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34)
마음이 이끄는 대로-34화(34/134)
#34.
망령의 넋두리를 듣고 있는 것 은 고된 일이다.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성립하는 말이었다. 부정적이고 음울한 이 야기를 듣고 있으면 누구나 기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재는 명상을 할 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하소연이 끝나지 않자,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할매,얘네는 나를 호구로 보나 봐. 근데 내가 호구이긴 하잖아.’
한풀이라는 것은 결국 위로와 설득이다.
무속인들이 굿을 하며 춤을 추거나 술을 따라 주는것은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런 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재는 설득을 하기로 했다.
“동료들이 다친 너를 버리고 갔어? 그래서 억울했던 거야”
-…응
“네 마음은 알겠는데,그걸 저 사람한테 풀면 어떡해. 너도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저 사람 불쌍하지도 않아?”
“이런 식으로 하면 너만 구천을 떠도는 게 아니라,네 가족한테도 업이 돌아가. 내가 능력껏 빌어 줄 테니까 심술부리지 말고 그만 가.
“이 이상 죄를 지으면 너도 못 가.”
몇 시간에 걸친 경청과 설득 끝에 이재는 동의를 얻을 수 있 었다.
역시 이 정도 고집은 있어 야 성불을 못하고 원귀가 되는 거였다.
이재는 요절한 병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 영가는 인세에 해를 끼친 대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구 팔찌를 굴리며 오랜 시간 마음속으로 염원 했다.
‘인과응보 전인후과.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그 인과율의 고리를 끊고,인세에 대한 미련을 거뒀으니 천형을 받지 않음이라.’
‘영이여. 이제 그만 날아가라.’
손을 땐 그녀는 영이 희미해지 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 같긴 했지만,원 한은 많이 덜어 낸 모습이었다.
벌써 지친 이재는 다시 원귀들 을 바라보았다.
나머지는 크게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멸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고민 하던 중 그녀는 어떤 원귀 하나 와 눈이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심술만 부리는 잡 귀들과는 결이 달랐다.
눈빛은 독 했고,이목구비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곱게 갈 의사 없지?”
-네깟 게 정말 끝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곡을 찔린 이재는 멈칫했다.
악귀들은 순식간에 약한 곳을 파고들어 흔든다.
그녀가 원귀들 과 되도록 말을 섞지 않으려 하 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이재는 태연하게 말했다.
“……넌 마음 씀씀이를 보니까 우리 영산할매가 살아 돌아왔어
도 좋게는 못 갔겠다. 이 정도면 살아생전부터 인성이 나빴던 거 야.”
사실 영산할매 같았으면 다짜고짜 신칼부터 들이대고 보았을 것이다.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하는 게 정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원귀와 대치하던 이재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무구가 더 있다면 수월할 텐데.
그때 이재의 머릿속에는 한 가 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 침대로 다가간 그녀의 시선은 장승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모두 들어 올리던 이재는 갑자기 머뭇거렸다.
그녀는 천하 대장군을 다시 로더릭의 머리맡 에 내려놓았다.
‘아내 이름을 붙여 놨는데,이 걸 어떻게 버리나?’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녀는 원 귀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를 실어 마치 말뚝을 박듯 원귀의 발등에 지하여장군을 퍽,내리찍 었다.
흘러내리는 피의 양은 많아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이재는 두 장의 부적을 꺼내 차례차례 갖다 댔다. 한 장은 이마에, 한 장은 명치에.
혼의 숨통을 끊는 것이다.
“속거천리 급급여율령 사바하. 영이여,속히 굴복하고 사멸하라.”
원귀는 피눈물을 주룩주룩 쏟으며 이재를 저주했다.
그 악의 어 린 외침은 그녀에게도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그녀는 마른기침을 뱉으면서도 원귀가 사라질 때까지 노려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다면,지지도 않 을 거라고 자신을 수없이 다잡으 면서.
“하아……”
마침내 영이 소멸하자 그녀는 내밀고 있던 두 손을 거두었다.
숨을 몰아쉬던 이재는 로더릭을 한 번 바라보다가,아직 어두컴컴 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 시 원귀들을 응시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보자. 이건 절대 내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나는 그냥 좀 졸린 거야? 아침이…… 아직은 오진 않았지만, 조만간 올 거잖아?”
승리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둘 을 완벽하게 보내 버렸지만,아직도 열넷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가전을 마친 이재는 스스로를 독려하며 합리화했다.
“졌지만 잘 싸웠어.”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못생겨진 지하여장군올 몹시 안타까워하며 천하대장군의 옆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침대에 누웠다.
순식간에 몽롱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잊지 않고 벽을 한 번 노려보았다.
원귀에게 경고한 인간 부적은 돌아누우며 로더릭을 그들의 시선에서 가리듯 슬며시 끌어안았다.
왕이 눈을 떴을 때,이재는 다 시 그를 등진 채 생각에 잠겨 있 었다.
로더릭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 방에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것이 불과 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왕후만 있으면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는 건가.’
의혹은 확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몇 가지 더 있었다.
왕후는 평소처럼 그가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안겨 있었지만,그 녀의 눈동자는 정확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 한구석이었다.
로더릭은 그녀를 조금 더 관찰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감이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발달한 그의 아내는 그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지도 않고 알아챘다.
“잘 주무셨어요?”
“옹. 너는?”
“저도요.”
“넌 나이도 어린 게 희한하게 새벽잠이 없다.”
혀를 차며 살구색 머리칼을 쓸 던 그는 순간 멈칫했다.
로더릭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재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너,얼굴이 왜 이래.”
“뭐가요?”
“다 죽어 가는 얼굴이지 않나.”
“……그런 무서운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헤일리.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다.”
어젯밤에도 안색이 좋지 못하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어제보다 더했다.
앙중맞은 입술 마저 거칠게 부르터 있었다.
“정무 보러 가실 거죠? 전 그만 제 방으로 가 볼게요.”
“해일리. 얘기 중이잖아.”
이재는 로더릭의 부름을 모르는 체하고 일어났다.
차갑게 굴고 싶 어서가 아니라, 말을 길게 섞기엔 좀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크게 휘청거렸기 때문에 그 의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로더릭은 말없이 이재를 침대 에 다시 눕히고 시종장을 불렀다.
왕의 처소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아침부터 불려 온 의원은 이재 에게도 낯이 익었다. 왕이 사냥터 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왔을 때,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왕에게 험한 꼴 을 많이 당했기 때문일까.
의원은 이재를 진찰하면서도 계 속 로더릭의 눈치를 살피며 굽실거렸다.
“왕후 페하,그…… 혹시 피곤 하신 것 말고 다른 아픈 곳은 없 으십니까.”
“없어. 그냥 잠깐 어지러웠어. 원래 갑자기 일어나면 그럴 때가 있지 않아?”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로더릭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다른 거짓말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으나,이런 것까지 거짓으로 일관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헤일리. 이런 건 솔직하게 말 해.”
이재는 지친 얼굴을 하고도 미소 지었다.
중상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말하 지 않는 건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이유가 있듯이 이재에 게도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의원은 국왕의 눈치를 보면서도,꽤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특별한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그냥 심한 과로로 사료됩니다. 요 즘 뭐 무리하고 계십니까?”
이재는 잠시 의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감탄한 둣 관상을 보던 이재는 로더릭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남들 앞에서 하기 힘든 말이 있다고 생각한 로더릭이 얼른 허 리를 숙여 주자,그녀는 그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폐하,저 사람 명의였어요.”
로더릭은 살짝 울컥했다.
“농담할 때 아니라고 했지.”
한편 왕의 시종들은 무안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왕후는 국왕의 방에 들어갈 때 만 해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후가 하룻밤 사이에 과로 를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국왕이 맹수라는 이름 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왕후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국왕은 짐승이 분명 했다.
그들도 결국 시녀들만치 머릿속이 다 썩어 버린 성 사람들이었다.
몇 가지 당부를 한 의원이 돌아가자, 이재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로더릭을 보며 빙긋 웃었다.
“폐하.”
“왜.”
“저 이제 제 방으로 가서 쉬어 도 되나요?”
이 방은 영감이 뛰어난 그녀가 휴식하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이재가 꾸물꾸물 일어나자 로더릭은 말없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이재도 놀랐지만,같이 놀란 제이드가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제가 모시겠습니다.”
“됐어. 일 봐.”
제이드는 그의 가장 절친한 벗 이자,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었다.
그렇지만 생각만으로도 어 찐지 언짢아서 로더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재는 상황을 살피다가 조심스 럽게 말했다.
“폐하,저는 다리가 아픈 게 아니에요.”
“나도 알아.”
“………….”
“남편 뒀다 어디 써먹으려고. 너도 나…… 이용해라.”
“무겁잖아요.”
“해일리. 우리 제발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네가 나한테 무겁겠어?”
왕을 수행하는 시종들은 송구해서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왕후의 시녀들은 매우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근육을 이럴 때 안 쓰는 건 재능을 썩히는 거였다.
이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살짝 깨물었다. 이용하라는 왕의 말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 말을 마음에 계속 담아 뒀구나.
한편 로더릭은 그 모습을 물끄 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무는 게 왕후의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몹시 집중했거나 진심일 때 나오는 습관.
그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던컨 공작은 체력은 좋던데. 알버트 던컨도 나쁘진 않고. 년 어떻게 그런 건 안 닮았지.”
헤일리도 체구는 작을지언정 타고난 몸은 건강했다. 이재도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고,오히려 누구 보다 정결한 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어젯밤에 그만큼 치열한 전투와 회유가 벌어졌을 뿐이다.
“식사를 좀 의욕적으로 해 보는 건 어때. 매일 풀이나 깨작거리니까 키도 이것밖에 안 컸지.”
“왜 또 사람 키 가지고 놀리고 그러세요. 저도 안 크고 싶어서 안 큰 게 아니에요.”
“내가 지금 너를 놀리려는 게…… 하아,됐다.”
로더릭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너무 자주 아프니까, 혹시 지병 을 숨기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재를 왕후궁 침대에 내려놓은 로더릭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 보다가 방을 나서려 했다. 그도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권 일로 이재는 국왕을 붙잡았다.
“폐하.”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없어서 로더릭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말해.
“오늘 제 방에서 주무시면 안 되나요.”
로더릭은 잠시 침묵했다.
왕후는 좀처럼 남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런 말을 할 정도면 몸이 정말 많이 안 좋구나,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조금은 오해였다.
이재는 그 방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왕이 얼마나 대단한 기세를 업고 태어난 사람인지 재확인했다.
그는 무구도,영안도 없으면서 저 괴롭힘을 몇 년이나 버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하루 이틀은 쉬고 싶었고,왕을 그런 곳 에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로더릭은 이재의 머리칼을 부드 럽게 쓸어 넘겼다.
“쉬고 있어라. 끝나면 오후에 바로 을게.”
“천천히 오셔도 돼요.”
“싫어. 빨리 올 거야.”
이어 그는 시녀장에게 당부했다.
“왕후 좀 잘 챙겨라.”
“예,페하. 명심하겠습니다.”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가는 로더릭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조급했다.
이재 또한 그가 사라진 문가를 꽤 오랜 시간 보고 있었다.
둘에게는 분명 털어놓을 수 없 는 비밀과 한계 같은 것들이 존 재했다.
그러나 둘의 마음은 언제부턴가 그 상황을 뛰어넘고,자꾸만 만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완전히 솔직하 지 못한 이 순간마저도…… 온도는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