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
마음이 이끄는 대로-8화(8/134)
#8.
먼저 눈을 뜬 건 로더릭 쪽이 었다.
그는 처음에는 살짝 인상을 썼다. 몸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느 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쪽이었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새 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이 베고 잔 게 헤일리 던컨의 무릎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너무 끌어안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
사람들은 국왕이 미간을 찌프리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랬다.
“왜 이러고 있지?”
딱히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단지 어이없음의 표현이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한 자신이 수많은 궁인들 앞에서 이러고 잤다는 것에 대한.
하지만 제이드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로더릭이 본인 입으로 말 한 적은 없지만, 그는 로더릭이 가끔 기억을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차 드시고,나란히 앉아 계시다가……”
“………”
“그냥 바로 주무셨습니다.”
물론 그거 외에도 왕후 폐하가 몇 번, 그 뒤에 폐하도 몇 번,차례로 사이좋게 주물럭거리시긴 했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하지요?
한편 로더릭은 어이가 없다는 둣 하, 웃었다. 약간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머리를 다소 거칠게 쓸어 올리다가 완전히 곯아떨어진 왕후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은 꽤 길었고,잠시 후 로더릭은 말했다.
“편한 데서 잘 수 있게 해.”
멈칫하던 사람들은 그 명에 다소 분주해졌다.
시종들이 기사들보다 조금 더 먼저 나섰지만, 결국 왕후를 안아든 건 기사단장인 제이드였다. 국왕의 아내인데 아무 남자에게나 신체를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이드가 접견장을 나서기 직전,로더릭이 덧붙인 말에 모두는 일제히 얼어붙었다.
“내 침실에 재워.”
“………”
“멀리 가다 쓸데없이 깨우지 말고.”
국왕의 침실이 거리상 훨씬 더 가깝긴 했다.
닳을 대로 닮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순수한 의도처럼은 들리지 않았으나 둘은 부부였다.
의도가 좀 새카맣다고 해도 그건 불량한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의 시종들은 왕후의 시녀들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사실은 사이가…… 괜찮은 건가?
높은 분들의 침대 사정을 확신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서로를 불신의 눈으로 열심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결국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쪽은 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강물에 뛰어들었고,한쪽은 던컨이라면 그저 의심부터 하고보는 데 사이가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낯선 방에서 눈을 뜬 이재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뜨니 또 모르는 장소였다.
설마 모르는 사이 죽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이재는 일어나서 거울부터 봤다.
살구색 머리카락, 하얀 피부, 조금 뾰족한 턱. 헤일리 던컨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더릭은 역시 제정신일 때는 법적 배우자가 자기 몸에 손 좀 댔다고 목을 치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당신은 역시 그렇게 개차 반 같은 남편은 아니었어요.
사실 나도 심하게 졸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이재는 다시 한번 심란한 표정을 했다.
둘러본 방 안의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여기 있으면 없던 정신병도 걸리겠네.”
이재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국왕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몰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기운의 혼령들이 이재 때문에 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당신은 살아 있 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예요.”
신성해야 할 국왕의 침실에서 흉가와 같은 기운을 느낀 이재는 바로 방문을 열었다. 구토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쭉 기다리고 있었는지 데보라와 시녀들이 방 밖에 서 있었다.
이재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왕후가 많이 당황했다고 생각한 시녀장은 설명부터 시작했다.
“여긴 폐하 침실입니다. 잠이 드셔서 모셨습니다.”
“……대체 왜?”
나를 왜 이런 흉가로 데려온 거야.
나는 흉가랑 공동묘지는 실수로라도 안 가는 사람이란 말이야.
“폐하께서 왕후 폐하가 도중에 깨시지 않게 가까운 곳에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헛구역질을 참고 있던 이재는 별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그녀는 곧 허탈하게 웃었다.
왕은 자기가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복채 비슷한 걸 찔끔찔끔 주기는 하는구나,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음습한 기운에 민감한 이재로서는 썩 달가운 방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품 안의 부적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장 숨겨놓고 오면 훨씬 나을 텐데.’
하지만 궁인들은 의아한 얼굴로 왕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이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도 방 밖으로 나섰다.
며칠 뒤,로더릭은 이재에게 식사를 제안했다.
그들이 식을 올린 지 보름 만에 함께 이루어진 첫 식사였다.
제이드는 그 전에 왕후 서재에서 은밀히 확인한 서신의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폐하, 던컨 공작이 왕후 폐하께 서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뭐라고?’
‘공작가의 사람들을 데려다 쓰시라고요. 일전에 앓아누우셔서 불편한 게 있으신가 무척 걱정이 된답니다.’
왕과 왕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웃었다. 누구라도 왕실에 던컨가 사람을 심겠다는 의도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던컨 공작은 왕이 용인치 않으리란 사실도 당연히 알고있다.
이건 단지 왕과 귀족들 간에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사소한 힘 겨루기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헤일리는 던컨가 출신이었고,점점 많은 접견 요청을 받을 것이다.
그녀가 아비의 허수아비가 되어 귀족의 구심점이 되지 않으리란 건 누가 장담할 수 있나.
로더릭이 계속 한미한 집안에 청혼서를 넣었던 것도,두 차례 있었던 사고의 배후로 던컨가를 지목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니 이번 식사는 순전히 헤일리 던컨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일 뿐이었다.
로더릭은 오찬 장소에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화제를 꺼낼지를 생각하는 중이었고,그가 내야 할 대화의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로더릭의 신경은 시시때때로 사나웠다.
그는 습관적으로 한 번씩 이마를 감싸 쥔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왕후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그 는 아까보다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굉장히 기이한 감상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공기가 청량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수록 그가 느끼는 상쾌한 공기는 더욱 짙어졌으며, 또 멀리 퍼져 나갔다.
말이 되지 않지만,사실은 말이 되는 감상이었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이재를 보고 있던 그는 이 비현실적인 감상을 단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정말 이상하군.”
로더릭이 내뱉은 말에 이재는 다가오려다 말고 멈춰 섰다.
“네?”
“아니.”
“………”
“별 뜻 없이 한 말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맞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왔으면 앉아.”
이재는 잠자코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로더릭은 손가락으로 식탁을 툭,툭 두드리며 꽤 오랜 시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재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음식이 다 나오기 전, 먼저 입을 연 건 이재 쪽이었다.
“폐하,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해 봐.”
“며칠 전에 던컨 공작, 제 아버지한테 편지가 왔어요.”
그 말에 로더릭은 잠시 침묵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숨죽인 채 긴장하고 있었는데,로더릭의 경우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감상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어떤 방식으로 말을 꺼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새 그걸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픽 웃었다.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왕후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공작이 뭐라는데.”
“공작저에서 사람들을 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그 편이 편할 거라고요.”
이재는 그렇게 말하고 힐끔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혹시 보여 드려야 할까요? 별 내용은 없지만 가져는 왔어요.”
로더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필사본으로 모두 확인한 내용이었다.
대신 그는 흥미롭다는 둣 이재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저한테 이번에도…… 선택권을 주시나요?”
그러자 그의 푸른 눈에서는 설핏 웃음의 기색이 지나갔다.
왕후가 무슨 일을 언급하고 있는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국혼을 받아들이거나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죽거나,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던 그날이 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귀 기울이고 있던 제이드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대화의 흐름이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쪽으로 당겨오라고 했더니 뭔가 끌려가 주는 형세였다.
하지만 왕에게 긍정의 대답을 들은 이재는 진심이 섞인 농담을 건넸다.
“선택권이 그때보단…… 공평할 까요?”
로더릭은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웃었다.
눈가를 문지르며 마른 세수를 하던 그가 말했다.
“너 솔직하게 할 말 다 하기 시작하니까 아주 가관이다.”
“네,역시 제가 너무 건방졌죠. 죄송해요.”
“아니. 지금이 나아.”
로더릭은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재는 또 한 번 고심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재는 솔직히 해일리 던컨이 좀 궁금했다.
헤일리 던컨, 너라면 아버지의 편을 들었을까? 그런 아버지라도 있으면 없는 것보단 좀 낫니?
하지만 일기장은 방대하고,기억이 불완전한 이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모르겠다.
결국 이재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말했다.
“저는 안 된다고 쓸 거예요. 아직 왕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벌써 그렇게 하면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미묘한 부분을 느낀 로더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자신에게 요청해 보았자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의 원인을 굳이 자신에게 돌리진 않았다.
빚을 지웠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던컨가를 완전히 등지는 답신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직이라는 말에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들은 이 건으로 힘겨루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럴 빌미를 당분간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제 아비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던컨 같은 처세였다.
저걸 역시 핏줄이 진하다고 보아야 할지.
로더릭은 문가에 서 있는 제이드를 힐긋 바라보았다.
제이드는 멈칫했고, 왕의 시선은 묻고 있었다.
‘네 눈엔 저게 정말로 순진한 것 같아?’
잠시간 제이드에게 시선을 주던 로더릭은 어느새 이재가 음식을 앞에 두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는지 눈치챈 로더릭은 다소 무뚝뚝한 태도로 음식에 아무렇게나 포크를 푹 꽂아 넣었다.
“먹어. 그딴 거 기다리지 말고 그냥 먹어.”
왕이 미간까지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이재는 설핏 웃었다.
그런 이재를 보면서 로더릭은 점점 더 미묘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방금 전 뭔가가 자신의 범주를 몇 번이나 이탈했다가 돌아온 기분.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는 직감을 인간은 대부분 낚아챌 수 없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순간,그의 가슴속에 뭔가가 손톱만큼 자라났다.
사람에 대한 아주 짙은 의심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끌림.
그는 의심과 끌림이 동시에 생겨나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