖나. 나 한테 준 선물들 다 봤지? 갠 요즘 아침에 명상도 한다더라.’
‘여기 유행에 관심이 많다고 써 있잖아. 너희도 그 팔찌는 다 봤잖아?’
‘……예.’
‘혹시 왕후가 남들 몰래 원시 미술을 공부한 건가?’
왕의 표정은 엄청 짜증스러웠다.
‘음식도 거의 무슨 풀 쪼가리만 먹던데. 던컨가는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냐. 안 그래도 새 모이만큼 먹는데, 입맛마저 완전 노인 이더라고.’
로더릭은 단 음식과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구절을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거 먹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이재는 간이 조금만 센 음식을 먹어도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몹시 버렸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제이드. 이 보고서 초안은 대체 누가 작성한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들어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나도 정도껏이어야 눈감아 주지,일을 어떻게 이딴 식으 로 할 수가 있나. 왜 너희들은 아무도 내가 참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제이드는 그제야 왕이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면밀하게 왕후를 관찰해 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건 예리함의 결과이기 도 했지만,관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더 말해야 하나? 이건 잘못된 보고서다.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서 올려. 기한은 사냥 대회 후까지.’
의심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커져 간다.
그런데 그는 이상한 끌림 또한 참기가 힘들었다.
왕은 혀를 차며 곤히 잠든 이재의 살구색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거짓말을 할 거면 계속 거짓말 만 하든가. 너는 가끔…… 표가 너무 많이 난다.”
로더릭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 지작거 리다가 고민스러워했다.
그의 투철한 이성은 손을 떼라 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그녀의 뺨과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