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4)
마음이 이끄는 대로-4화(4/134)
#4.
이재는 한참 동안 왕을 관찰하기만 했다. 예리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했다.
참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꽤나 오래 시달렸는지 희미해져 있었지만, 국왕의 몸에는 분명 기가 흐르고 있었다. 신성하기까지 했고,그 기운은 이 왕궁터와 닮아 있다. 아까 홀에서 본 서양귀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이 렇게까지 많은 수의 원귀를 몰고 다닌단 말인가?
보통 사람들은 원혼이 한둘만 붙어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없는 거였다.
단명해야 하는 건 사실 물가에 몸을 던진 헤일리보다는 국왕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 입을 쭉 찢은 사람의 형체가 왕의 뒤에서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 간악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재는 얼른 로더릭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요. 괜찮으신 거예요?”
“………”
“폐하,그,저기…… 많이 아프신가요? 고개 좀 들어 보세요.”
왕은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이재가 계속해서 속삭이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좀 전까지는 인상을 쓰고 있던 그는 다소 차가울지언정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 남들은 느 끼지 못할 섬뜩한 전조를 느낀 이재는 몸을 음찔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이러세요?! 정신 좀 차려 봐요!”
“………….”
“당신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인간은 아닐 터였다.
그에게서는 갑자기 살의가 철철 넘쳐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재는 무작정 외치고 보았다.
그러자 로더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괴로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차라리 나았다.
이재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살짝 파고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서는 원귀가 이를 갈고 있 는 게 보였고,이재는 이번에는 그의 어깨를 잡고 막무가내로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오래 버텨 놓고 지면 안 돼요!”
“………”
“아니,아까까지 멀쩡하다 왜 첫날밤에 이러는 거야?”
말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울컥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참이나 짚고 있던 로더릭은 갑자기 툭 쓰러져 버렸다.
그녀에게 온전히 자신의 몸을 맡긴 채였다.
소리를 치다가 상체를 뻣뻣이 굳힌 이재는 그가 고꾸라질까 봐 뒤로 물러나지도 못했다.
“……주무시는 거예요?”
“………”
괜찮아졌구나.
한시름 놓은 그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제 몸에서 좀 떨어져, 아니…… 일어나지 마세요. 계속 주무세요. 푹 주무세요.”
이재는 로더릭을 침대 가운데에 눕혔다.
단단한 신체는 무거워서 그녀는 한참 동안 낑낑거려야 했다.
그래 도 이 사람 몸은 튼튼하니 용케 버틸 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가슴께까지 잘 덮어 주며 허리를 숙이자,그에게선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이재는 살짝 혀를 찼다.
“당신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인데, 술을 마셨네.”
기껏해야 한두 잔 마신 것 같 았지만,이런 상태의 사람한테는 그것도 위험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재는 그 원인도 깨달았다.
왕의 주변에 초라한 행색의 주색귀 하나가 얼쩡거리고 있었던것이다.
“……가지가지 다양하기도 하다, 정말.”
이재의 얼굴에는 심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병사처럼 보이는 다리 하나가 없는 귀신이 방 안을 콩콩 뛰어 다니자,그녀의 표정은 더욱 처참해졌다.
이재는 귀신 두엇 정도와는 동침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라난 환경이 그 모양이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의 수는 너무 많았고, 큰일을 치른 이재는 좀 조용하게 자고 싶었으며,왕은 꿈자리마저 사나워 보였다.
자면서도 고통스러운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평상시에도 제대로 된 잠은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이재는 한동안 고민스러운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려는 게 그녀에게도 몹시 부담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에는 이런 말이 있다.
‘괴물과 싸우는 자,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랜 시간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
물론 그들은 조금 더 고상한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지만, 사실은 귀신도 마찬가지다.
이재가 그들을 의식하면,그들도 이재를 의식한다.
이재가 그들에게 개입하면,그들도 이재의 삶에 개입한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인생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재는 이전 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원래 사람은 귀신과 얽히면 하등 좋을 게 없다.
하지만 망설이던 이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던컨 공작이 때리지 못하게 막아 준 보답 정도로 치자. 그러기엔 내가 잃는 게 훨씬 많은 것 같지만…… 이번만이야.’
침실은 웬만한 집 한 채 만큼이나 넓었지만,성은 성이라서 서재는 또 따로 있었다.
필요한 건 종이 한 장뿐인데, 그걸 찾지 못한 이재는 결국 입고있는 슬립의 밑자락을 북,찢었다.
그리고 검지를 독하게 깨물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로 몇 가지 한자를 파자하여 쓴 이재는 침대 가에 천 조각을 펼쳐 놓았다.
“………”
이게 이곳에서도 통하는 수법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산할매를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은 어딜 가든 결국 다 기 싸움이라 는 것이었다.
이재는 좀 전까지는 외면하던 무리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그들도 일제히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이재를 바라보았다.
을씨년스럽고 머리가 쭈뼛해지는 광경이었지만, 그녀는 지지 않고 눈을 흡떴다. 기세에서 늘리면 끝장이었다.
“망자들아. 이승과 저승의 시간은 다르게 움직인다.”
이재는 무리들을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산 자와 망자의 세계는 결코 섞이지 않는다.”
“………”
“부정한 것들아.”
“………”
“너희는 너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그녀는 검은 기운들이 천천히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또 방 밖으로 흩어질 때까지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위가 평안해졌 을 때,이재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영안이 있을 뿐,딱히 영검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사사한 무녀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아주 일시적인 방편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모조리 성불시켜 줄 능력이 안 되니 그저 잠시 몰아낸 것뿐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오늘 하루라도 단잠을 잘 수 있겠지.
피로 얼룩진 옷자락을 침대 밑 으로 밀어넣고 나자,뒤늦게 극심한 현기중과 구토감이 몰려왔다.
욱,우욱 하며 헛구역질을 하던 그녀는 그대로 침대 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이재가 다시 눈을 뜬 건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봤을 때,아직 하늘은 어슴푸레 했다.
그리고 그녀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털이 새카만 맹수 같은 남자는 옆에 앉아 그녀를 말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제 결혼한 이재의 남편이었다.
깜짝 놀란 이재는 몸을 튕기듯 이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로더릭은 이재의 몸을 훌었다.
“그거…… 내가 그런 건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건 아래 부분이 반쯤 뜯겨 나간 그녀의 슬립이었다.
이 꼴로 이불도 안 덮고 잤다 는 걸 깨달은 그녀는 황급히 끝자락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슬립은 속옷만 간신히 가려 줄 뿐이었다.
“그 정도로 화끈한 밤을 보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것 같은 로더릭은 이재보다 훨씬 침착했다.
그는 그저 답을 구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네. 오시자마자 바로…… 주무셨는데요.”
“………”
“제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절대로요.”
꼭 불평하는 말처럼 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재는 소심하게 덧붙였다. 그 와중에도 손바 닥만한 속옷이 보일락 말락 해서 자꾸만 슬립 끝을 끌어 내려야 했다.
그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로더릭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이불을 툭, 던져 줬다.
“덮어라.”
“……감사합니다.”
이재가 주섬주섬 몸을 가리자 그는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로 돌렸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건데.”
“………”
이재는 입을 다물었다. 꽤 오랜 시간 침묵하고 난 뒤에야 그가 여러 번 묻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왕은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그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고, 근래 드물 정도로 머리가 맑았다.
사실은 몸 상태가 최상이었다.
“이 방에 괴한이라도 다녀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괴한은 어제 당신이 될 뻔했어.
“그럼.”
“제가…… 그런 것 같아요.”
로더릭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둣 물었고, 이재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잠결에 좀 거추장스럽고 더웠나 봐요……”
바보 같은 대답에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너는 처음부터 충분히 헐벗고 있었던 것 같은데.”
“………”
로더릭이 연약한 끈 두 개만이 가로지르는 어깨를 훌어보며 말했다.
“너,그 정도로 더위를 많이 타?”
“그건 아니고…… 그냥 좀 사정이 있었어요.”
이재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누가 불편하고 덥다고 옷을 이따 위로 하고 잔단 말인가.
하지만 바른 대로 말할 수도 없어 이재는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왕은 그 이상은 묻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그녀를 이미 이상한 사람으로 본 것 같았다.
“더 쉬어라.”
이재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로더릭은 어느새 천천히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뭐야,그렇게 못 들은 척해주면 내가 더…… 창피하잖아요. 나도 이런 짓 다신 안 해.’
날카로운 첫날밤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