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41)
마음이 이끄는 대로-41화(41/134)
#41.
일정을 다 소화한 이재는 침대 에 엎드려서 헤일리의 일기장을 보고 있었다. 전에 한 번 읽었던 부분이었다.
「497년 9월 10일
아버지가 무서운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무서운 일.”
이재는 그 부분이 계속 신경 쓰였다.
애매하지만,공작의 얼굴 에 살인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함의 정령은 이재 옆에 와서 턱받침을 한 채,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
“폐하 정혼녀 중에 한 사람이 음독사했잖아.”
_ 응.
“그거 혹시 누가 그랬는지 아니?”
-이재.
그녀는 어서 말해 보라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르지.
“……그럼 넌 대체 아는 게 뭐 니?”
이재는 깊은 한숨을 쉬며,일기 장을 덮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전 에 써 두었던 버킷리스트를 펼쳤다.
「1. 폐하의 침실에 가 볼 것
2.소년귀에게 다시 한번 말해 보기
3.성 안의 원귀들을 퇴마,성 불시 키기
4.헤일리의 일기장 완독
5.카이엔 왕국사 파악
6.헤일리가 몸을 던진 강가에 가 보기」
무척 보수적으로 쓴 버킷리스트 였다.
이걸 쓸 당시에는 자신 없 는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과가 영 미비해서 이재는 인상을 찡그렸다.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네. 나 두 달 동안 뭐 한 걸까.”
-이재는 놀고먹은 거야!
“나도 누가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거든. 그런데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많이…… 언짢네? 그리고 난 먹긴 했지만, 너같이 놀지는 않았거든?”
함의 정령을 새초롬하게 흘겨본 이재는 일기장과 종이쪽지를 주 섬주섬 치웠다.
그녀가 아는 게 없는 함의 정 령 대신 도움을 청한 것은 시녀장이었다. 연륜이 있는 인간은 꽤 많은 경우,귀신보다 나았다.
“데보라,있잖아……”
“예,왕후 폐하. 말씀하십시오.”
데보라를 방 안으로 불러 놓고 도 이재는 꽤 오랜 시간 망설였다.
차라리 책을 빌려서 찾아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추문은 야사로만 남을 확률이 높았다. 헤일리 던컨이 강물에 몸을 던 진 사실이 소문으로만 남아 있는 것처럼.
“폐하의 정혼녀들은 언제 어떻 게 죽었어?”
뜻밖의 질문에 데보라는 움찔했다. 왕후답지 않고,예민한 화제였다.
하지만 이재가 난처해하면서도 계속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그녀는 입을 열었다.
“처음은 재작년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각이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재작년 가을.”
“그다음은 작년 여름이었고요. 얼마 전 일이니 왕후 폐하도 잘 아시겠지만,사인은 독살이었습니다.”
국왕이 그 배후로 던컨 공작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성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데보라 는 말을 아꼈다.
왕실에서도 조사가 제대로 끝나 지 않은 사안이었다.
굳이 시녀장 인 자신이 의견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데보라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
“외람되지만, 왕후 폐하. 그것 은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요.”
“그냥 좀 신경이 쓰여서.”
데보라는 잠시 왕후 폐하가 설마 질투를 하시나? 의심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럴 위인 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왕후도 국왕에게 꽤 다정하게 대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마음은 왕후보다 국왕 쪽이 훨씬 있었다.
국왕은 종종 왕후에게 시비를 걸었고,심술궂게 놀리곤 했다.
자꾸만 찾아왔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원래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었는데도.
그 모든 건 결국 좋아한다는 중거였다.
“그냥 형식적인 약혼이었고,교류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
“예,왕후 폐하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는 왕후 폐하께 충실한 분이실 겁니다.”
딱히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괜히 멋쩍었던 이재는 뺨을 긁적였다.
그때 데보라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 일어났다.
이재를 찾아온 왕의 시종은 말을 전했다.
“왕후 페하. 페하께서 식사 같이하고 싶으시답니다.”
데보라가 보란 둣이 빙긋 웃었기 때문에 이재는 더욱 멋쩍어졌다.
이재가 식사 장소로 들어와 앉 자,로더릭은 기분이 좋아졌다.
공기가 상쾌해지고 숨 쉬기가 편해진다. 언제부턴가 그냥 왕후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물을 한 모금 마신 이 재는 힐끔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입술 끝을 살짝 깨물고 있는 것을 본 로더릭은 의아한 둣 물었다.
왜.
이재는 기다렸다는 둣 물었다.
“폐하,저는 외출을 할 수는 없 는 건가요?”
로더릭은 피식 웃었다. 왕후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 었기 때문이다. 성 밖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왕족의 삶을 살려니 답답할 것이다.
왕후는 그럴 만한 나이였다.
물론 전부 다 오해였다.
“어딜 가고 싶은데.”
“그냥. 여기저기요.”
이재가 얼버무리자,로더릭은 턱을 괴었다.
“넌 아직도 네 신분이 공작가 막내딸 정도인 줄 아나 보지?”
“안 된다는 뜻이에요?”
“목적지를 말해야 안전한 경로를 짤 수 있다는 뜻이다. 너 하나 음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이 움직여야 하는 줄 알아?”
그러자 이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로더릭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재가 지금 또 거 짓말을 하려고 하는구나.
“신전에 가고 싶어요.”
턱을 괴고 있던 로더릭은 허리 를 세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거기는 왜 가야 되는데.”
“그냥 오랜만에 가 보고 싶어서 요. 좀 기원하고 싶은 것들도 있 고요.”
로더릭은 그때부터 속에서 뭔가 욱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쪽 눈썹을 치켜을리며, 그는 물었다.
“헤일리.”
“네?”
“너,내가 적당히 속아 주니까 바보로 보이는 건가?”
수도에 있는 신전 인근에는 수 심이 깊은 강이 흐른다.
헤일리는 신전에 다녀오던 날, 그 강에 몸을 던졌다.
심지어 로 더릭은 두 번째 보고서를 본 뒤, 헤일리가 그날 신전에 간 게 몇 년 만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국왕의 얼굴이 싸늘해지자,이 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녀의 최종 목적지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재는 실제로 신관들을 만나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 강가에 더 욱 가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초혼 의식이라도 해 보고 싶었 기 때문이다.
죽은 헤일리의 영을 불러내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왕은 감이 좋은 사람이었고, 그의 말처럼 적당히 속이 는 게 어려웠다.
“절대 안 돼. 너 지금 무슨 말 을 하는 거야. 보자 보자 하니까 남편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
“또 그 얘기를 꺼내면 호수가 아니라 강을 다 메워 버릴 줄 알아. 내가 못할 것 같으면 한번 해 보든지.”
“폐하.”
“나 진심으로 화내는 거 보기 싫으면 너도 그만해라.”
로더릭은 대화를 잘랐지만,이재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폐하,그러지 말고 절 조금만 믿어 주세요. 정말 그런 게 아니 에요.”
의심암귀. 의심하는 어두운 마음이 귀신을 만든다.
하지만 로더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너 못 믿는다.”
네가 던컨이라서가 아니라,그 냥 너를 못 믿겠어.
참 이상하지. 언제부턴가 눈을 떼면 네가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떠나질 않는다.
대놓고 못 믿겠다는 소리를 하자, 이재는 서운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로더릭은 저 표정만 보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마음 이 순식간에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매정하게 딱 잘랐다.
“그런 표정 해도 소용없어.”
“폐하,저는 페하한테 해가 되 는 일은 절대로 안 해요.”
“어. 그렇겠지. 그런데 년 너한 테 해가 되는 일은 하겠지. 네가 그런 성격인 건 나도 이제 알아.”
“……저 안 죽어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해요. 약속할게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로더릭은 한숨을 쉬었지만,또 접시를 가져왔다.
그는 오늘도 고기를 썰어 주면서 열심히 화를 냈다. 그 와중에 왕후는 입이 작으니까 작게 잘라 줘야지, 생각한 그는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안 죽는다고? 말 참 쉽게 하 는군. 전장에 나가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람은 정말 쉽게 죽고, 그건 한순간이다. 되돌릴 수도 없다.”
이재는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있던 로더릭은 정말 돌아 버리겠다는 둣,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결국,마 음이 약해지는 걸 막지 못한 그는 한숨을 쉬었다.
“헤일리.”
“………….”
“그럼 나랑 같이 가. 내가 시간 낼 테니까.”
“………….”
“그럼 되잖아.”
선뜻 긍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국왕은 분명 자신과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는 의미가 없었다.
이재가 대답을 망설이자, 로더릭은 기가 찬 둣 웃었다.
“봐. 네가 이러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
“넌 지금 내가 지나치다고 생각 하나?”
호숫가에 가서 맨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렸다.
왕후궁 시녀들이 딱 붙어 있지 않는 것도 죄다 거슬렸다.
왕후는 자기가 어떤 눈으로 물 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곤 했는데, 로더릭의 눈에는 이상하게 그 모습이 슬퍼 보였다.
그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시선에 가끔 갈망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다 썰어 낸 고기 접시를 밀어 준 로더릭은 이재의 표정을 보고 는 한숨을 쉬었다.
“죽을상…… 아무튼 그런 얼굴 그만하고 얼른 먹어. 그거 다 먹어라.”
“네,잘 먹을게요. 폐하도 많이 드세요.”
식사는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세 번째 부부 싸움 또한 다소 싱겁게 마무리되었지 만,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혼 초에는 원래 이렇게 많이 싸우는 건가 싶었던 로더릭은 이 재를 힐긋 바라보았다.
왕의 시종들과 왕후의 시녀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왕족들의 언쟁치고는 정도가 매우 순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가문이 대립 관계에 놓 여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국왕과 왕후의 사이는 사실 심각할 정도로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재의 침묵이 몹시 신경 쓰였던 로더릭은 다른 화제를 꺼내며 슬쩍 대화를 유도했다.
“조만간 왕제가 귀국할 거야.”
처음 듣는 소식에 이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더릭을 바라봤다.
“만난 적 있나? 네가 사교계 데뷔할 때쯤에는 카이엔에 없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국가적인 외부 행사가 있을 때, 먼발치에서 본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대면한 기억은 없었다.
한편 이재가 도리도리,끄덕끄덕만 반복하자 로더릭은 픽 웃었다.
그녀가 또 입을 다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얘,많이 삐쳤나 보네.
간신히 옆에 와 앉았던 고양이 는 또다시 높은 곳에 올라가 버 렸다.
불러도 와 주지 않을 것처럼.
여러모로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재의 손이 자주 가는 접시들을 유심히 봤다가 그녀 쪽 으로 밀어 주었다.
“자,너 좋아하는 것도 먹어. 많이 먹고 우리 키 크자.”
“윽,또 키 얘기.”
하지만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국왕이 달래 주고 싶을 때 유 독 저런 말투를 쓴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 좀 더 해 볼 테니까 기분 풀어.”
“………….”
“나도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니 까,날 너무 미워하진 말고.”
“하나도 안 미워해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해요. 걱정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요.”
왕후가 또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자,그는 픽 웃었다. 저 마음이 어찌나 알뜰한지,조금씩 보여 줄 때마다 요즘은 감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행선지가 여전히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확언은 하지않고 다시 말을 돌렸다.
“나중에 왕제가 귀국하면 따로 식사라도 한번 하지. 뭐,불편하면 공식 인사 정도만 받아도 되고.”
“안 불편해요.”
“그래?”
“네. 전 사람한테 낯 안 가리거든요.”
귀신도 보는 사람이 산 사람 만나는 것까지 무서워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밀어내고 거리를 두면서, 낯을 안 가린다고 말하면 로더릭도 서운했다.
쟤한테 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러나 로더릭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감하네,우리 왕후.”
왕후의 시녀들은 이럴 줄 알았 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 싸옴은 칼로 물 베기였고,국왕은 왕후를 상대로는 고작 반 시간 정도도 버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