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38)
마음이 이끄는 대로-38화(38/134)
#38.
국왕이 방문했을 때,이재는 의자에 앉아 조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방에 놓아 줄 염라상이었다.
“너 오늘 또 으아아 했다면서.”
이재는 픽 웃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앉으며 로더릭은 말을 이었다.
“제대로 화낼 줄은 아냐고 했던 건 취소하겠다.”
“제 안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화를 낸 건 아니에요.”
“그래?”
“네.”
이재는 그저 공작의 관상을 보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감을 내 뱉었을 뿐이다.
사실 그런 부정적인 말은 함부 로 해선 안 된다. 인세에 영향을 끼치고,천기와 연결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안이 있는 사람들은 가끔 의지와 상관없이 말을 내뱉을 때가있다.
어딘가 씁쓸한 이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로더릭은 물었다.
“헤일리. 혹시 사가에 유감 있어?”
가출 청소년을 선도하는 듯한 말투에 그녀는 웃음을 홀렸다.
“딱히. 그 정도까지 큰 관심은없어요.”
“그래?”
“네. 혹시 제가 이렇게 하면 폐 하가 곤란해지시는 거였나요?”
그렇지는 않았다. 외척은 모든 국왕들의 골칫거리였고,왕후가 던컨가와 데면데면해지면 이득을 보는 것은 국왕이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로더릭 의 태도였다.
그는 이재가 친정을 냉랭하게 대할수록 그녀 앞에서 던컨 흉을 삼가고,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닌데, 좀 살살 해. 그 정도면 뼈 다 부서졌겠더군.”
“왜요. 폐하는 저희 아버지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네 마음도 함께 다치고 있잖아.
뒷말을 삼킨 로더릭은 눈썹 끝 을 긁적이며 물었다.
“헤일리. 아버지 많이 미워해서 그러는 거야?”
차라리 그렇다고 답했더라면, 로더릭도 단순하게 반응했을 것 이다.
그런데 이재는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결국 흠,자조적인 웃음 을 짓고 말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공작 부부가 아니라 그녀를 버린 부모였기 때문이다.
안 좋은 대운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부모가 정성껏 보살피면, 그 역운을 이길 수 있다. 다음 십 년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버팀목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재의 유년은 인생에서 가장 불행 했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 명 가식이고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우리의 분노는 대상이라 도 있어야 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원망해 봤자 어떤 위력이 있을까. 그 분 노는 정말 힘을 가진 걸까.
그런 건 결국 아무리 걸어도 상대가 받아 주지 않는 전화와 같다.
자신만 초라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도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발신을 멈추어야 했다. 전화를 이제 그만 손에서 내려놓아야 했다.
이재의 지난 생은 그것이 잘되지 않아서 온통 괴로음의 연속이었다.
“글쎄요.”
“………”
“폐하,사실 저는 이런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이재는 대화를 싹둑 잘라 버렸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마음으 로 눈치를 살폈지만,로더릭은 그 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왕후가 저런 식으로 답할 거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로. 딱히. 약간. 가끔.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잇다 보면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인다.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부득불 쓰 고 싶어 하는 가면이.
한쪽 턱을 관 채 이재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말했다.
“해일리.”
“왜요.”
“나는 네가 궁금해.”
“………”
“정말 많이…… 궁금해.”
무수한 사람들이 서술하는 너와 내 눈앞에 있는 너는 꼭 다른 사 람 같아.
그렇다면 내 느낌이 맞다고,혹은 틀리다고 대답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거지.
멈칫하던 이재는 잠시 로더릭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시선을 피했다.
로더릭은 확실히 왕후의 기분이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잘라서가 아니라, 조각도를 움켜쥔 손에 방금 전 동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 집중을 하기가 힘들었는지 그녀는 결국 잠시 조각을 멈추었다.
관찰하는 시선이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망설이던 이재는 입 을 열었다.
“폐하.”
“응“………”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 데,그래도 듣고 싶으세요?”
“응. 해 줘.”
그녀는 픽,웃었다.
“저는요. 세상에는 정당한 분노 와 부당한 분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
“세상에는 날 때부터 불행한 사 람들이 있고. 저는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결백하고,날 힘들게 했던 대상을 찾고, 이 원망은 너무 정 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이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 었다.
“그런데 폐하. 세상에는 아름다 운 분노와 추한 분노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어요.”
“………”
“내 감정이 어떤 사람도 위로하 지 못하고,심지어 내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하고,정확하게 나의 미래만 망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그 어떤 정당한 감정도 비로소 추해져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스스로 괴물 이 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라.
이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녀는 다시 염라상을 깎으려고 들었지만,의자를 당겨 온 그는 이재의 손을 나무토막에서 부드 럽게 떼어 냈다.
로더릭은 조각도와 나무토막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나중에 하고,나랑 얘기 좀 더 하고 놀자.”
로더릭은 이재의 입술을 손으로 한 번 쓸어 깨물지 못하게 했다.
“우리 왕후는 뭘 해 드리면 기 분이 좀 좋아지시려나.”
“폐하가 제 기분까지 풀어 주세 요? 정말 송구하네요.”
“송구하면 좀 알려줘 봐. 조각이랑 명상말고는 좋아하는 걸 몰라서 어렵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제 기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재가 고심하는 표정을 짓자,로더릭의 마음은 한결 편해 졌다. 그는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이 앞에 웅덩이 하나 더 파 주고,아서의 숲에서 나무토막이나 몇 개 베어다 주면 되는 건가?”
물론 국왕은 지금 농담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재는 화들 짝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녀는 로더릭의 손을 덤석 부 여잡았다.
“안 돼요! 아서의 숲은 손대면 안 된다고요!”
천벌을 받을 짓이었다. 혼이 깃 든 문화재도 훼손하면 귀신이 붙 는다.
그런 신성한 곳을 건드리면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액을 입고 말 것이다. 그건 이재 능력으 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한편 로더릭은 자신의 손등을 간절히 붙잡고 있는 이재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얘는 놀라게 하면 손을 잡네.
“왜 안 되는데.”
“………”
“헤일리. 묻잖아. 왜 안 되냐고.”
“제가…… 나무한테 연민이 있 었나 보죠?”
로더릭은 이번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기사단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왕후 폐하의 괴작 때문에 희생된 나무들은 뭐가 되지요?
“헤일리. 그런 것치고는 방금 전까지 너무 열심히 깎고 있었다 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튼 폐하. 아서의 숲은 절대 안 돼요.”
“나도 농담이었어. 거기 왕실 보물이야, 헤일리.”
펄쩍 뛰던 이재는 몹시 민망해하다가 겨우 말했다.
“폐하,그럼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돼요?”
“그래,말해 보라니까.”
“저랑 숲으로 산책 안 가실래 요?”
한동안 뜸했으니 가서 정기를 받고 오는 것도 좋을 둣싶었다.
로더릭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대로 이재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갑자기 생긴 소원권을 자신이 아닌 국왕을 위해 사용했다.
로더릭과 이재는 천천히 숲을 거닐었다. 그들은 예전과 달리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고, 로더릭 은 잊지 않고 나뭇가지를 쥐여 주었다.
“자,데려다줬으니까 너도 빨리 흙장난하고 놀아.”
작게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물었다.
“폐하는 제가 여기 자주 와 달라고 부탁하면,그것도 들어주실 건가요?”
“이 숲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네.”
결국 다 왕을 위한 루틴이었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로더릭 은 짓궂게 말했다.
“하루에 한 번씩 키스해 주면.”
“그거 아직도 대답 안 했잖아.”
“어쩌죠? 이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어요.”
로더릭은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요즘 자꾸 상처를 주네. 근데 나도 참 큰일이지.”
“뭐가요?”
“점점 차이는 상황에 익숙해지 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즐거운 둣 키득거렸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던 이재는 물었다.
“폐하,아서 왕께서는 왜 이런 숲을 성 안에 만드셨을까요?”
로더릭은 턱을 매만졌다.
“글쎄. 초대 왕께서는 신성한 힘 같은 게 왕실을 수호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군. 역사상 성검을 가장 자유자재로 다뤘다고 하 니까. 뭐,다 옛날 옛적 이야기긴 하지.”
“그렇구나.”
“왜. 궁금해?”
“뭐가요?”
“너,전에 사관한테 왕실 계보도 빌려 갔다며. 읽지도 못하면서 그건 대체 왜 빌려 간 건가?”
국왕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둣했다.
뜨끔한 이재는 입을 다물었지 만,곰곰이 생각하던 로더릭은 그 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숲 밖 으로 이끌었다.
로더릭이 이재를 데리고 간 곳
은 성 안에 있는 첨탑이었다. 의 아해하던 이재는 나선형 계단을 한참이나 오른 뒤에야 이곳의 용 도를 깨달았다.
벽에는 스물일곱 점의 그림이 있었고,그건 역대 왕들의 초상화 였다.
가장 아래에서 27대 왕,로더릭이 등장하자 그녀는 그만 푸홋, 웃고 말았다. 로더릭은 곧바로 눈씹을 치켜올렸다.
“사람 초상화를 보고 웃으면, 옆에 있는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
해야 하지?”
이재는 입가를 짓누르며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데 왜 웃었어?”
“그림이 실제를 담아내지 못해 서요.”
화공의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 었다. 저런 대운과 기세를 화폭에 담아내기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그런 의미였지만,칭찬
으로 접수한 로더릭은 머쓱해했다.
“와,15대 왕께서는 왕후 폐하랑 같이 그리셨네요.”
“어. 엄청난 애처가셨다고 하더군.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꼭 함 께했던 모양이야. 15대 왕후께서 늦잠을 자면 깨우질 못하게 해서 아침이 점심이 되곤 했다는 일화 가 있지.”
“되게 낭만적인 분이셨네.”
이재를 힐끔 바라본 로더릭은 물었다.
“우리도 같이 그려서 바꿔 걸 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 개를 저었다.
“전 사양할래요. 그림으로 절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이게 뭐라고 또 짜증이 나네.”
차이는 상황에 갈수록 익숙해지 고 있는 로더릭은 이 여우를 어 떻게 하면 좋지,하는 얼굴을 했다.
이재는 그의 팔을 두어 번 쓸 며 웃었다.
그들은 계속 초상화를 감상하며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로더릭과 이재는 탑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림은 이제 단 한 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재의 얼굴에서는 점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로더릭은 농담조로 말했다.
“남편 초상화보다 다른 남자를 더 홀린 둣이 바라보면 어떡하 나.”
그녀는 대꾸하지 못했고,여전 히 웃지도 못했다.
그때 로더릭의 목소리가 첨탑 안에 울려 퍼졌다.
“소년왕 아서 룩스 블레어크. 숲의 주인이자 카이엔 건국 왕이시다.”
화폭 안에는 무척 낯익은 얼굴이 담겨 있었다.
호숫가에서 그녀가 항상 기다리던 푸른 눈의 소년귀.
당신이 바로…… 소년왕이었구 나.
이재는 한참 동안 그림 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