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77)
마음이 이끄는 대로-77화(77/134)
#77.
반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이재는 침대에서 스윽, 일어났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고,허리는 평소처럼 꼿꼿하기 만 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온 원귀가 그녀의 둥 뒤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귀의 긴 머리칼은 젖어서 추 욱, 늘어져 있었다. 수살귀였다.
평소라면 강이재는 이런 것들에게는 절대로 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재는 공허한 눈동자로 창을 열었다.
밖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언젠가 그녀가 생각한 미래처럼.
이재는 창을 넘어 그 어둠 속 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호숫가였다.
웅장하고 깊은 물웅덩이.
얼굴에는 감정 한 톨 묻어 있 지 않았지만, 그 앞에 선 이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에 밴 습관 이었다.
그녀에게 붙은 원귀는 계속해서 속삭이며, 둥을 떠밀었다.
-들어가자. 나랑 같이 가자.
-나는 너무 외로워. 너도 그렇 지? 우리 함께 있자.
이재는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수를 향해 발을 내밀었다.
어둠과 달빛이 공존하는 밤.
새 카맣게 빛나는 물은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그리고 물이 그녀 의 무릎 위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이재의 정신을 파고드는 익숙한 음성이 있었다.
-강이재. 정신 차려라.
-그만 정신 차리라고. 젊은 애가 벌써부터 오락가락하냐?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에 이지가 돌아왔다.
움찔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가 자신이 호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더욱 움찔했다.
“뭐,뭐야.”
이재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왕이 한심하단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까지 저런 하찮은 원귀한테 홀리면 어떡하냐? 나라의 미래가 어둡네.
수살귀는 자신과 다른 신성한 기운에 겁을 먹은 둣,이재를 놓고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재가 그 원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 었다.
“그러게요. 전 전생에도 이번 생에서도 물에 빠져 죽을 팔자인 가 봐요. 사람 인생 그렇게 쉽게 안 바뀌지.”
이재는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덤덤해 보였고, 소년왕은 내심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재는 버둥거리는 수살귀의 이마를 염주 팔찌로 탁, 쳤다.
“네 사정까지 공평하게 들어 주기엔 내가 물에 한이 많은 사람이라 안 되겠다. 근데 저기 계시는 카이엔 초대왕께서도 말씀하셨어.”
“인간은 원래 주관적인 거라고.”
“이게 사람 가장 아픈 데를 찔러?”
그녀는 부적 한 장 없이 기를 뻗어 수살귀를 멸해 버렸다.
그리고 굉장히 허망한 시선으로 소년 왕을 올려다보았다.
“어쩌죠?”
-뭐가.
“방금 못 보셨어요? 퇴마에 요령이 생겨 버린 것 같아요.”
“………”
“강하고 거친 친구가 필요했는 데, 저 혼자 거친 아이가 되어가고 있어요.”
이재는 상심한 얼굴로 말했고, 소년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홀렸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 진심이었다.
“역시 며칠 전에 없애선 안 될 걸 없앴나 봐요. 불길하더라니.”
-진짜 놀고 있네.
소년왕이 비아냥거리둣 중얼거 렸지만,이재는 발끈하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어조로 감사의 인사 를 전했다.
“그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아야 할 벌이 있다면,겸허히 받을게요.”
소년왕은 피식 웃었다.
그 외 돌아오는 답은 없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이제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요.”
_ 응.
“물에 들어오니까 기분이 참 이 상하네요. 이끼 냄새가 이런 거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제 기억엔 차가웠는데,생각보 다 따뜻한 것 같아서요. 나쁘지 않아요.”
소년왕은 그녀의 감상평이 기가 막힌 듯했다.
-너 왜 그딴 것에 홀렸나 했는 데,홀린 게 아니라 일부러 정신을 놓은 거였군?
픽,웃은 이재는 잠시 물을 느껴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걸 음 앞으로 걸었다.
이럴 기회가 또다시 오진 않을 것 같았기 때 문이다.
-야,뭐 해. 미쳤어? 거기 깊어.
“왜요. 언제는 한번 들어가 보라면서요. 가만 보면 그 집안사람 들도 은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
“아,사람이 아니셨죠.”
-정말로 돌아 버린 건가?
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수긍했다.
“뭐,그런가 봐요. 그치만 조금 만 더 느껴 보고 싶어요. 또 피해 다니고 싶지 않아요.”
“워낙 성공한 인생만 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원래 인생을 계속 망치다 보면 다 이렇게 되는 거 예요.”
-웃기고 있네. 강이재,넌 나라고 실패를 모를 것 같아?
이재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소년왕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실패는 알지만,물론 귀신도 모르는 건 있지.
“그게 뭔데요?”
-난 네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 버릴 줄은 몰랐다.
이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한테도 이야기했는데요. 전 원래 꾹꾹 참다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뜬금없이 뛰쳐나 가는 사람이에요.”
흔히 이런걸 급발진이라고들 하죠.
소년왕은 어이가 없는 듯했다.
-재는 저걸 자랑이라고 하고 있네. 네 남편이 너한테 참 반하겠다. 아무튼 난 분명히 말렸다?
이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또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러자 어느 새 물은 그녀의 허리께에서 찰랑 거렸다.
사실 이재는 많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이 옹장한 호수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물을 조심해라. 물가에 가지 마 라.
사람들의 조언은 언제나 옳았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재는 그 옳은 말로 인해 인생 대부분을 움츠리며 살아야 했다.
즐겁지가 않았다. 거 기에는 자신의 의지가 조금도 없 었기 때문이다.
늘 남의 말에 의존해서 살아가 는 사람들의 인생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사소한 발걸음 하나가 어 려워지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물이 무서웠지만, 사실은 발을 담가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지난 삶은 옳았던 걸까.
강이재. 너는 바다를 한 번쯤은 느껴 보았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웠고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가질 못 하고,그 자리에서 달빛만 하염없 이 바라보았다.
그때 였다.
고요했던 호수에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물살이 튀었다.
국왕이 무 서운 얼굴로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재의 허리까지 와 있는 물은 그의 골반께에도 미치지 못 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 세웠다. 푸른 눈동자에 분노가 가 득했다.
“너,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소년왕은 그걸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말렸잖아. 넌 화해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부부 싸움을 하냐.
그는 한심하다는 둣 혀를 차며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기 전 보여 준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재는 조금 당황해서 로더릭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사들과 시녀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경악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이재는 왕이 반가워서 금세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폐하. 이제 괜찮으신 거죠?”
“뭐?”
“저도 괜찮으실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건강한 모습을 보니까 정말 기뽑니다.”
“너는 지금 이 상황에 그딴 걸 잘도 말이라고……”
로더릭은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그는 이성 을 잃고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거친 외침에는 참을 수 없는 원 망이 녹아들어 있었다.
“안 죽는다고 했잖아! 이런 짓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나랑 약속 했잖아! 네 약속의 무게는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폐하.”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주면 돼, 어? 어떻게 하면 다신 이런 짓 안 할 거냐고!”
이재는 수초처럼 물속에서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왕은 무서운 게 딱히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씩 소름 끼치는 원귀의 음성이 들렸을 때마저도,그 는 살의와 불쾌감을 느낄지언정 그 음성이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왕은 지금 솔직히 두려웠다.
아내가 자신을 완전히 떠나 버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떠나면 다시 잡아 올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외침은 점점 호소와 애원이 되 어 갔다. 로더릭의 눈동자에는 비 탄이 들어찼다.
“성 밖으로 내보내 줘? 떠돌아 다니고 싶다고 했지. 잠깐이라도 다녀오게 해 주면 돼? 그렇게 해 주면 되겠어? 너도 네 입으로 말을 좀 해 봐!”
“………….”
“그래도 이혼은 절대 못 해 줘. 나 너 없이 못 살아.”
눈을 크게 뜨고 듣고 있던 이재는 마지막 말에 바람 빠진 둣한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그러자 로더릭은 울컥해서 이를 악 물었다.
“너……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로더릭은 뭔가를 더 말하려 했 으나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가 어깨를 쥔 손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완전히 떨쳐 내지 않고 다시 꼭 잡았다.
이재는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그녀는 곧 서글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은 손은 차가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커다란 손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녀를 지금 충동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 달빛일까, 그녀의 의지로 느껴 본 물결일까.아니면 자신을 걱정해서 화를 내고 있는 눈앞의 사람일까.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재는 결국 입을 열었다.
“폐하.”
“………”
“폐하,이제 그만 화내시고 대답 좀 해 주세요.”
“……어.”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재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 죽으려던 거 아니에요. 그냥 물이 예뻐서 그랬어요.”
“너는 그딴 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전 그 강에 뛰어든 적이 없습니다.”
미소 짓던 이재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왜냐하면 나…… 헤일리 던컨이 아니니까.”
그 순간 로더릭의 얼굴은 굳어졌다.
하지만 이재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에는 점점 다른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건 경이에 가까운 이채였다.
로더릭은 입을 다문 채,그녀를 호수 밖으로 이끌었다.
왕후궁 분위기는 살벌했다.
국 왕은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왕후의 손을 잡고 있었고,둘에게서 뚝뚝 떨어지는 물은 계속 복도를 적셨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왕후가 또 물가에 뛰어들었다는 건 엄청난 추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목격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고,모두의 입을 틀어막기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국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고개만 조아렸다.
하지만 로더릭은 이재를 순순히 시녀장에게 인계했다.
“내 여우 좀 삶아 와라.”
“예?”
“얘 좀 따뜻한 물로 씻기라고.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리잖나.”
그 말에 모두는 알게 되었다. 덮기로 하셨구나.
로더릭은 이번에는 이재에게 말했다.
“너,씻고 방에서 딱 기다리고 있어. 나도 씻고 올 거니까.”
“………”
“도망가면 진짜 가만 안 있는다.”
이재는 힐끔 눈치를 보다가 주눅이 들어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솔직히 후회 중이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추궁을 받다 못해 고문을 당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재는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아니야,계속 봐 왔잖아. 내 남편은 절대 그렇게 개차반 같은 사람이 아니야. 아내가 좀 미친 것 같으면 그냥 의원을 불러 줄 거야.
이재가 욕실로 향하자, 국왕은 대번에 시녀들과 기사들을 노려 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머리 잘 말려서 앉혀 놔. 왕후가 기침이라도 하는 날엔 너횐 그냥 다 죽은 줄로만 알아라.”
“………”
“명색이 왕후가 방 밖으로 나가는데 그걸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나? 내가 너희를 참아 주는 것에도 정도란 게 있는 거다.”
“………”
“정신 좀 차리자.”
왕후가 설마하니 창을 넘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그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