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37)
마음이 이끄는 대로-37화(37/134)
#37.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왕후가 접견을 허한다는 소식에 꽤 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강이재는 눈치는 꽤 빠른 편이 었지만,카이엔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녀의 식견이 어린 헤일리의 기억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로더릭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누가 친왕파이고, 누가 반왕파 인지도 잘 모르는 채 왕실에 들어왔다.
그럼 일가에 도움을 청하 는 게 당연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재는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접견이 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린 왕후에 대한 기대치들이 무척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이용해서 뭔가를 뜯 어내려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그 사람들이 사기꾼의 상을 가졌다 싶으면 그녀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글쎄요. 우선은 폐하와 상의해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때의 표정 변화를 잘 살피면, 그가 국왕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진 사람인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도 시녀들과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왕후에게는 왕후에게 배정된 예산이 있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파인만 백작이 기부금 목적으로 어린 왕후를 살살 구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어김없이 이재의 단골 화법이 등장하자,모두는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좋은 계획이네요. 폐하께 도 말씀드릴게요.”
왕후는 공식 석상에서는 귀족들 에게 상냥한 공대를 즐겨 썼다.
나이 어린 왕후가 몸을 낮춘다 해서 그걸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귀족은 없을 것이다. 어리숙해 보이니 이용할 궁리를 할 뿐이다.
하지만 왕후궁 사람들은 그녀가 지금 순진한 얼굴로 열심히 물을 먹이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남편한테 다 일러 버린다, 그 뜻이었다.
“원래 기쁨은 나누면 커지는 거라잖아요.”
“그런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만…….”
“정말요? 슬픔은 나누면 작아진 다는 말도 있는데.”
“그,그렇습니까.”
이재는 이 세상이 온통 아름다운 꽃밭이라는 둣 활짝 웃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러나는 파인만 백작을 보며 시녀장은 생각 했다.
왕후 폐하는 사실 기사단장보다 더한 친왕파 거두가 아니셨을까?
묘한 표정으로 왕후를 바라보던 데보라는 말했다.
“왕후 폐하,괜찮으십니까?”
“응? 왜?”
“불쾌하시면 그냥 화내셔도 됩니다.”
이재는 웃었다.
“데보라,화가 안 났는데 어떻게 화를 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정도 청탁은 그냥 넘겨야지,뭐. 별거 아니잖아.”
거의 세상사를 초월한 것 같은 말에 시녀들과 기사들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모든 접견 일정을 소화한 이재 가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밖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 하나가 무척 난처한 얼굴로 들어왔다.
“왕후 폐하, 송구스럽습니다만…… 던컨 공작이 왕후 폐하를 긴히 뵙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예,사전에 약속이 필요한 줄 은 알지만,잠시만 시간을 내주십 사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왕후의 시녀들은 왕후가 이번에 도 거절하리라 예상했다.
그녀가 노골적으로 공작을 피하는 모습 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던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
국왕은 자신을 이용하라는 이재 의 말에 매우 언짢은 기색을 내 비쳤다. 하지만 던컨 공작이 그 문제로 사사건건 심기를 긁고 있음도 분명해 보였다.
한 번쯤은 만나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접견장에 들어온 공작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왕후 폐하를 뵙습니다. 부녀간에 얼굴 보기가 참 힘들군요.”
명백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성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느꼈 지만,공작 말대로 부녀지간의 대화였다.
그들은 낄 수 없어서 눈 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보는 왕후의 얼굴은 생각보다 태연했다.
“사가의 사람들은 언제쯤 데려 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왕후궁에서 일할 사람을 임명 하는 건 왕후 폐하의 권한입니다.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국왕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마치 조언처럼 들리는 말에 이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거였나요. 그런데,아버지. 사실 저는 그게 정말로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성 사람들은 이미 저를 잘 도와주고 있고,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반박하는 태도는 부드러웠지만, 던컨 공작은 눈을 홉떴다.
“그럼 알버트의 복직 먼저 폐하 께 간청드려 주십시오. 왕후 폐하 오라비의 일이지 않습니까.”
민감한 화제들이 연달아 등장하자, 사람들은 더욱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왕후는 이번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가관이라는 국왕 의 말을 강력하게 중명했다.
“그건 아버지께서 하실 일인 것같은데요.”
“……왕후 폐하.”
“아니면 오라버니보고 직접 하라고 하세요.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거잖아요. 저도 오라버니도 성인이에요.”
접견장은 싸해졌다. 왕후의 태 도가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실제로 이재는 던컨 공작에게 적잖은 반감이 있었다.
세상에는 그런 말이 있다. 남들이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할 때 는 그에 걸맞은 이유를 만들어 줘라.
물론 강이재는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뺨을 맞았을 때,반대쪽 뺨도 내어 주는 호인 또한 아니었다. 헤일리는 그랬던 것 같지만.
“왕후 폐하께 독대를 청합니다. 사람들을 물려 주십시오.”
데보라가 이재를 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재도 그 신호를 수신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왕후 폐하.”
“그냥 나도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자, 공작의 태도는 더욱 고압적으로 변했다. 그는 곧바로 하대를 시작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모든 건 왕후가 충분히 요청하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폐하께 무슨 겁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거냐.”
“아니요,그런 적 없어요. 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전 제 고유의 권한이니 안 하고 싶은 거예요.”
“……가문을 위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을 셈인 거냐. 네가 지금 그 자리에 누구 때문에 올랐는데, 우리 가문을 망칠 작정이냔 말이다.”
그 말에 이재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지금 잘못된 이입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공작은 이재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대리 분노 또한 옳지 않았다. 그녀는 헤일리 던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재. 화를 내서는 안 돼.
넌 너의 소중한 마음을 고작 저 사람에게 쏟을 건가?
그런데 그녀는 솔직히 헤일리가 가여웠다.
아무도 이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아무도 헤일리가 죽 었다는 것을 모른다.
축하받을 수 없는 생과 추모할 수 없는 죽음.
이런 건 너무 슬프고 외로운 죽음이었다.
망설이던 이재는 천천히 입을 뗐다.
“아버지, 제가 원해서 이 자리에 오른 건 아니지 않나요.”
“………”
“전 아버지한테 저를 왕후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저는 가문을 망친 적도 없어요.”
“………”
“하지만 당신은 결국 당신 딸의 인생을 망쳤습니다.”
“뭐?”
당신 딸은 이미 죽었어요. 그것 도 몹시 괴로워하다가 죽었어요.
저는 짤막한 몇 문장만 읽어도 그게 느껴지는데,왜 당신은 그걸 모르는 거죠?
“그만 가 주세요. 다음번에는 미리 약속을 잡은 후에 뵙고 싶어요.”
던컨 공작은 이를 악물고 이재 를 노려보았다.
“후회할 거다. 잊지 말아라. 넌 던컨이야. 가문이 무너지면,너도 무사하지 못한다.”
이재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저는 후회할 거예요. 많이 해 봤거든요. 그렇지만 그건 생각 보다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저도 대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재는 그제야 던컨 공작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큰 관심 이 없어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문득 그의 관상이 궁금해 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작의 얼굴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저건 악업을 쌓았다는 걸까, 쌓을 거라는 걸까.
……사람을 죽였다는 걸까,죽인다는 걸까.
굉장히 모호한 관상이다.
안광이 비치는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나쁜 일 그만하고 사세요. 안 그러면 후회는 아버지 가 더 하실 거예요. 경고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니에요. 조언이에요.”
던컨 공작은 이재를 매섭게 노려보다 나가 버렸다.
이재가 왕후로 즉위한 지 두 달.
그녀에 대한 소문은 순진하다는 기존의 중론과 그렇지 않더라는 이견이 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화를 잘 내지 않고, 온화한 사람 이라는 건 대체적인 평이었다.
그런 왕후가 접견장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쏘아붙였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국왕은 왕후의 접견장에 간자를 심어 놓고 있었다.
감시와 안전을 위해 그들은 늘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다.
접견장은 은밀한 화제가 오가는 곳이지만,독대는 결국 독대가 아 니라는 뜻이었다.
“카이엔에 영광을.”
제이드는 고개를 까딱하는 로더 릭에게 접견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고했다.
“공작이 알버트 던컨의 복직 건 을 입에 올렸는데, 직접 하라고 답변하셨답니다. ……자기 일은 알아서 하는 거 아니냐고요.”
공작은 국왕의 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혔던 로더릭은 실소했다.
“뭐,맞는 말 했네.”
“………”
“왕후는 듣다 보면 또 틀린 말 은 안 해. 이상한 일이지만,눈치 가 어떨 땐 공작보다 나은 것 같단 말이야.”
로더릭은 자신도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둣,한숨을 쉬 었다.
“내가 마냥 순진한 사람은 아니라고 했잖나.”
제이드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왕은 분명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내용은 미묘하게 자랑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견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작이 독대를 요청했답니다.”
로더릭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들 그걸 그냥 내버려 뒀나? 던컨 공작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건가?”
“시녀장이 눈치껏 만류했다는 데, 왕후 폐하가 고집하신 거라 서…..”
큰 던컨과 작은 던컨이 작당 모의를 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로더릭이 걱
정하고 있는 건 폭언을 들었을 작은 던컨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공작저에서 몸 을 한껏 웅크린 채 맞고 있던 왕 후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제이드의 입에서는 왕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하셨답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언젠가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고……….”
“왕후가?”
“예,폐하.”
“왕후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
“헤일리가?”
로더릭은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 끝을 긁적였다.
다소 감정적인 발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왕후의 평소 언행을 생각했을 때,저 정도면 사실상 저주 수준이었다.
근데 걔 이겼네?
사실 어디 가서 지는 성격은 아니더라.
너희는 걔 만만해 보이지.
왕후는 사실 많이 어려운 사람 이야. 걔는 가끔 사람 머리 꼭대 기에 올라가 있어.
왕후는 그냥 참고 있는 거야.
“헤일리는 지금 괜찮나?”
“예,그냥 평소랑 똑같으시답니다.”
하지만 괜히 심란해진 로더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재의 처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