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73)
마음이 이끄는 대로-73화(73/134)
#73.
왕후가 오랜만에 접견 일정을 잡자,귀족들은 몰려들었다.
사실 많은 귀족들은 알고 있었다.
나이가 많고 경륜이 깊은 귀족들은 훨씬 일찍 알아보았다.
왕후는 남의 말을 잘 들어 주 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언을 하는 것은 조심스러워했다.
민감한 화제라고 생각되면,바로 측근들을 내보냈다. 그러니 소문이 나는 일도 없었다.
이기적이란 걸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본인 마음이 편해지고 싶을 때 왕후를 찾곤 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차례를 기다리는 접견줄은 길었다.
평소와 유 일하게 다른 점은 접견장 앞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국왕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귀족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지?”
기사단장은 목을 긁적였다.
“이게 그나마 일정을 조율해서 받으신 거랍니다.”
“이게? 어딜 봐서.”
그러자 옆에 있던 시종장도 말을 보탰다.
“시녀장이 너무 사사로운 안건은 중간에서 잘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시녀장도 욕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데보라는 시종장의 경쟁자였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직업 윤리가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인상을 썼다.
“이런 식이면 왕후가 너무 힘들지 않나.”
“그렇긴 한데…… 사실 지금도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나도 못 만나는 왕후를 만나면서, 왜 이렇게 당당한 건가? 다들 왕후한테 뭐 맡겨 놨나?”
제이드는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맙소사,하는 마음.
그러니까 말입니다,납득하는 마음.
근데 이러실 거면 조금만 더 잘하실 순 없었습니까? 하는 반응
하지만 오랜만에 공식일정을 시작한 왕후를 만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왕마저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바로 전에 들어갔던 귀족이 접견장을 나왔다.
로더릭은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무릎 으로 툭 쳤다.
“뭐 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들어가.”
그는 얼른 들어가려고 했지만, 로더릭은 갑자기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아니다. 왕후도 쉬어야 하니까 조금만 있다 들어가.”
“……예.”
“물이나 한 잔 마셔라.”
로더릭이 시종이 바친 물잔을 내밀자, 귀족은 굽신거리며 받았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죄송하다 고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그때 데보라는 굉장히 도도한 얼굴로 나왔다.
그 표정에 담긴 미묘한 우월감올 알아보는 사람은 시종장밖에 없었다.
시종장은 보기 드물게도 인상을 찌푸렸다. 좀 언짢았기 때문이다.
왕후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국왕이었다.
끝날 때까지 기 다리겠다고 말한 것도 국왕이었다.
하지만 성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융통성이라는 게 있었고,시녀장은 고지식한 이가 아니었다. 국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밖에 세워 두는 것에는 아무리 봐도 고의성이 있었다.
시종장은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우리 사이에는 전우애도, 의리도 없냐? 난 좋은 소리만 해 줬구만.
성격도 얼굴의 반만큼만 써라. 저 독하디독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나 데보라는 이쪽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로 밀어붙였다.
난 폐하가 잘못하셨다고 생각 해. 왕후 폐하가 상심하셨으니까, 그냥 폐하가 다 잘못한 거야.
왕궁과 왕후궁은 매번 기 싸움을 하고 있었고,그녀는 사실 시종장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조각상을 붙일 기회를 가로채 간 것에 대한 복수였다.
“왕후 폐하께서 왜 아무도 안 들어오냐고 물으십니다. 해 지기 전엔 끝내고 싶으시답니다.”
로더릭은 잡고 있던 귀족의 뒷덜미를 놓았다.
“빨리 들어가라고. 왜 그러고 있어?”
국왕이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접견은 그 뒤로 한 시간 정도 더 이어졌다.
사실은 평소보다 빠른 진행이었다.
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에 다들 심적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재가 나왔을 때,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국왕은 바로 섰다.
움찔한 이재는 원망 섞인 얼굴로 데보라를 바라보았다.
왜 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냐는 의미였다.
데보라. 우리가 정말 손발이 맞는 게 확실한 거야? 난 데보라를 많이 믿었는데 이러기냐고.
나는 아직 저 사람의 얼굴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갓 결혼한 신혼부부보다는 잘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고,부부 싸움은 길어져 봐야 하등 좋을 게 없었다.
시녀장은 시선을 회피해 버렸 고, 이재를 살피던 로더릭은 눈썹 끝을 긁적였다. 조금 머쪽해하는 얼굴이었다.
“잘 지냈어?”
이재는 난처한 기분에 우물쭈물 했다.
로더릭은 답변을 기다렸으 나, 그녀가 말이 없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랑 말하기 싫어?”
“………”
“나 많이 미워져 버렸어?”
이재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가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자, 로더릭은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재의 손목을 잡고 두어 번 흔들었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 도 솔직한 사과뿐이었다.
“해일리, 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용서해 줘라. 잘못 했어.”
“……아네요. 정말로요.”
너무 작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목소리를 들은 로더릭은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았다.
그럼 눈 좀 마주쳐 주면 안 되겠 냐고 애원하고 싶었다.
“버릴지 말지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어.”
“………”
“내 손을 조금만 더 꽉 잡아 달라고…… 빈 거다. 표현 방법이 잘못됐다.”
이재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울 컥한 얼굴을 했다.
어디 새어 나 가지 않도록 꽁꽁 묶어 놓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로더릭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려고 했다.
로더릭은 놓고 싶지 않았지만, 이재가 또 입술을 깨물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망설이던 이재는 그를 등지고 섰다.
그리고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난감해진 로더릭은 다 시 눈썹 끝을 긁적였다.
그는 어 떻게 해야 저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어 볼 수 있나 고민하며 뒤를 따랐다.
하지만 로더릭이 계속 따라오 자, 이재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급기야 그녀가 뛰기 시작하 자, 당황한 로더릭은 손목을 잡으 려 했다.
사실은 뛰어 봤자였고,그는 분명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래도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망설이던 손을 이내 거두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도망치듯 달리던 그녀는 과당,넘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무 세게 넘어진 나머지무릎이 다 깨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국왕이었다.
“어…… 어떡해. 그러니까 왜 뛰어.”
“………”
“괜찮아? 좀 봐.”
로더릭은 얼른 무릎을 굽히고 앉았으나,곧 말을 잃고 말았다.
발목을 접질린 이재가 계속 일어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번을 넘어지면서도 절뚝거리며 도망가려고 했다. 그를 피해서.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 했다. 명백한 거부였다.
로더릭은 너무 서운해서 가라앉은 눈을 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로렌스,그 새끼를 열 대 펠 거, 한 여덟 대 정도만 펠 걸 그랬네. 내가 너무 잔인했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피해서 도망가는 게 이렇게 큰 상처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착잡한 얼굴로 이재를 바라보던 로더릭은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제이드.”
“예,폐하.”
“네가 나 대신 왕후 좀 들어서 방에 데려다줘라.”
“……예.”
“의원 꼭 부르고. 아무래도 접 질린 것 같다.”
“예,알겠습니다.”
지금 국왕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던 제이드는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재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왕명을 어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기사단장은 몇 번이나 양해를 구하고 이재를 안아 들었다.
거부당한 로더릭은 더는 다가가지 못하고,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 없이 바라보았다.
이재는 그 뒤로도 표가 나게 로더릭을 피해 다녔다.
그를 보는 게 몹시 어색했고,조금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겁이 났다.
누군가가 들추어낸 해묵은 상처와 자신의 민낯은 자신이 보아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왕후가 공식 일정까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제는 다시한번 서부군에 자원했고,국왕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차출했다.
그리고 출정식 당일,사람들은 굉장히 진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국왕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이재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그녀를 계속 보고 있던 로더릭은 슬쩍 다가섰다.
“잘 잤어?”
“……네.”
“발목은 괜찮은 건가? 의원이 괜찮다고는 하던데.”
“……예.”
늘 사이좋게 찰싹 붙어 있던 신혼부부는 어색해 보였다.
이재는 시선을 떨구었고,로더릭은 계 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재는 그가 자꾸 쳐다보는 게 불편해서 또 한 번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왕제와 조금 대화를 나 누다가, 왕제의 벗에게도 말을 걸 었다.
지난번에 느꼈던 불온한 기 분을 좀 해소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재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무안해진 이재는 괜히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 불편해진 건 기사들과 병사들이었다.
국왕이 계속해서 그녀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왕은 거의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좋아하는 여자아이한테 어떻게 하면 말 한번 붙여 볼까,전전긍긍하는 사내아 이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왕제와 병사들이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얼른 처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발목이 다 낫지 않아 걸음은 몹시 느렸고,로더릭은 이번만큼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 었다.
로더릭은 이재의 손목을 잡았다.
꾸물꾸물 손을 떼어 내려던 이재는 힘으로 되지 않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 좀 놔주세요.”
“손 좀…… 놔달라고요.”
“싫어. 그럼 또 도망갈 거잖아”
로더릭은 이재의 앞으로 와서 허리를 숙였다.
“나좀 봐 줘라.”
“응? 내 얼굴 한 번만 봐 줘. 눈 보고 얘기하자.”
이재는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떨궜다.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 줄 거 야?”
깜짝 놀란 이재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세요. 그런 거 정말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내 사과받아 줄 거야?”
“……폐하가 사과하실 건 없는 데요.”
“아니다. 내가 맘에도 없는 소 리를 했다. 일거에 잘랐는데, 그 냥 좀 질투가 나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로더릭은 말로, 표정으로 계속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 사과는 의도한 방향대로 전해지 지 않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이재는 입을 열었다.
“폐하.”
“응?”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페하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돼요. 필요한 일이면 하시고…… 제가 성을 나가야 될 때가 오면,그것만 알려 주세요.”
로더릭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나가긴 어딜 나가!”
“………”
“아,안 돼. 제발.”
“………”
“헤일리,나 밀어내지 마.”
하지만 이재는 기죽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로더릭은 정말로 애가 타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내가 진작에 마음 정리를 끝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문을 강제 로라도 뜯고 들어가서 바로 사과를 했어야 했나.
로더릭은 이재의 양 뺨을 그러 쥐었다. 그리고 억지로 고개를 들 게 했다.
이재의 동공은 여기저기를 방황 했지만,그는 끈질기게 눈을 마주 치려고 들었다.
“이러지 마. 내가 어떡할까. 응?”
“………”
“미안해. 사과 좀 받아 줘.”
“사과하실 것 없다니까요.”
“아니야. 그날은 내가 실언했어. 못난 짓이었다. 잘못했다.”
국왕은 이재가 받아 줄 때까지 몇 번이라도 사과할 기세였다.
결국 이재는 마지못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너 무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를 통해 확답을 듣고 싶었다.
“마음 푸는 거지? 대답 좀 해라.”
“……네.”
이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로더릭의 불안감은 전혀 가 시지 않았다.
아내가 농담은 잘해도 빈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진짜로 성을 나갈 생각까지 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풀어 줄까, 다시 날 봐 줄까 전전긍긍하던 그는 이재에게 자상하게 물었다.
“식사 안 했지?”
“예.”
‘그럼 같이 먹자.”
“너 좋아하는 거 잔뜩 먹으러 가자.”
이재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평소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걷자, 아직 걸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 낀 로더릭은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웠다.
그리고 달랑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채 호송되던 여우는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로더릭은 그게 또 소중하고 애틋해서 뺨에 쪽,입을 맞추었다.
뭐가 가장 먹고 싶냐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