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44)
마음이 이끄는 대로-44화(44/134)
#44.
간밤에 국왕의 방에서 원귀를 둘 퇴치한 이재는 피로했다.
왕이 또 깰까 봐 몹시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요 며칠 힘을 냈다. 얼마 전,국왕이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되면.’
이것은 아마도 무속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인간적인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재의 마음을 오랜 시간 괴롭혔고,그녀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그녀는 사실 묻고 싶었다.
당신이 잘못되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하죠?
제가 정말로 그걸 견딜 수 있 는 걸까요.
로더릭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근래 이재의 얼굴은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수심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채,먼 곳을 바라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헤일리.”
“네?”
“네가 죽을…… 아무튼 이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닌데.”
“요즘 부쩍 딴생각이 잦지 싶다.”
로더릭은 죽을상,운운하려다가 금세 말을 고쳤다.
왕후가 저 단 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재는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것은 국왕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오늘은 왕제의 출정식임에도 그의 관심은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로더릭은 그녀를 뒤에서 슬쩍 끌어안으며 팔로 감쌌다.
그리고 살구색 정수리에 턱을 올려놓았다.
“왜 그래. 또 몸이 안 좋나?”
하지만 한창 준비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던 이재는 금세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그녀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산 자와 망자의 세계에 발을 한쪽씩 디디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것이다.
남들 눈에는 오락가락하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폐하.”
“응.”
“제가 왕제께 손수건이라도 매어 드릴까요?”
그러자 이재를 내내 걱정하고 있던 로더릭의 얼굴은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네가 왜.”
“왕제께선 미혼이시잖아요. 교제하는 분도 따로 안 계시지 않나요?”
“그게 뭐.”
“전승과 안전을 기원해 줄 사람 이 저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왕후가 있는데, 시녀들이 매어 주는 것도 격에 어긋나는 게 아 닌가 싶었다. 이재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으나, 로더릭은 다소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넌 유부녀가 왜 다른 남자한테 손수건 줄 생각을 해. 왕제는 남자가 아닌가?”
“가족끼린데 뭐 어때요.”
로더릭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둣 말했다. 가족 같은 소리 하네.
물론 이재의 귀에도 다 들렸다.
“가족의 범위가 나랑 다른 것 같네.”
“그래요?”
“그래. 그런 관대한 생각을 갖 고 있었다면 미안하지만,네 가족은 재가 아니라 나지 싶다.”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역시 서구권은 핵가족화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군요.
“폐하,제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폐하 가족이라서 그래요.”
“………….”
“그리고 그냥 좀 해 줄 수도 있는 거죠. 보기보다 유치하시네.”
“뭐?”
갈수록 가관의 최고치를 경신해 가는 아내 때문에 로더릭은 실소를 홀렸다.
“년 진짜 안 되겠다,이 입을 막아 버려야지.”
국왕이 턱 끝을 잡자,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입을 막겠다는 것 인지 알아챘다. 이재는 왕의 손을 떼어 내며 도망가려고 했다.
“아,진짜,요즘 자꾸 짐승같이 왜 이러세요.”
“짐승? 그게 내 이름이긴 한데.”
“………….”
“너도 정말 내 이름을 알긴 했네. 하도 폐하,폐하 해서 모르는 줄 알았지.”
로더릭은 태연하게 인정했으나, 국왕 쪽 수행 인원들은 몹시 송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페하, 선왕께서 부여하신 폐하 의 존함은 짐승이 아니라 맹수요.
두 단어는 어감이 많이 다르고, 왕후 폐하는 절대로 그런 의미로 사용하신 게 아닙니다.
이재가 뒷걸음치려고 했지만,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끌고 왔다.
“너,신혼 초에 나처럼 점잖은 남자가 있긴 한 줄 알아? 누굴 보고 짐승이래.”
“폐하,세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찾아보면 몇 명 정도는 더 있지 않을까요?”
“아,말 다 하셨나?”
“윽,알았어요. 잘못했어요. 그만 까불 테니까 이거 놔요.”
버둥거리는 그녀를 한 팔로 잡 고 있는 그는 정말로 맹수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짐승 무서운 줄 모르고 그 뒤로도 열심히 까불었다.
살구색 여우는 작은 앞발로 로 더릭의 가슴팍을 팡,팡 쳐 보았다.
그가 피식, 피식 웃기만 하자 그녀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그의 허리춤을 움켜잡고,으아 아 하며 이마로 가슴을 밀었던 것이다.
로더릭은 잠시 하늘을 보며 웃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온 기술이지?
이재가 말도 안 되게 자신올 넘기려 들자,로더릭은 슬쩍 그녀의 다리 안쪽을 걸었다.
이재는 어어? 했다.
원래대로라면 뒤로 넘어갔겠지만,그는 그녀의 등허리를 받친 채 계속 지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비스듬히 안긴 이재는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아니, 폐하. 이건 우리 전통 씨름의 안다리 걸기라는 기술인데,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원래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 으며,숙련된 무도인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 법이었다.
로더릭은 왕후가 갑자기 뭐 이 상한 걸 시도하며 으아아, 하니까 무게 중심을 톡, 무너뜨려 봤을 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남편은 한판승을 포기하고 아내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국왕은 별반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기울어져 있는 그녀를 반듯하게 세웠다.
“헤일리. 이제 그만해. 나도 재밌긴 한데,너는 몸도 안 풀고 이러면 다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자신이 방금 걸었던 이재의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살폈다. 뼈대가 가늘어서 잘못 넘어지면, 금방 부러질 것 같았다.
예전에는 왕후 보폭이 참 짧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심조심 걷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 알아들었어?”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국왕 은 금세 몸을 일으켰다.
이재는 집 나갔던 공손함을 되찾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역시 운동 한 사람한테 까불면 안 된다는 세상의 진리를 또 한 번 깨달았다.
하지만 출정식을 보기 위해 나왔던 귀족들은 이미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뒤였다.
어딘가 애들 장난 같기도 하고, 연인들의 장난 같기도 한 광경이 었다.
그만큼 유치했지만,귀엽고 다정했다.
“파티에서도 느꼈지만,폐하랑 왕후 폐하 사이가 진짜 좋으시네요.”
“그렇게 폐하의 장인이 되고 싶어 하더니, 던컨 공작은 끈 떨어 진 신세가 됐나 봅니다.”
“왕후 폐하가 듣기보다 독한 면이 있으신가 보오. 지난번에는 회견장에서 공작과 싸우셨다 하더이다.”
“잘 만나 주지도 않으신다면서요.”
“공작이 죗값을 받는 거지요. 사랑으로 보듬었으면 어떤 딸이 아버지한테 그러겠습니까?”
이재는 그 뒷담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은밀한 이야기를 수군대면서 또 들으란 둣,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 어려운 일을 귀족들은 해내 고 있었다.
사실은 국왕도 가끔 혼잣말인 척 이재에게 저럴 때가 있었다. 이재는 속닥거렸다.
“폐하,사람들이 우리 얘기하는 것 같아요.”
로더릭도 속닥거렸다.
“놔둬.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공작 들으라고 하는 소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던컨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내 쪽 사람들이거든. 다들 열심히 일하는 중이니까 신경 안써도 돼.”
“그런 거예요?”
“옹. 아,혹시 불편한 건가?”
그렇지는 않았다. 워낙 나쁜 말 을 많이 듣고 자란 탓인지, 이재는 어지간한 말에는 상심하지 않 았다.
“아니요,전혀요. 폐하가 괜찮으신 거면 됐어요.”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뒷담화를 들은 소 감을 말했다.
“폐하,인간 세상은 참 요지경 인 것 같아요.”
“넌 무슨 다른 세상 사는 것처 럼 말한다.”
불시에 정곡을 찔렸지만,그녀 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날을 세우고 사는 건 피곤하다는 뜻이에 요.”
로더릭은 또 선문답 같은 소리 를 하는 아내가 재미있어서 웃음 을 홀렸다. 하지만 이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시야에 인세는 정말로 요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영을 보 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지옥은 저승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으며, 지옥도는 사실 인세에 서 시작된 것이었다.
원귀는 한때 인간이었으며 원한 을 품은 자, 원한을 품게 만든 자, 모두 인간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웃음소리가 맑아 서…… 그런 원한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그녀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사열을 마친 병사들은 국왕을 향해 도열해 있었다.
고민 하던 이재는 그래야 할 것 같아 서 국왕의 옆에 나란히 섰다.
먼저 경례를 올린 건 왕제였다.
“카이엔에 영광을.”
그러자 천여 명의 병사와 기사 들이 일제히 손을 올려 국왕에게 경례를 올렸다.
국왕은 왕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는 앞줄에 위치한 기사들을 힐끔거렸다.
그들 중 유일하게 정자세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왕제의 벗이었다.
그 역시 이재를 바라보고 있었 던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로더릭은 이재의 손을 끌어 옆으로 비켜섰다.
왕후에게 따로 인사를 하지 못한 에드거는 그녀에게 경례 대신 허리를 숙여 보였다.
왕제의 벗 또한 함께 인사를 올리자,이재는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그들의 눈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왕제는 이내 말고삐를 내리쳤다.
그가 검을 들어 올리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모두 함께 말을 몰았다.
사방에는 먼지바람이 일었고,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들의 뒷모습뿐이었다.
하지만 이재는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