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49)
마음이 이끄는 대로-49화(49/134)
#49.
왕후의 접견장 앞은 언제부턴가 굉장히 북적거렸다.
로더릭은 물론이고,이재마저 이 상황을 의아 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몇 명 남았어?”
“아직 다섯 명 대기하고 있습니다.”
“멀었네.”
다만 데보라를 비롯한 왕후의 시녀들은 이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원인은 모든 걸 다 들 어 주는 왕후의 태도에 있었다.
접견은 점점 청탁이 아니라,의 논과 상담의 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그저 속내를 털어놓고 후련해질 목적으로 오는 귀부인들도 있었다.
“왕후 폐하,제가 얼마 전에 영지 내에 저택을 크게 새로 지었사온데……”
“그래요? 부자신가 보다.”
“아이고,아,아닙니다. 있는 돈을 몽땅 털었습니다.”
이재는 부자면 좋은 거지,뭘 그렇게 놀라나 싶어서 웃음을 흘렸다.
머리를 긁적이던 스키너 백 작은 말했다.
“사실은 제가 근래 왕후 폐하를 뵙고 싶었는데, 한동안 접견을 받지 않으셔서요.”
“네,제가 몸이 좀……. 근데 어디다 지으셨는데요?”
이재는 지도까지 동원해서 같이 고민을 해 주었다.
“뒤에 산이 있고,강을 마주 보네. 최고인데.”
“그런 겁니까?”
“원래 우리의 모든 문명은 다 강 주변에서 싹튼 거 아니겠어요?”
보통 그런 자리는 동서양을 불 문하고 명당이라고 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재는 곧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저택의 서쪽을 가리 켰다.
“근데 이쪽에 묘지가 되게 많은 가 봐요.”
“예,그건 그렇습니다.”
이재는 묘지 근처는 실수로라도 안 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처럼 보고 듣는 게 있는 사 람한테나 그런 거였다.
근처에 묘지가 있다고,무조건 흉한 자리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그 기운을 이길 수 있는가,없는가였다.
시장 거리를 나가 보면 계속해 서 가게가 바뀌는 터가 있다.
그 런데 그 자리에서도 엄청나게 큰 돈을 만지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기운이 강한 터에 들어간 사람은 크게 성하거나, 쪽박을 차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이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스키너 백작의 얼굴을 오랜 시간 들여다봤다.
스키너 백작은 전형적인 문관 혹은 예술가의 관상을 갖고 있었다.
다소 민감한 성향일 수 있다 는 뜻이었고, 심지어 중년 때는 건강운을 조심해야 했다.
“잠자리는 괜찮고요?”
“예?”
백작은 되물었지만,갑자기 뭐가 내린 사람처럼 이재는 캐물었다.
“잠은 잘 자냐고.”
백작은 머뭇거렸다.
“저는 문제가 없사온데, 사실 제 딸이……”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를 하고부터 가뜩이나 일이 안 풀리는 느낌인데,딸까지 저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얼버무려도 왕후는 언제나 귀신처럼 알아들었다.
“남는 방은 없어요? 다른 저택 은요?”
“게스트 룸이야 있습니다만, 말 그대로 손님을 위한 곳이라서.”
이재는 황당하다는 둣 웃음을 홀렸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딸의 의사를 물어봐야죠. 사실 따님은 그냥 머리맡만 다른 곳으로 뉘고 자도 한결 편하게 느낄 지 몰라요. 사람 마음이 그런 거 잖아요.”
“……예,왕후 폐하.”
“사실은 경도 신경이 쓰여서 그렇잖아요.”
그런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는구만.
그 뒤로도 백작은 왕후에게 열심히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재는 그저 들어만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백작은 왜인지 모르 게 돈을 바치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데뷔탕트를 했었나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아니요. 아직 어립니다.”
“그래도 불편해하지만 않으면, 한번 같이 오세요. 저도 만나고 싶어요.”
“……너무 영광입니다.”
백작이 나가고 난 뒤로도,접견 행렬은 계속되었다.
시녀들은 귀족들을 굉장히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다들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마음의 편 지 수준이었다.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 이것들이 통 들어먹질 않습니다.”
“파티에서 보니까 잘 어울리던데, 왜요?”
“………”
“안 될 인연이면 어차피 안 되겠지,그걸 억지로 떼어 놓는다고 떼어지는 거였나? 지금 혹시 제 연애사를 놀리는 건가요?”
그런데 접견을 청한 귀족들은 몹시 정곡을 찔린 것처럼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돌아갔다.
데보라는 귀족들을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 로 쏘아보았다.
저것들은 왜 스트레스를 여기 와서 푸는 거야?
“왕후 폐하,괜찮으십니까?”
“어? 좀 피곤하긴 하네.”
이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 지?’ 고개를 가윳거렸다.
의문을 가져 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냥 타고난 팔자였다.
그녀는 데보라가 내민 물을 들이 켰다.
“쉬엄쉬엄하십시오.”
“나 너무 적극적이었어?”
“……예,조금. 그렇게 사소한 개인사까지 왕후 폐하께서 들어주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이재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녀 는 말을 많이 참은 거였다.
사람 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걱정이 됐고,빤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말을 아끼는 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나쁜 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재미있어서 몰입했나 봐. 또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큰일도 작은 일이 될 수 있는 거잖아.”
데보라는 굉장히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차례는 누구야?”
“……던컨 공작입니다.”
데보라는 사실 국왕에게 끌려가서 단단히 당부를 듣고 온 참이었다.
사설은 길었지만, 결론은 짧았다.
독대를 허용하지 못하게 유도 하라는 이야기였다. 내 작고 소중한 콩알한테 다시 폭언을 듣게 하면 너희도 다 쏴 버리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왕후는 한 번씩 이상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 사람이었다.
국왕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왕후 폐하.”
“옹?”
데보라는 눈을 한 번 질끈 감 았다가 떴다.
“이번엔 사람들 있는 곳에서 만나시지요.”
“………”
“허락해 주시면 부족하더라도 제가 최선을 다해 방어하겠습니다. 아니,차라리 중간에 쓰러지는 척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손발을 잘 맞추겠습니다.”
이재는 데보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묘한 얼굴로 웃다가 조금만 가까이 와 달라는 눈짓을 했다.
고민하던 이재는 무척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데 원래도 독대인 적은 없었잖아.”
데보라는 움찔했다.
“……왕후 폐하.”
작은 던컨이 왕실에 들어온 이래, 국왕이 그녀를 감시하리란 건 궁인들이라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접견장에 간자들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극비였다.
데보라도 공적인 경로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이재는 잘 모르겠다는 둣,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폐하도 나한테 최선을 다 해 감추신 것 같진 않은데. 어쩌면 일부러 흘려주신 것 같기도 하고.”
국왕은 그녀가 공작과 독대를 했던 날 찾아왔다.
이재는 그가 대화 내용을 전부 알고 있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공식적인 대화에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는데, 과도할 정도로 그녀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그녀의 기분을 물었고,위로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재가 간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접견장에는 잡귀들이 떠돌고 있었다.
해를 끼칠 만한 영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재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다만 가끔은 그들의 시선을 따라 음직이다 보니, 듣는 귀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데보라,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왕후 폐하는 무엇이 궁금 하십니까.”
“아버지는 과연 그걸 모르시는 건가 하는 거야.”
“………”
“데보라를 추궁하는 게 아니야. 나는 정말 몰라서 조언을 구하고 싶은거야.”
“………”
“알겠지만,난 이런 부분에 많이 취약해.”
국왕은 입버릇처럼 왕후가 눈치가 빠르다는 말을 하곤 했다.
시녀장은 이 순간,국왕의 말에 극심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데보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왕후 폐하,저는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알았더라면 굳이 독대를 청했을 리도 없습니다. 물론 폐하의 심기를 긁기 위해 그랬을 지는 모르오나……”
그때 데보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왕후 폐하는 뭔가 떠보려는 것 이지요?”
“응. 눈치 빠르네.”
“저도 나이가 오십입니다.”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데보라,이런 얘기 꺼내서 미안해. 내 말이 데보라 입장에선 짐이 된다는 걸 알아.”
“……아닙니다,왕후 폐하. 영광입니다.”
데보라는 그저 뜻하는 바를 이루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왕후 폐하,제가 밖에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속삭였다.
“저곳과 저곳에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언제든 위험하다 싶으면 소리를 지르시고 저쪽으로 달려가세요. 이런 말씀은 송구하오나,왕후 폐하를 보호 하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데보라가 턱짓으로 정확한 곳을 짚어 주자, 이재는 자신의 손을 옷자락에 닦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공작과의 접견은 일전의 대화를 계속 반복했다.
이재가 들어줄 마 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다못한 공작이 다시 한번 독대를 요청했을 때,이재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둣 입을 열었다.
“아버지. 재작년 가을에 있었던 사고 말이에요.”
“이제 좀 정신을 차릴 마음이 든 게냐?”
이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지금 진실한지 가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저는 힘이 없으니까요.”
“무슨 이상한 기미라도 있었느냐?”
“그런 것은 아니고요. ……우선 작년 여름 일부터 이야기하고 싶어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는 공작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재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진심 한 조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랬구나.
당신이 폐하의 정혼녀들을 죽인 거였어.
헤일리, 너도 그걸 알고 있었구나.
그녀는 독대를 하다 말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시각,국왕은 왕후와 공작의 독대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내는 늘 어른스러웠지만,과 거 이야기를 하면 버림받은 어린 아이가 되곤 했다. 그는 왕후가 또 상처를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 했다.
감시는 보호로 변한 지 오래 였다.
그러나 제이드가 들고 온 대화록에는 국왕의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공작이 그랬다?”
“……왕후 페하께서도 알고 계셨던 둣합니다.”
로더릭은 굳은 얼굴로 한동안 대화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재의 생각과는 달리,국왕은 본인이 그녀에게 표를 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사,정치적 계략 같은 것들 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기때문이다.
그는 그날 보고를 받자마자, 이재에게로 향하는 조급한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마를 감싸쥔 채 고심하던 국왕은 한숨을 쉬며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뇌는 길어졌다.
어느덧 창밖으로는 해가 뉘엿뉘 엿 지고,날이 저문다.
로더릭은 그 석양을 바라보았다.
계속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장이 그를 부르려고 했을 때,국왕은 말했다.
“덮어라.”
“……폐하.”
“우선 묻으라고.”
제이드는 동의할 수 없어서 고 개를 저었다.
“폐하, 이건 그럴 만한 사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반왕파를 찍어 누를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들쑤시면 왕후가 함께 다친다.”
“……폐하,대화록을 보면 아시겠지만,왕후 폐하께서도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국왕도 알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왕후였다.
로더릭도 그 사실이 못내 마음 이 쓰였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를 감싸야만 했다. 아내를 보호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럼 왕후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냐. 그때 왕후 나이는 열 아흡이었다. 성에 찾아와 나한테 접견 요청을 하고,자기 아버지를 밀고라도 했어야 한다는 건가?”
“……원칙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로더릭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그 애가 왜? 왕후의 유일한 잘못은 그 집에서 태어난 것뿐이다. 심지어 잘못도 아니고,그건 그냥…… 내 아내의 불행일 뿐이었다.”
“폐하”
로더릭은 말을 하다가 점점 화 가 나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럼 너는 지금 나보고 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
“이 건은 함구해라.”
로더릭은 보고서를 서랍 안에 처박고 열쇠로 잠가 버렸다.
데보라가 국왕을 찾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