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74)
마음이 이끄는 대로-74화(74/134)
#74.
국왕은 시종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대부분 메뉴에 관한 것들이었다.
사실 로더릭은 이재의 식습관이 썩 탐탁하진 않았다.
여우는 분명 잡식성일 텐데, 그의 살구색 여우 는 식성이 거의 초식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왕후가 검은색을 보고 하얀색이라고 해도, 네 말이 다 옳다고 해 줘야 할 때였다.
이재의 앞접시에는 금세 샐러드 와 과일이 듬뿍 쌓였다.
“자,너 좋아하는 거 마음껏 먹 어.”
“폐하도 드세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이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거리감을 둔 태도에 로더릭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고,이건 그가 지고 가야 할 업보였다.
“헤일리.”
“네?”
“제대로 화낼 줄은 아냐고 했던 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
“너 화나니까 진짜 무섭더라. 나 울 뻔한 거 아나?”
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저 화 안 났어요.”
“근데 왜 자꾸 눈을 피해.”
“만나 주지도 않아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남편이 허튼소리 를 하면,발로 까거나 혼을 내야지 피하면 어떡해.”
“제가 폐하를 어떻게 혼내요. 가끔 이상한 소리해,정말.”
그런 것치고는 발끈해서 날카롭 게 쏘아붙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창피했던 이재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식사에 집중했다.
국왕은 계속 이재를 주시하며, 그녀의 식사를 챙겨 주었다.
하지 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많이 먹지 는 못했다.
로더릭은 조금 깨작거 리고 마는 게 또 탐탁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체구가 저렇게 작은데,더 들어 갈 구석이 없을 것 같긴 했다.
“좀 더 먹어.”
“다 먹었어요.”
“그래도. 많이 먹고 배 빵빵해 지면 두드려 줄게.”
그 말에 이재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리고 아내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미소 짓자, 로더릭은 더 안달이 나는 것을 느꼈다.
국왕은 지금 상심한 아내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 는 한 명의 남편일 뿐이었다.
로더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재 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한 모금 마시고 방치한 음료를 마셔 보았다.
“별로 안 단데. 이 정도도 입맛에 안 맞나?”
“아니요. 맛있어요.”
“그럼 이거라도 다 마시자.”
“이 정도는 먹어야 너도 움직이고 살 거 아냐.”
마음 써 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재는 결국 남은 음료를 꼴깍꼴깍 마셨다. 그걸 웃으며 보고 있던 로더릭은 장난을 빙자한 수작을 걸고 싶었다. 화해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받아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배 빵빵해졌나 보자.”
로더릭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배 를 콕 찔렀다.
이재는 움찔했지만,그는 이번에는 어린 여우의 배를 조몰락거렸다.
그것 조금 먹었다고 빵빵해질 리야 없었지만, 복근이 하나도 없는 배는 단단한 그의 것과는 다르기만 했다.
이재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몰랑한 감촉이 좋아서 피식 웃던 로더릭은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았다.
“키스해도 되나?”
“………….”
“안 내키면 말하고.”
이재는 머뭇거렸지만, 로더릭은 그녀의 코끝을 깨물고 뺨을 핥았다.
이재의 목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꼭 맹수를 앞에 두고 궁지에 몰린 어린 짐승 같았다.
로더릭은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고, 그녀는 점점 의자에 눕듯이 앉게 되었다.
제이드와 시종장은 시선을 마주 했다.
왕은 오늘도 키스를 하는 게 아니라 왕후를 후식 삼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꽉 감고 있던 왕후는 어느새 녹아서 추욱, 늘어져 버렸다.
왕후 폐하, 설마 액체가 되신 겁니까.
흐물흐물해진 이재를 다시 반듯 하게 앉혀 준 로더릭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겼다.
“헤일리.”
“네.”
“오후에 뭐 해?”
“뭐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럼 나랑 데이트 좀 해 줘.”
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일어섰다.
그 걸 조금 섭섭하게 바라보던 로더릭은 그녀의 골반 쪽에 팔을 감아 달랑 들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이재는 헛웃음을 홀렸다.
“폐하,저 별로 세게 안 넘어졌어요. 다 나았고요.”
“다 낫긴. 내가 네 걸음걸이도 모를 것 같나?”
“괜찮으니까 내려 주세요.”
“싫어.”
“………….”
“그러게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누가 그렇게 넘어지랬나? 나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뻔했다.”
“미안하다고 하셔 놓고,되게 뭐라고 하시네.”
이재가 중얼거리자 로더릭은 픽,웃었다.
“나도 속상하고 맘이 안 좋아서 그래.”
그는 한 팔로 여유롭게 그녀를 추켜올리며,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전혀 무게감올 느끼지 못하 는 얼굴이었다.
한참을 걷던 로더릭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데려갈 만한 곳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호수와 아서의 숲의 기로에 서 있던 그 는 곧 호숫가로 마음을 정했다.
그저 느낌일 뿐이지만,아내는 숲보다는 물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건 사실 매우 정확 한 판단이었다.
호숫가에 도착한 로더릭은 이재 를 화단에 앉히고,턱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멀어지자, 그녀의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걷었다.
“뭐,뭐 하시는 거예요?”
당황한 이재는 드레스 자락을 끌어 내렸지만,그는 놓지 않았다.
팔랑이는 드레스 끝자락은 무 릎쯤에 가서야 멈추었다.
그는 희미하게 멍이 남아 있는 이재의 무릎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가 단지 상처를 확인해 보려 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재는 무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상태를 조금 더 확인하듯 가느다란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통증을 느낀 이재가 얼굴을 찡그렸다.
로더릭은 혀를 차며,드레스 자락을 다시 내려 주었다.
“정말 괜찮아요.”
“뛸 거면 넘어지지나 말던가.”
“………….”
“불쌍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로더릭은 한숨을 쉬었다.
왕후가 넘어지면,로렌스의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했는데 부러뜨려야 할 건 다름 아닌 자신의 다리였다.
가끔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아내의 말은 너무나 옳았다.
로더릭은 다시 그녀의 옆으로 왔고,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재는 계속 호수만 응시하고 있었고,로더릭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수없이 말을 걸고 싶었고, 예전처럼 농담도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또 말을 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지레 찔려서 불 안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왕후가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린 거면 어떡하나 싶어서 계속 속상했다.
가뜩이나 많은 비밀을 꽁꽁 안고 있는 사람인데,다시는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 봐.
물어볼 것이 많은데,다시는 신뢰를 얻지 못할까 봐.
네 이름은 정말로 이재인 걸까, 묻고 싶어. 하지만 누가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까.
로더릭은 무릎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툭,쳤다.
이재는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직도 덜 풀렸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다시 편하게 대해 줄 거야?”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곰곰이생각하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옆얼굴은 이미 많은 것을 소진한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한편으 로는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폐하.”
“응.”
“사실 아까 제가 했던 말,진심 이에요.”
“뭐가?”
이재는 호수처럼 고요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저도 그날 실언을 했습니다. 저도 사과드릴게요. 처음부터 양 가에 필요해서 진행된 국혼이었고, 이제 와 누가 누굴 원망하고 그럴 문제도 못 돼요. 죄는 던컨 가 쪽에서 먼저 지었고요.”
“………”
“저는 폐하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뭐?”
“저 신경 쓰지 말고,그게 필요 한 거라면 하시면 돼요. 만약에 그런 순간이 오면… 그땐 고민하지 말고 꼭 한 번만 먼저 말씀 해 주세요.”
로더릭은 당황해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왜 자꾸 그런 말을 해!”
“………….”
“헤일리.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잖아.”
“………….”
“아,제발.”
로더릭은 정말 애가 타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자신이 아내를 국경도 아니고, 세계 끝까지 밀어 버렸다는 사실을.
이 거리를 예전처럼 좁히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자신한테 잠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거였다.
“나 버리지 마라. 너도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 놨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
“나 너 없이 못 살아. 정말이다.”
아니요. 페하는 괜찮으실 거예요.
이젠 저 없어도 주무실 수 있고, 안전할 거거든요. 아마도요.
사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거의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이재가 희미하게 웃기만 하자, 로더릭은 그녀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뺨에 비볐다.
“우리 여행 가자. 신전도 좋고, 강가도,다른 데도 다 괜찮아. 넌 말만 해. 내가 다 데려다줄게.”
“………….”
“바람 쐬면 기분 좀 나아질 거 야. 친정에는 안 가고 싶을 거 아 냐.”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 갯짓을 보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로더릭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 놓지 말아 줘. 계속 내 옆에 있어 줘.
이재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다정하면서도 어색한 시간을 함 께 보낸 부부는 저녁 늦게야 처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 부부 싸음의 말로 가 정말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 지 않는구나,생각했다. 분명 화 해를 한 것 같긴 한데,둘의 온도가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왕후는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국왕 은 혼자 애타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말 한 마디 더 섞 을까,어떻게 하면 웃음소리 한 번 더 들어 볼까. 왕은 원래 왕후를 상대로는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이재의 방 앞에서 그는 물었다.
“또 키스해도 될까?”
“해 줄래?”
이재는 그의 옷깃을 잡고 끌어내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주자, 그녀는 입을 맞추며 허리를 끌어 안았다.
다정하게 안아 주는 손길 에 로더릭은 마음이 다 녹아내리 는 것 같았다.
그는 이재의 입술 을 매만졌다.
“내일도 만나 줄 건가?”
“그럼요.”
“약속 지켜.”
“뭐 그런 걸 약속씩이나 해요. 아무튼 알았어요.”
이재는 가만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말이 없자,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만나자는 말은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저 들어갈게요. 오늘도 좋은 꿈 꾸셔야 해요.”
“그래. 너도 잘 자라.”
그는 사실 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쉬 운 눈으로 방문을 바라보다가 돌 아섰다.
더 달라붙으면 이 여우는 정말로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이재가 한밤중에 눈을 뜬 건 소름 끼치는 악의 때문이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며 들려왔다.
함의 정령이었다.
-이재,빨리 일어나!
서둘러 몸을 일으킨 그녀는 눈 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수의 원귀가 방을 향해 몰려온다.
방의 결계는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고,함의 정령은 그것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령의 몸은 조금씩 희미 해지고 있다.
이재는 창가로 가서 팔찌로 원귀 하나를 쳐냈다.
바깥쪽으로 손을 뻗으며,그녀는 정령에게 외쳤다.
“저리 가! 이런 짓 하면 넌 없어져!”
안 그래도 금이 가 있던 궤는 조금 더 벌어져 있었다.
정령은 뱀 귀신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허약한 사념체였다.
자기 집이 망가지고 있는 걸 본 함의 정령은 울먹울먹했지만, 이재에게 말했다.
-이재. 지금 왕한테 가야 해.
“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정령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으로 무서운 게 가는 걸 봤어.
이재는 당황해서 기를 거두고 손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원귀에 축귀를 한가득 몰고 다니는 건 국왕이지,자신이 아니었다.
왕이 없는 방에 이렇게 많은 수의 원귀가 몰려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누가 양쪽에 살을 날리고 있구나. 그렇다면 국왕이 위험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정령에게 말했다.
“나 잠시만 갔다 올게. 정말 금방 올게.”
-…응
“미안해.”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재. 나도 무서워.
“……너무 미안해. 그 사람을 혼자 둘 수가 없어.”
-……알아. 이재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이재는 함을 열어 부적을 뒤적였다.
하지만 함이 파직,소리를 내며 조금 더 깨지자 정령을 바라보았다.
힘을 쏟고 있는 정령은 계속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부적을 다 가져갈 수가 없어서 두어 장만을 품에 넣었다.
함에 손을 올리고,정령에게 기를 불어넣은 이재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그리고 서둘러서 방을 뛰쳐나갔다.
주인이 사라진 방에는 계속해서 원귀들이 날아들었다.
결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둣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영안을 가진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에선가 영험한 푸른빛이 뻗어 나왔다.
그 푸른빛은 천천히 방을 채우기 시 작했다.
아교풀로 붙여진 지하여장군, 이재였다.
하나의 조각상에는 두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고,그 마음은 조금씩 어둠을 몰아내며 방을 수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