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3)
마음이 이끄는 대로-3화(3/134)
#3.
본식과 연회를 마친 뒤,왕은 연회장 뒤의 게스트 룸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는 독주를 두 잔째 들이킨 상태였다.
빈 잔을 채워 주며 제1기사단장이 물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사람들은 이제 막 왕후가 된 헤일리 던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희 쪽으로 감아오셔야 합니다. 폐하도 그 정도 매력은 있으시잖습니까.”
왕은 어이가 없다는 둣 1기사 단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어리고 순진해도 던컨 가 사람인데 그게 쉬울 리가. 그리고 뭐,딱히 순진한 것 같지도 않아.”
고개를 젓던 그는 술잔을 까딱까딱하며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정말 던컨 공작의 짓일까요.”
친왕파 측은 혼담이 오가던 여자들이 의문사를 당한 뒤, 던컨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공작이 정계에서 궁지에 몰린 뒤,왕의 장인이 되고싶어 한다는 건 꽤 유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후계가 없다는 건 국왕의 정치적 약점이었고, 신부 후보가 둘이나 급사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강력한 외척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헤일리 던컨이 살아서 이 성에 들어온다면 던컨가를 의심할 여지는 많아진다.
그러나 그녀가 죽는다면 범인이 다른 사람일 확률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헤일리를 주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헤일리 던컨은 물에는 빠졌지만,또 살아는 남았다.
누군가의 사주는 아니었지만,어쨌든 왕후가 될 의사는 없었다는뜻이다.
친왕파 측은 이제 그녀를 어떤 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이 술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시종장이 호박색 술을 따르며,조심스럽게 여쭈었다.
“폐하,이제 그만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왕은 같잖다는 둣 픽 웃었다.
“왜. 내가 첫날밤에 신부를 버려두기라도 할 것 같은가?”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왕이란 그런 자리이니까.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는 건 새신랑의 매너같은 게 아니었다.
로더릭 페루스 블레어크.
왕의 신경 쇠약과 불면증은 요 즘따라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항간에는 그에게 광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측근들도 이제는 그 소문을 잠재우거나 부정하는 게 힘들었다.
밤이 깊었고,왕이 도수 높은 술까지 연거푸 들이켜자 사람들의 심려는 깊어졌다. 지켜보던 1 기사단장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희 쪽으로 끌어오는 것까지는 안 되더라도 너무 모질게는 대하지 마십시오. 척을 져 봐야 하등 좋을 게 없습니다.”
“음…”
“한편으론 그분도 가엾지 않습니까?”
기사단장은 국왕과 같은 스승에 게서 검을 사사한 친우였고,대표적인 국왕의 날개였다. 그 역시도 던컨가에 호감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성혼을 한 오늘 하루만이라도 왕의 심사가 좀 편했으면 해서 시작한 말이었을 뿐이다.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달콤한 결혼은 아니겠지만,어찌 됐건 오늘은 남녀의 첫날밤이 아닌가.
하지만 로더릭은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가여워? 그 말이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 직책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군.”
“폐하,아직 어린 아가씨에 불과합니다. 헤일리,아니 왕후 폐하는 폐하와 공작의 체스판에 휘말린 게 아닙니까.”
“그리고 헤일리 던컨은 바로 그 던컨 공작이 쓰는 체스 말이다.”
“그러기엔 다소 연약한 성품이라는 게 사교계 전반의 평가입니다.”
왕도 보고를 받았고,그런 소문 또한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작은 술잔을 테이블에서 까딱까딱 기울이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글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 벌벌 떨면서 시키면 할 말은 다 하던데.”
“……어쨌든 잘 구슬리면 폐하가 잃으실 건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혀를 차던 로더릭은 술잔을 한 쪽으로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 섰다.
“오늘따라 헛바닥이 길구나. 그래 봐야 던컨가 사람이다. 왕후 처소에 사람을 심고,감시를 늦추지 마라.”
“예,폐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간다. 코앞이니 따라오지 말아라”
기사단장이 허리를 숙이며 그들 의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유유히 방을 빠져나가는 왕의 등은 곧았고,그의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기분이 크게 나빠 보이지 도 않았다.
아니,사실은 평소보다 조금 좋은 것도 같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이 결혼이 최악은 아니셨던 건가. 헤일리 던컨은 미인이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단지 후련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혼담이 오갈 때마다 벌어진 불 길한 사고는 그의 광증과 함께 왕실의 치부가 되곤 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스트 룸에 남겨진 사람들은 저마다 안도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외로운 복도를 걸어가는 왕의 등 뒤로는 곧 검은 기운이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왕의 신경은 다시 급속도로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강이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했다.
국왕이 요구한 대로 그녀는 왕관 을 썼다.
하지만 결혼식과 연회가 끝난 뒤에도 시녀들은 분주했다.
본식 못지않게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 었기 때문이다. 첫날밤이었다.
이재를 치장하는 동안 시녀장은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헤일리 던컨은 사교계에 갓 데 뷔한 스물한 살 아가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에는 나름 알려진 인물이었다.
먼 조상이 이민족 출신인 던컨 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미형만을 배출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해맑고 순진무구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를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암암리에 만든 별명이 예쁜 백치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의 헤일리는 침착한 나머지 수심이 있어 보였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독감이 아니라 물가에 뛰어들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진짜였구나.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폐하께서 곧 오시겠지만요.”
“예,알겠어요.”
“송구하오나 왕후 폐하,이제 저희한테는 말씀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무심결에 어른에게 존댓말을 했 던 이재는 뜨끔했다.
그러나 아주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는지,시녀장은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였다.
“노력……해 볼게.”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고 나간 뒤, 깊은 한숨을 쉰 이재는 거울 앞에 섰다.
실제로 그녀는 조금 난감해하는 중이었다.
시녀장이 생각한 것과 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를 강하게 암시하는 이 옷차림이 문제였다.
“이건 입었다고 보는 게 맞는 걸까,벗었다고 보는 게 맞는 걸까?”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 것을 넘어서서 안까지 희미하게 비치는 슬립을 보며,그녀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이재는 스물다섯이었는데,그런 쪽의 경험은 전무했다.
남자를 진득하게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자신을 키워 준 영산할매를 따라 산골짜기와 깡촌을 전전하다 보니,좀처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 살았다 해도 결과는 같았을지 모르니 그것은 단지 명예로운 핑계일 수 있다.
보통 명예로운 죽음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그녀는 관계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의지마저 있었다.
그건 호기심이나 성욕과는 상당히 다른 이유였는데,수많은 원귀의 유형들 중에 처녀 귀신과 총각 귀신의 한은 유독 깊었기 때문이다.
이재는 가끔 궁금했다.
그게 대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길래 솔로는 죽어서까지 불행해야 하는 걸 까.
솔로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다고.
그녀는 윤택한 사후 생활을 위하여 죽기 전에 두어 번 정도는 해 볼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재는 곧 또 한 번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위안이 될 리가 없지.”
원래도 박복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여기 온 뒤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해진 것 같았다.
모든 게 정신없이 꼬이고만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잠시 팔자에 대한 원한이 불쑥 치솟았으나 그녀는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너무 빨리 실패로 돌아갔다.
이재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문 가를 바라봤다.
국왕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는데, 결혼식때까지만 해도 말끔해 보였던 그의 상태는 또 매우 이상해 보였다.
그는 곧 어마어마한 숫자의 원귀를 몰고 안으로 들어왔다.
던컨 가의 저택에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아니,세상에 어쩌다 또……”
당신 대체 뒤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사이에 전쟁터라도 다녀온 건가요.
밤중에 혼자 공동묘지라도 갔다 온 거냐고요!
황망해하던 이재는 눈을 부릅뜨 며,예전처럼 왕의 얼굴만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다.
역시 좋은 관상을 갖고 태어나 긴 했네. 콧대랑 턱에 복이 있어.
몸이 좋은 걸 보니 틀림없이 골상도 좋을 것 같다. 이 나라 왕이니까 당연히 돈은 많겠지.
이런 결혼을 주선하는 아버지라면 한 번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나?
“네가 왕후란 말이지.”
“………”
“공작은 자식 장사를 참 부지런히도 해.”
역시 그런 아버지는 없는 편이 좋겠다.
새파란 눈으로 이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왕은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갔다. 그는 머리가 몹시 아픈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때까지 거울 앞에 멍하게 서 있던 이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문가를 바라봤다. 열린 문 사이로 시녀들의 불안한 표정이 보였다.
강이재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저 문을 열어 놓는 게 좋을까, 사람들의 입단속을 위해 지금이라도 닫는 게 좋을까.
그러나 그녀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파리한 낯빛의 시녀는 슬그머니 문을 닫아버렸다.
“……방금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왕은 검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사람들 눈에도 딱히 제정신처럼은 안 보일 터였다.
심하단 기분이 들어서 이 재는 한참 동안이나 황망하게 문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침대 쪽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아까보다 더 정신이 사나워 보였다.
주춤주춤 침대로 걸어간 그녀는 왕과 세 뼘 정도 떨어진 곳에 어색하게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