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29)
마음이 이끄는 대로-29화(29/134)
#29.
밤은 원귀들이 우리에게 침투하기 좋은 시간이다.
로더릭과 함께 잠들었던 이재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녀만 감지할 수 있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남루한 행색의 술귀신이 들여보내 달라 고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재는 저 영가를 벌써 세 번 이나 본 적이 있다.
내가 어쩌다가 귀신과도 낯이 익은 사이가 된 걸까.
이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왕의 품 안에 파묻혀 있던 그 녀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감은 손을 떼어냈다. 그렇지만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발목 정도만 얽고 잠들었던 그 가 어느새 그녀의 몸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니까…… 다리는 올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재는 로더릭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 수면초의 탈주를 막으려는 왕의 본능도 무서웠다.
“아윽!”
커다란 손이 허리를 척,감아오자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졌다.
품 안으로 끌어당기는 팔은 부드럽지만은 않아서 숨이 막혔다.
게다가 어설프게 잠이 깨려는 지, 그는 이재를 품에 가둔 채 몸을 치대기 시작했다.
“놔주세요. 제발요……. 다시 올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이재는 그가 완전히 깨버릴까 봐,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
끊어질 것같은 음성으로 호소하던 그녀는 곧 몸을 바들바들 떨기시작했다.
“하윽……. 거기다 대고, 숨, 쉬 지 말라고.”
이재는 얼굴을 시트에 파묻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목덜미에 그 의 입술과 더운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귀 끝이 빨개진 채,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뺨을 시트에 비비며 이 곤혹스러운 감각을 견뎠다.
“아,알았어요. 제발 진정 좀 해.”
결국 이재는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억센 팔뚝을 살살 어루만졌다.
자기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검 은 맹수를 진정시키려는 부드러 운 손길이었다.
몸을 뒤척이던 로더릭이 다시 완전한 잠에 빠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한껏 몸을 옹크리고 있던 이재는 눈치를 보다가 그의 손을 슬 그머니 거둬 냈다. 기회는 한 번 뿐이었다. 그녀는 잽싸게 몸을 반대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이재는 자평했다.
“……아주 신속하고 영리한 탈출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기분인지는 모를 일이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창 가로 다가갔다.
술귀신은 얼핏 보기에는 가장 볼품이 없고 힘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끈질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큰 힘을 얻는다.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어떻게 해도 떼어 낼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국왕이 이 상황에서 알코올 중독자까지 되어 버리면,그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이재는 창을 열고 염주 팔찌를 들이밀었다.
“그냥 갈래? 아니면 거친 방식을 선호하니?”
“로더릭……. 술을 줘…….”
“헛소리 좀 그만하고 가.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우스워?”
“………”
“나 또 누구랑 얘기하니.”
이재는 침대를 돌아서 불붙은 양초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부적 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자,술 귀신은 창가에서 멀어졌다.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또 저 사람한테 들러붙으면 난 널 멸할 거야.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이재가 눈을 매섭게 뜨자,술귀신은 슬금슬금 도망쳤다.
하지만 초라하게 굽은 둥에는 여전히 짙은 미련이 남아 있어 그녀는 한 숨을 쉬었다.
이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수많은 상념들은 언제부턴가 그 녀를 괴롭힌다.
필요한 것은 성불과 소멸 의식 이었지만, 그녀는 원귀와 기 싸움 을 하는 것만으로도 점점 버거워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매,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까.
나는 신을 둥에 업지 못한 반 쪽짜리잖아.
능력 밖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가끔은 사람이 가여워.
만약에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그 때 나는 어떻게 하지.
할매도 나한테 그런 건 알려 주지 않았잖아.
이런 건 너무 두려워. 외로워.
이재는 결국 가부좌를 풀고 얼 굴을 감싸 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손을 내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로더릭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보내야 할 평안한 밤.
이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급한 거라도 해야 했다.
뱀 귀신을 완전히 멸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한이 지독해지기 때문이다.
이재는 액자 뒤에 숨겨둔 부적을 뗐다. 결계를 여는 것이다.
“……왕후 폐하?”
오밤중에 왕후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경계를 서던 기사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시녀장을 불러을까요?”
“아니,그런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사령이 방 안으로 기어들어 오자마자 이재는 다시 결계를 닫았다.
17대 1의 싸옴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원귀들까지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온화하던 왕후가 문을 너무 광, 닫아 버리자 밖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문을 닫은 이재 본인도 움찔 놀랐다.
뱀 귀신은 무구 팔찌와 부적을 쥔 이재를 보고 놀랐다.
가까이에 서 뱀을 본 이재도 흠칫 놀랐다.
“이건 무슨…… 킹코브라야? 여긴 왜 다 커?”
기세좋게 불러들였지만,크기에서 압도된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했다.
하지만 그사이 사령은 목표물을 찾은 것 같았다.
커다란 구렁이가 왕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가자 이재는 깜짝 놀라서 침대 앞을 막 아섰다.
“안 돼! 건드리지 마. 진짜 가만 안 둬.”
로더릭이 깰까 봐 뒤를 힐끔거린 이재는 다시 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대치 상태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이재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금이 간 궤 안에서 그 상황을 힐끔거리던 함의 정령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갸웃거리며 뱀을 바라보던 정령은 갑자기 뱀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타고 놀았다.
-이재!
-미끄러워!
“너는…… 지금 그게 할 말이니?”
어이가 없어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재는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뱀을 부여잡고 있는 정령의 팔이 희미해진다.
이재는 이 상황이 정확히 무엇 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힘을 쏟고 있다면,그녀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 성큼 다가간 이재는 사령에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네가 무서운 게 아니야. 그냥…… 음, 그냥…… 좀 그런 거야? 사람한테는 트라우마라는 게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는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사령의 머리에 척,부적을 갖다 댔다.
방 안에는 원혼이 타는 냄새가 났다. 이재의 팔도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힘을 쓰는 것보다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타는 둣한 고통에 거칠게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뱀의 형상이었다.
그 광경은 함의 정령도 무서운 것 같았다. 이재가 부적을 갖다 대자마자 자기 집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기 때문이다.
“배신자,저거 저 얌체 같은 거……”
하지만 이재는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다시 매섭게 사령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손끝에 기를 실었다.
“연기전혐. 과거의 응어리를 버리고,사령이여. 이제 그만 인간의 왕에게서 손을 떼라.”
이재가 기를 흘려보내자,사령의 몸은 꼬리부터 사라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한이 응축 된 독니와 눈동자마저 모두 사라 졌을 때,이재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생각하기도 싫었고,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그냥 눈을 감고 열심히 잠을 청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던 국왕은 늦잠을 잤다.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한 그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살구색 여우 한 마리가 가만히 품에 안겨있자,더욱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이상한 사실 한 가지를 알아챘다.
얘는 어제 창가 쪽에서 잔 것 같은데 왜 반대쪽에 있지? 내가 어제 얘를 들쳐 엎었나?
답은 간단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이재는 아무데나 누워서 자 버렸고, 인간 수면초를 찾아 헤매던 로더릭은 돌아누워 기어코 품에 넣었던 것이다.
“일어나셨어요?”
“응. 잘 잤어?”
이재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응. 왜?”
“일어나셨으면 이제 그만 다리 좀 치워 주시겠어요?”
조금 무안했던 로더릭은 슬쩍 다리를 내려놓았다.
말이 안겨 있 는 것이지,사실 갇혀 있는 모양 새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재가 손까지 떼어 내며 꾸물꾸물 떨어지자,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자신이 일어날 때까지 참아주고 있던 느낌이지 않은가.
그는 이재의 허리에 팔을 두르 고 다시 쑥, 끌어왔다.
그녀는 고 개를 돌려 로더릭을 바라보았다. 왜 또 그러냐는 눈이었다.
왕후가 보여 주는 거리감과 온도에 살짝 울컥한 로더릭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 다시 잔다.”
그러자 이재는 피식, 웃었다.
그걸 빤히 보던 로더릭은 어젯 밤처럼 팔베개를 해 주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떨어져야만 했다.
한창때의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 면 오늘의 계획 말고 다른 것을 세운다.
가뜩이나 왕후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는 자중했다. 분명 또 벌레 보듯이 쳐다볼 테니까.
조금 거리를 둔 위치에서 살구색 머리칼을 쓰다듬던 로더릭은 물었다.
“헤일리. 얼굴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쁜 꿈이라도 꾼 건가.”
“……하아. 차라리 꿈이었으면.”
“뭐?”
이재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자,로더릭은 잠시 고민 했다.
“혹시…… 어제 싫었는데,내가 억지로 키스한 건가?”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시무룩했다. 토라진 것 같 기도 하고,안색이 창백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더 심각한 고민에 빠지려 할 때쯤,돌연 이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흠칫하는 로더릭에게 말했다.
“페하. 이런 말씀은 정말 죄송 한데요. 그래도 해도 될까요?”
“……해 봐. 내가 언제 막은 적 있었나.”
“뱀은 되도록 안 죽이시면 안 될까요? 정 급하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게…… 그 정도로 싫었어?”
“누구나 가슴속에 안 좋은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로더릭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왕후가 무척 진지한 것 같아서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이재는 인상을 썼다.
인인성사. 모르시나요?
“폐하,남의 힘을 빌려서 뜻을 이룬다,이런 말 모르세요?”
“난생 처음 듣는데.”
“폐하,우리에겐…… 제이드가 있잖아요?!”
그 사람이 당신 인생의 귀인이 란 말이에요!
제이드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야. 관상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고!
이재가 아침부터 열변을 토하자, 로더릭은 헛웃음을 홀렸다.
그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짐승이 지금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알았다. 충분히 이해했 으니까 너도 그만 으아아거려.”
“예,제 말 들어주셔서 정말이지 감사드려요.”
“어. 그래.”
“폐하는 생각보다는 말이 잘 통 하는 사람이에요.”
“어,그래. 칭찬 고맙네.”
말을 마친 이재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다시 의기소침해져서 눈을 감았다.
황당하게 바라보던 로더릭은 잠시 후,눈가를 가리며 몸을 들썩였다.
저래 놓고 또 명상을 하고 있는 그녀가 너무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