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71)

마음이 이끄는 대로-71화(71/134)

#71.

접견을 가려던 로더릭이 산책에 서 돌아오던 이재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평소라면 반가웠겠지만, 로더릭은 지금 이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재가 빙긋 웃으며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멈춰 섰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더욱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쓸쓸 해졌다.

그래. 내가 너랑 강제로 결혼을 했다. 싫다고 물에 뛰어든 사람을 협박해서. 그런 주제에 네가 좋아 져서 질투를 하고 있다. 네가 하지 말라는 짓도 했다. 네가 사랑 하던 사람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나 참 한심한 놈이지.

그런데 너도 조금 더 태도를 분명히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갑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 는 격한 감정을 참지 못했다.

“해일리.”

“네?”

“보도르국에서 국혼 제의가 있었다.”

“……네?”

“너도 그런 말을 들으면 싫기는 한가?”

유치한 질투였다. 간혹 그런 것이 유효하게 작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는 그 런 밀고 당기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도 있다는 것이다.

이재는 그런 감정을 유발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중혼은 법으로……”

혼란스러운 듯 횡설수설하던 이재는 순간 멈칫했다.

‘나 혹시 또 버림받는 건가.’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라는 게 있다.

이재의 진짜 트라우마는 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트라우마는 버림받는 것이었다.

갑자기 목구멍에 싸한 게 올라 오더니 오그라 붙는 기분이 든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재는 어쩔줄 몰라 하며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폈다 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둣 로더릭을 노려보았지만，이내 주눅든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 었다.

이럴 거면 왜 내 편에서 싸워 준다고 했나요. 왜 나한테 잘해줬어요?

로더릭은 그 모습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배덕한 만족 감이 든다.

로더릭은 자신이 최악의 남자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확인받고 싶었다. 네가 지금 사랑하는 건 내가 맞지 않냐고.

“싫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이재는 고개를 들었다.

“싫으면요?”

“……네가 싫으면 하지 않는다.”

이미 일축했지만, 그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재는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괜찮으면요?”

“………”

“그럼 하실 건가요?”

로더릭은 조금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점점 공격적인 눈빛을 했다.

어린 짐승은 최선을 다해 자기를 방어하고 있 었다.

“그런 거라면 하시면 됩니다. 뜻한 대로 하세요.”

이재는 그렇게 말하고，그를 등 지고 섰다.

걸어가려던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것은 로더릭이었다.

그는 거칠게 그녀를 돌려세웠다.

“넌 그게 정말 괜찮다는 건가?”

이재의 눈빛은 싸늘했다.

“제 의견이 왜 궁금하신가요? 싫고 좋고，하고 말고는 폐하가 정하시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절 떠보지 마세요. 이런 선택권까지 저한테 떠넘기시는 건 비겁한 짓입니다.”

이재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흔들었지만，그는 놓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원망과 분노를 느 낀 이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 했다.

“폐하，버림받는 사람한테는 원래 선택권이 없는 겁니다.”

“………”

“버리면，그냥 버려지는 겁니다.”

“………”

“지금 저한테 내가 널 버릴까 말까 물어보신 거라면 폐하는 정말로 잔인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돕는 것은 쉬워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의 손을 마주 잡기는 어려웠어요.

또 더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그 사람이 내 손을 떨쳐 낼까 봐.

아무리 씻어도 사람들은 절 더럽다고 했어요.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제가 당신한테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할까요? 이 손을 놓지 말아 달라고 애원해야 하나요? 아니요，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왕후의 어조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나 가여워 보였던 것이다. 듣는 사람들까지 함 께 상처를 받는 기분이었다.

로더릭은 격해지는 감정을 억누르며 호소했다.

“그냥 한 번만 싫다고 말해 줄 수는 없는 건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

“넌 이거 해라，저거 하지 마라, 그런 소리는 잘도 하면서 왜 이건 하지 말라는 소리를 못하는 건데!”

하지만 그 순간 이재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다.

내가 당신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로더릭의 손가락올 떼어 냈다.

미약한 힘이었지만，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애를 쓰는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있었다. 그래서 로더릭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이런 소리 안 하는 여자분 만나서 행복하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뭐?”

차갑게 말한 이재는 그를 등지고 걸었다.

그리고 조금씩 빨라지던 걸음은 마침내 뛰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차마 국왕을 노려볼 수 는 없어서 시종들만 열심히 노려 보았다. 그리고 왕후를 쫓아가기 위해 뛰었다.

국왕은 우두커니 서서 이재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면 다 바보가 된다더니.

제이드는 국왕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열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보.

왕후는 한 번 밀어 보면 카이엔 국경까지 밀려날 사람이라고 말한 건 국왕이었다.

그런데 석 달간 안간힘을 다해 서 거리를 좁히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왕후를 밀어 버렸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로더릭은 자괴감을 느꼈다.

그는 거친 욕설을 뇌까리며,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호숫가로 온 이재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왕후가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기사들과 시녀들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이재 곁을 지키고 있는 건 소년왕이었다.

이재가 계속 울기만 하자, 그는 난감해했다.

-그만 울어.

“………”

-아，나 우는 여자 잘 못 달래

“달래 달라고 한 적 없어요. 혼 자 있고 싶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할 말 없어요.”

소년왕은 난처한 둣 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좀 이해해. 그 자식이 연애를 많이 안 해 봐서 그래.

“난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그랬어? 어쩐지.

“어쩐지라뇨? 지금 굉장히 불쾌 했어요. 그래도 뭐，저도 좋아해 본 사람은 있었어요.”

-그 얘긴 로더릭한테 하지 말고. 또 눈 뒤집힐라.

이재는 이름만 들어도 우울한 둣 눈을 내리깔았다.

소년왕은 슬 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갠 그냥 지금 네가 너무 좋아서, 안달이 나서 그러는 거야.

“………”

-진도는 더 나가고 싶은데 그 건 맘 같지 않지. 다른 놈은 옆에서 자꾸 얼쩡거리는데 너는 볼 때마다 울지. 나야 알지만，로렌스를 대하는 태도가 남들 눈에 애매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거야.

“………”

-게다가 네가 비밀이 좀 많아야지. 그러니까 개도 정신이 살짝 돌아 버린 거야.

“………….”

-그냥 좀 긍홀하게 여겨 줘라.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소년왕은 또 습관적으로 후손 편을 들었다.

이재는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힘 빠진 얼굴이었다.

소년왕은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근데 네가 좋아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나같이 잘생긴 귀신도 마다한 네가 좋아했다고 하니까 궁금해지네.

이재는 픽, 웃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은 금세 따뜻해졌다.

“뭐 별건 없고. 나도 어린 마음에 순수할 때라.”

“어느 날 제가 살던 곳에 저랑 비슷한 사람이 들어왔거든요. 절 키운 사람이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라，좀 가르침을 받겠다고.”

박수라는 뜻이다.

이재가 살던 신당에는 종종 그렇게 무속인들이 드나들곤 했다.

“근데 죽었어요. 자기 분에 넘 치는 일에 손을 대서. 워낙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어려운 사람들은 다 도와주고 싶어했거든요. 바보같이. 멍청이라서.”

“그 사람이 사실은 다리가 좀 불편했거든요. 날 때부터 그랬대요. 자세히 보면 다리를 조금 절었어요. 저는 그래서 더 마음이 간 것 같아요. 불운을 안고 태어났다는 게 나랑 뭔가 비슷한 것 같아서.”

“그 사람 몸이 불편하니까 뭔가 를 대신해 주면서 좀 으쓱하기도하고，어쩌면 어린 마음에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몰라요. 저 좀 못 됐죠?”

이재가 웃으면서 묻자，소년왕 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 사람이 좀 불쌍하게 가고 난 다음에 제가 산에서 다리를 심하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거의 한 달을 못 걸었어요. 그러다가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돼서 마을에 내려가 봤어요. 그동안은 걷질 못하니까 답답했고，다시 걸을 수 있는 게 마냥 신이 났거든요.”

“와，그런데 놀라운 건，세상엔 나보다 천천히 걷는 사람이 아무 도 없더라는 거예요.”

모두가 그녀를 추월하며 지나갔다. 회복되지 못한 다리와 느린 걸음으로는 횡단보도의 녹색 신호조차도 맞출 수 없었다.

그때 이재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상은 보통과 평균에 맞춰져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자신처럼 그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때 그 사람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 사람은 한 번도 저한테 천천히 걸어 달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미안했어요. 저는 걷는 속도 하나도 맞춰주지 못하면서 그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좋아하고 있다고 자만한 거죠.”

-넌 뭐 이렇게 인생사가 다 우울하냐.

이재는 픽 웃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더 우울한 얘기 하나 해 줄까요?”

-네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 해 봐.

“사실요.”

-응.

“저는 지난 생에서 물에 빠져 죽었어요.”

소년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꾸 보고 있는 거로군.

“뭐，그런 것도 없진 않고요.”

이재는 어릴 때부터 물가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영산 할매는 본인 목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을 굉장히 아끼고 손님도 가려 받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에게는 몇 번 이나 물가를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이재는 영산 할매가 하는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뒤로 늘 물을 피해 다녔다.

바다는 꿈도 꾸지 못했고, 산에 있는 계곡에 발 한번 담그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영산 할매가 죽고 얼마 뒤，산에서 내려온 이재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전복된 버스는 깊은 강물에 잠겼고, 그녀는 그때 얼마나 허망했는지 모른다.

인생의 작은 사고는 피해 갈 수 있지만，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는 바끌 수 없다는 절망감.

“어쩌면 제 인생은 구제되지 않는 건지도 몰라요.”

“………”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강이재.

소년왕은 부정했지만，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 지쳐서 체념했나.”

그 말을 끝으로 이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소년왕은 드물게도 계속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한참 동안 호숫가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던 이재는 밤늦게 처소로 돌아왔다.

부부 싸움을 거하게 한 신혼부부는 오랜만에 각방을 썼다.

국왕은 본인의 방에서 잠을 청했고，그 밤은 둘 모두에게 불면의 밤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왕후의 처소 앞에서는 보기드문 풍경이 펼쳐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