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57)
마음이 이끄는 대로-57화(57/134)
#57.
곤혹스러운 상황 끝에 이재는 결국 술 한 병과 잔 하나를 받아 올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당황했지만, 그녀는 한참 뒤에는 피식 웃었다.
‘그런 오해를 받고 있었구나.’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국왕은 가끔 자기주장 강한 신체 일부때문에 난감해할 때가 있었다. 그 러면서도 되도록 그녀와 함께 자 려고 들었다. 낮에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손끝이라도 닿아 있고 싶어했고, 다정하게 안아 주곤 했다.
하지만 하지도 않은 일로 이런 오해를 받으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혹시 내가 신경 쓸까 봐 그런 건가.
이재는 잠들어 있는 국왕을 힐 끔 봤다. 그리고 픽,웃었다.
참 알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야.
다시 창가로 걸어간 이재는 창 문 옆에 있는 액자 뒤편을 더듬었다.
그녀는 흠, 심호흡한 뒤 부 적 하나를 떼서 결계를 열었다.
손짓으로 술귀신을 부르자, 희미한 형체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렇지만 갈망을 참기가 힘들었는 지 창을 투과해서 들어온다. 그녀 는 곧바로 결계를 닫아 버렸다.
술귀신은 주눅 든 얼굴로 이재 와 로더릭을 번갈아 가며 힐끔거 렸다.
초라하게 굽은 어깨는 그다 지 위협적인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재는 저런 유형의 귀 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독해진다. 아직까지 힘을 얻지 못한 건,로더릭의 곁에 대체로 그녀가 있었 고 그 또한 잘 견뎌냈기 때문이 었다.
“폐하한테 관심 끄고, 이쪽으로 와.”
그가 여전히 머뭇거리자,이재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술로 인생 망쳤다고,멀쩡한 남의 인생까지 망가뜨릴 셈이야?”
그녀가 침착하게 말하자,술귀신은 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이 대치하고 있을 때 였다.
-이재. 이 방에 그만 좀 불러들여. 잠 좀 편하게 자자.
함의 정령은 금이 간 궤에서 나오며 하소연을 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벌벌 떨던 정령은 이 방이 꽤 안전하다는 걸 깨달았는 지, 점점 기세등등해지고 있었다.
“……참 팔자 좋은 소리 한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야. 나도 좀 편히 자고 싶어. 그리고 네가 정말 잠을 자긴 하는 거니?”
-역시 안 속네.
정령은 누군가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 언젠가 국왕이 이재에게 했던 말이었다.
얄미워서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이재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이재는 아직도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술귀신을 붙잡아 방바닥 에 늘러 앉혔다.
에휴, 얘 손 떠는 것 좀 봐.
그녀는 들고 온 술잔과 독주를 바닥에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 술을 사이에 두고 술귀신과 마주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의식에 앞서 그녀는 함의 정령에게 말했다.
“넌 이제 빨리 들어가 있어.”
-어딜.
“어디긴 어디야. 다 허물어져 가는 네 집이지.”
-왜에. 화났어? 내쫓지 마. 나도 같이 놀래.
지금 위험한 거 잘 모르겠니?
이재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고,그사이 정령은 유심히 그녀의 자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곧 잘 인간을 흉내 내곤 했지만,가부좌만큼은 어려워했다.
정령이 어설프게 따라 앉자,이재는 혀를 차며 술귀신을 마주했다.
“너,대체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사람 신경 쓰이게.”
“………….”
“내가 너랑 이렇게까지 구면이어야겠어?”
술귀신이 몸을 덜덜 떨며,중얼 거리자 이재는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몸을 움직여야 숙취가 해소된다고?”
“너 아직 인세의 사고를 전혀 못 벗어났구나?”
너무 황당했던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의식 쉽지 않네.
키득거리며 웃던 함의 정령은 이재,때려 버려! 외쳤다.
하지만 그녀가 방해하지 말라고 흘겨보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재는 앞에 놓인 술을 한 잔 따랐다.
무속인이 의식 도중 술을 마시는 건 영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한 잔 따라서 영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유심히 영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죽은 지 오 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원 귀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을 피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대체로 술귀신들의특성이긴 했다.
“너도 네 힘으로 저 사람 어떻 게 못하는 거 알지.”
-…응”
“원귀가 이렇게 수십이나 한꺼 번에 붙지 않았으면,저 사람은 원래 너 같은 잡귀한테는 끄떡도 없는 사람이야.”
이재는 귀신 앞에 놓았던 잔을 본인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술을 따라 귀신 앞에 놓아 주었다.
멸해야 할까,설득을 해야 할까.
사실 그녀가 술을 받아 온 순 간부터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다.
“나,너한테까지 쏟을 힘 없어. 그리고 너를 그다지 내 손으로 멸하고 싶진 않아.”
그녀와 국왕의 방 앞에는 훨씬 지독한 원한을 가진 대기자들이 매일같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러니까 몇 잔 마시고 가자.”
“네가 죽은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고,한이 아주 깊진 않은 것 같아서 이렇게 하는 거야.”
이재는 그 뒤로도 술귀신과 술 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물론 모 르는 사람이 봤을 땐,열심히 자작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넉 잔쯤 마셨을 때에도 원귀의 기운은 변함이 없었다.
한이 전혀 안 풀리네. 이게 아 닌가. 이재는 다시 한번 유심히 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어디 묻혔어?”
중독된 사람처럼 눈알을 여기저 기 굴리던 영가는 중얼거리듯 말 했다.
-벨파스턴 거리 공동묘지.
“정확히 어디?”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니까 그 냥 말해. 참 이상하네. 넌 원귀가 뭐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어.”
입구에서 세 번째.
“세 번째 묘지?”
_ 응.
좀 낯선 지명이었지만,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찾아오는 사람은 있고?”
그런데 그 순간,술귀신은 한과 분노가 올라오는 둣 몸을 아까보다 더욱 떨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었지만,그가 한을 품은 귀신이었기 때문에 기세는 달랐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이재 는 옴찔하면서도 재빨리 명치에 손가락을 얹었다.
‘강심수정. 강이 깊으면 물이 고요하다. 다스려라,영이여.’
그녀는 기를 모아 귀신의 이마 를 툭 쳤다. 그러자 영가는 다소 나마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재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말로란 사실,뻔한 것이다.
그들은 살아서는 점점 혼자가 되고, 결국에는 죽어서도 혼자다.
생각보다 쉽게 갈 것 같지 않은데,어쩌지. 멸해야 하나.
원귀를 대할 때는 퇴마자의 태 도가 명확해야 한다.
안 그러면 휩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 리 고민이 끝나지 않아서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멸해야겠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 않는 건,한은 느껴져도 큰 죄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마음을 정한 이재는 말했다.
“너,지금 이거 나한테도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야.”
“………….”
“내가 사람을 시켜서 네가 묻힌 곳에 술을 한 잔 올려 줄게.”
“………….”
그래, 이 세계에 제삿밥은 없겠지만,가기 전에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럼 너도 한을 털고 곱게 가는 거야.”
“………….”
“할 수 있겠어?”
원귀는 대답하지 않고,퀭한 눈 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이건 괜한 짓일지도 모른다. 술은 분노와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왕은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런 애들한테 기회를 줘서 뭐 할 건데.
옳은 말이다. 본인의 인생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저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가를 여기서 내보내 주면 또다시 구천을 배회할지 모르지.
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이재는 말했다.
“살아서 못했으면,죽어서라도 한번 해 봐.”
“………….”
“년 아직은 성불할 기회,남아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
“내가 여기서 같이 빌어 줄게. 약속할게.”
그런데 그 순간 영가는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눈 을 크게 뜬 이재는 서둘러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곧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주문도 외지 않았는데 영의 몸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쌓여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소리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재는 살짝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는 벌벌 떨면서 눈물을 주룩 주룩 쏟고 있었다.
서러운 둣 바 닥을 짚고 엎드린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지켜보던 이재는 곧 그 해답을 깨달았다.
저 영가에게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술보다 필요했던 게 있었다.
너,할 수 있다는 응원과 자신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 그는 그걸 깨달았으나 이미 너무 늦어 버렸기 때문에 한으로 남은 것이었다.
어쩐지 조금 짠해진 이재는 영 가에게 마지막으로 술잔을 올려 주었다.
“잘 가. 고생 많은 삶이었겠다.”
“………….”
“네 무덤가에는 술 대신 꽃을 올려 줄게.”
-……고마워.
이재는 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 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다른 사람의 사연을 짊어지면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이재 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정 좌하고 눈을 감았다.
할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어.
영안을 가지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건 너무 많은 것 같아.
나는 어쩌면 이 눈 때문에 세 상을 더 속단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기가 찬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함의 정령은 무릎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또 그녀를 따라 하고 있었다.
이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너 말이야.”
_응!
“자꾸 이런 식으로 정신 산란하게 하면, 집에 있는 부적 다 뜯어 가 버릴 거야.”
-……이재는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잖아.
“그럼 안 먹고 안 자고 일하는 삶을 살게 해 줄 거야.”
-너무 잔인해.
으음, 아니야. 네가 읽어 줄 게 굉장히 많아.
이재의 얼굴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정령은 잔뜩 기가 죽어서 함 속으로 숨어 버렸다. 이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의 이상을 느 낀 건 가부좌를 풀고,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핑그르르 도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잠시 당황했다.
“어어?”
뭐지? 나 지금 좀 어지럽네?
그녀는 일단은 술병부터 치우려 고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이었다.
“히꼭? 끅……!”
갑자기 딸꾹질이 올라오기 시작하자,이재는 이번에는 입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고난은 겨우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국왕이 침 대에서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그 가 잠결에 옆자리를 더듬는 것을 본 이재는 기함했다.
마음이 몹시 조급해진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 가 얼른 물부터 따랐다.
내가 또 이럴 때 기가 막힌 민 간요법을 알고 있지. 상체를 앞으 로 푹 수그린 그녀는 그대로 물을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이건 겨우 불행의 서막이었음을 알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헤일리.”
물을 큼,하고 뱉을 뻔한 이재는 귀신과 대적하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걸 삼켜 냈다.
이재가 침대 쪽을 바라보았을 때는 국왕이 아직 잠에 취한 눈으로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