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23)
마음이 이끄는 대로-23화(23/134)
#23.
로더릭 모르게 궁리하던 이재는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 냈다.
딱히 의논할 사람이 없어 그녀는 함의 정령에게 물었다.
“손수건 귀퉁이에 수를 놓는 거야. 부적 대용인 거지. 이거 어떻 게 생각해? 효과가 있을까?”
-이재. 이재는 은둔해 있는 고수야?
“아니,난 은둔해 있는 고수의 부엌데기였어.”
하지만 궂은일을 하면서 영재 교육도 함께 받은 이재의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 영산할매는 사실 충남 산 골에서 그렇게 썩을 만한 인물은 아니셨어.
방송에 한 번쯤은 나오시고 더 큰돈 버셨어야 했는데. 성격이 워 낙 괴팍하셔서 영업을 될 수가 없었지.
이재는 야심차게 손수건에 온갖 포악한 한자를 파자하여 수를 놓았다.
그리고 몸에 지녔던 부적을 다 내려놓고 손수건을 들고 나간 그녀는 실망했다. 효과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그게 효과가 있었으면 아마도 돈은 무속인보다 찍어 낸 공장에 서 더 많이 쓸어 담았을 것이다.
원래 필체에는 힘이 있다. 글씨 도 아무 색으로나 쓸 수 없다.
무 녀들 중에 괜히 손가락을 깨물거 나 짐승 피를 쓰는 사람들이 있 는 게 아니었다.
이재는 실망했지만,그래도 열심히 수를 놓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던컨가 여식인 왕후의 바느질 솜씨가 출중한 것에 조금 놀랐다.
어지간한 시녀들이나 하녀들보다도 잘했던 것이다.
그녀는 질 좋은 천과 실을 가 지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놀았다.
그러나 왕은 이 상황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너,마음이 알뜰한 줄 알았는데, 아주 넉넉하셨네. 나 착각이었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굴 주려고 이렇게 여러 장을 만드냐고.”
그냥 다 당신 거라고 대답해주면 되는데,왜 이렇게 사람이 얌체 같아지는지 모르겠다.
이재는 로더릭이 자신을 한 번 씩 툭툭 건드리는 게 좋았다.
가끔은 그게 재미있었고,그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쓰던 손수건을 달라고 한 거지 수를 놓아 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재는 피식 웃었다. 그녀도 안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었다.
“아무튼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좀 자.”
“네?”
“나 빼고 만백성한테 하사해도 뭐라고는 안 할 테니까 좀 쉬면 서 하라고.”
“네 얼굴이 요즘 많이 안 좋아 서 그래.”
왕의 말이 옳았다.
이재는 손수건이 한 장씩 완성 될 때마다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녀가 평소 부적을 쓸 때보다 훨씬 많은 기원과 기력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마음을 쏟으면 효 과가 좀 좋아지지 않을까. 세상이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이재는 결국 앓아누웠다.
왕후가 접견 요청을 모두 거절하자 그녀의 와병설은 금세 퍼졌다.
던컨을 필두로 한 귀족들의 반발에 로더릭은 이를 갈아야만 했다.
이재의 방에 찾아온 그는 다소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나한테 항의를 하는 게 분명해.”
“……그런 의도는 없어요.”
“내가 다시는 너한테 손수건 달라고 하나 보자.”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로더릭은 한숨을 쉬었다.
“……많이 아파?”
“아니요,정말 괜찮아요.”
“너 왕실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됐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자주 아파?”
그걸 잘 계산해 보면 당신이 몇 번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건데요.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던 이재는 피식 웃었다.
오른 뺨을 베개에 비비던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계속 의례적인 답변만 들은 왕은 살짝 울컥한 것 같았다.
그는 모로 누운 이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눌러 바로 눕혔다.
“너도 어디가 아프다 정도는 편 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도 걱정이 돼서 이러고 있는 건데 너는 태도가 어떻게 그래? 내가 잘못됐나?”
이재는 옴찔했다.
그가 정말 화가 난 것 같아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왕은 또 이마를 꾹 눌렀다.
“……걱정해 주시는 거 알아요. 감사합니다. 그냥 피곤해서 쉬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다면 다시 한번 사죄 드릴게요.”
왕후가 또 거리감을 천 미터 정도로 가진 태도로 말하자 로더릭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말 좀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네가 이 결혼이 싫었던 건 이해 하지만,난 너한테 나쁘게 굴 생 각은 없어.”
“……네,폐하. 그리고 저는 이 결혼이 딱히 싫지는 않았어요.”
물론 그녀는 당황스럽고,굴곡 이 많은 팔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결혼이 그녀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우리의 운명은 늘 그런 식으로 들이닥치고,이재는 늘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딱히 믿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로더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중간에 껴서 입장은 난처 하겠지만 조금만 적응해 봐. 아무리 그래도 남편인데 나 좀 적당히 싫어하고.”
“……저 폐하 안 싫어하는데요.”
로더릭은 오히려 그 말을 더 믿는 눈치였다.
그 말에는 재미있 다는 둣 웃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내 이름 알긴 해?”
“폐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카이엔에 있긴 한가요?”
로더릭 페루스 블레어크.
군림, 맹수,온갖 위엄 있는 단 어를 다 사용한 이름이었는데 이재는 솔직히 좋은 이름은 아니라 고 생각했다.
사람 이름에는 써서는 안 되는 글자들이 있다.
사용한 이름자가 너무 강하면 사람은 그 이름에 짓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가끔 하 찮은 단어들을 자식의 이름으로 부여하곤 했다.
그것은 사실은 애착이다.
너무 많은 기대감과 관심은 사 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도 저런 대운을 타고난 사람 이 아니었다면,그의 이름에 짓눌 려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살 았을 것이다.
“사석에서는 로더릭이나 로드라고 불러도 된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그냥 예를 갖춰서 페하라고 부를래요.”
“뭐야, 왜 또.”
“우리에겐 그래도 적당한 거리 감이 필요해요.”
그녀도 매일같이 이렇게 골골대 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더릭 뒤를 따라다니는 원귀들을 보면 자꾸만 쳐내고 싶은 것도 참을 수 없었다.
바퀴벌레가 눈에 안 보였으면 모를까,눈에 한번 보였으면 불을 끄고 잠을 잘 수가 없는 것과 비 숫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 정황을 모르는 로더릭은 그 말을 듣고 살짝 울컥한 것 같았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이렇게 긁을 수 있는 건 무슨 던컨가에 내려오는 비기인가?”
미안한 것보다는 웃겨서 이재는 얼굴을 감싸고 웃었다.
왕은 허물어진 얼굴을 가리는 그녀를 보고,자신이 정말 작은 던컨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밀어낼 때마다 몹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왕후가 웃는 것은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재의 팔을 쿡 찔렀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너 여우 지. 숲에서 네 머리카락하고 색이 똑같은 여우를 본 것 같다.”
왕도 자신이 계속 끌려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는 남들과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황당하다는 둣 반응했다.
“무슨 여우예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난 약 올라서 한 말인데. 이게 설마 칭찬처럼 들렸나?”
여우 귀신이 얼마나 높은 확률 로 남자를 꾀어내는 줄 알면 제 반응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들은 거의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건 귀신 사회에서도 엄청나게 높은 타율입니다.
왕은 결국 어디가 어떻게 아픈 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답변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쯤 하기로 했다.
웃는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하 다 보니 마음이 누그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얼른 자라. 일찍 자야 키 크지.”
“저도 어른이라 이제는 키 안 커요. 그리고 제가 작은 게 아니라니까요.”
“정말 키 크라고 그러겠냐. 쉬 고 빨리 나으라는 거지. 나 간다.”
로더릭이 나가고 난 뒤 이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웃었다.
툴툴댈 건 다 툴툴대면서도 내심은 걱정하고 있는 그의 이중적인 태도가 웃겼다.
단지 몸 안에 흐르는 기를 소 진한 것뿐이라 이재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왕실과 귀족들이 매년 주최해 온 사냥 대회 날도 밝았다.
확실히 왕의 개인적인 사냥 일 정보다는 훨씬 대규모의 인원이 사냥터 초입에 대기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끝마친 왕이 이재를 바라보자, 그녀는 천천히 다가갔다.
헤일리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고, 이재는 몸가짐이 굉장히 조심 스러운 사람이었다. 걸음 하나하나에도 악운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늘 자세를 바르게 하고,몸을 정결히 한다.
하지만 그 신중한 보폭을 바라 보고 있던 로더릭은 픽,웃었다.
“너도 짧아서 세상 살기 힘들겠다”
“왜 또 시비 거세요?”
“너 으아아 하는 그거 한번 들어 볼라고 그런다.”
하지만 웃음을 홀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로더릭이 얼굴을 찌푸리자 이재는 이상한 둣 물었다.
“뭐가요?”
“네가 오니까 공기가 또 다른 것 같아서.”
“착각인 줄 알았는데,이상하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재는 당황해서 안색을 굳혔지만, 사람들은 다른 이유로 표정 관리가 힘들어졌다.
국왕이 또 수작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산소같이 청량한 여자다,뭐 이 런 소리를 하고 싶으셨던 건가?
“뭐,그냥 해 본 소리다. 나쁜 뜻은 아니었어. 신경 쓰지 마라.”
힐끔 눈치를 본 이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품 안을 뒤적거렸다.
그녀가 품 안에서 준비해 온 손수건을 꺼내자, 왕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녀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왕후는 정말 출신에 어울리지 않게 바느질을 잘했다.
다만 그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또 괴작이라는 것에 문제 가 있었다.
그들은 왕후가 저 섬세한 바느질 솜씨를 왜 저렇게 사용해야만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수건이 어쩐지 위험해 보일 수 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재는 세 장의 손수건 중 하나를 로더릭의 말고삐에 묶었다.
악령을 퇴치하는 기원이었다.
나머지 두 장은 승리를 기원하 는 주문,업보를 멸하는 주문.
그녀가 다른 손수건들을 반둣이 접어서 정리하자, 로더릭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이재는 그것을 로더릭에게 내밀었다.
“이건 여분이에요. 그래도 대회 기간 동안에는 품에 갖고 다니시면 좋겠어요.”
“……다 내 거였어?”
“그럼 누굴 주겠어요. 남편이 여기 있는데.”
이 여우 같은 게 그걸 왜 이제 말해?
“……뭐 하러 세 장이나 준비했어.”
“그냥 삼 년 치를 미리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품질의 부족함을 물량으로 만회 하려는 속세의 때가 탄 전략이었다.
또한 그녀는 파자하고 싶은 한 자가 많았으며, 팔자가 사나운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더릭은 손수건 하단에 새겨진 그 이상한 문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이번에 도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솜 씨가 워낙 정교해서 정성이 들어 가 있다는 건 그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시키지 이걸 왜 네가 직접 다 했어. 손가락도 쪼끄만 게.”
“낭만이 없으시네요. 원래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좀 고생스럽더 라도 직접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재는 말하는 순간 뭔 가를 깨달았다.
기원하고 있는 건 자신이니,자 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고마워. 소중하게 잘 갖 고 다닐게. 잘 쓸게.”
이재는 빙긋 웃었다.
보람을 느끼면 안 되는데 역시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남 위에 군 림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고, 말도 툭툭 내뱉을 때가 있다.
가끔은 위압감을 줄 정도로 체 격이 좋은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의 눈에도 언제부턴 가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게 조금 귀엽 게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