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4)
마음이 이끄는 대로-84화(84/134)
#84.
이재가 다시금 눈을 뜬 건 로 더릭이 한 권의 일기장을 거의 다 완독했을 때쯤이었다. 그녀가 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눈을 비 비자,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 다보았다.
“잘 잤어?”
“오셨어요?”
“아까 왔지. 기억 안 나?”
잠시 생각하던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결에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새벽녘에 찾아와선 가 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폐하,제가 늦잠을 자면 좀 깨 워 주세요.”
“그걸 왜 깨워. 너 도롱도롱 코 골면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제가 코도 골았어요?”
“그냥 해 본 소리야. 새근새근 예쁘게만 자니까 신경 쓰지 마 라.”
눈을 뜨자마자 국왕은 또 이상 한 농담을 했다.
그녀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휴,그래도 코 안 골아서 다행 이다.
코피를 쏟는 게 낫지,아직은 남편 앞에서 코를 골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런데 안도하던 그녀의 눈에는 순간 이상한 게 들어왔다.
국왕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 뭔가를 읽고 있었다.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뜨던 이재는 곧 화들짝 놀라서 손을 뻗었다.
왕이 들고 있는 게 헤일리의 일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는 몰랐지 만, 로더릭은 일기장을 탁,접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감탄을 자아내는 반 사 신경이었으나, 이재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뿐이었다.
“윽! 보지 말아요. 주세요.”
“왜?”
“폐하는 자기 일기장을 누가 몰래 보면 좋아요?”
몹시 상식적인 말이었다.
하지 만 로더릭은 잘 이해가 안 된다 는 표정이었다.
“그럼 넌 왜 봐?”
더욱 상식적인 말이었다.
물론 이재에게는 나름의 당위가 있긴 했다. 그녀가 헤일리 던컨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선 알아이“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 모든 내용을 보는 것은 싫었다. 이재는 헤일리의 삶이 얼마나 불행했는지에 대해 소 문내고 싶지 않았다.
누구든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 는 것보다는 따뜻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추억되는 게 낫지 않을까. 로렌스의 기억에서 그러하듯이.
이재는 이불을 걷고 왕에게로 온몸을 던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 를 짚고,열심히 손을 뻗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빨리 주세요”
로더릭은 웃음을 홀리며 팔을 더욱 멀리했다.
그러면서도 한 팔로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아침부터 이런 식으로 덮쳐 오 면 설레는데.”
이재는 옴찔했지만,그는 그대 로 그녀를 들어 옆에 앉혀 주었다.
이재는 손을 내밀었고 로더릭 은 순순히 그녀의 손바닥에 일기 장을 내려놓았다. 죽고 싶지 않다, 공작에게 맞고 싶지 않다 등의 내용으로 점철된 마지막 권이
이재는 왕이 어디까지 읽었는지 몰라서 눈치를 보았지만,그는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왕이 침묵하니 그녀의 화살은 결국 공작을 향했다.
참 나쁜 아버지야,딸이 이런 내용으로 일기 장을 채우게 하다니. 속으로 욕을 하던 이재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왕을 불렀다.
“폐하,제가 지난번에 누가 폐 하한테 살을 날렸다고 했잖아요.”
“옹. 그게 왜.”
“그거 공작가 쪽에서 그런 걸까요?”
로더릭은 이재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사실 그도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다만 그녀에게까지 물어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왕은 아내가 더 이상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그녀는 꼭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글쎄. 기억에 없나?”
“전 사실 기억이 좀 불완전해 요.”
왕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그래서 자꾸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였군.”
“네.”
“그런 거면 그만해라. 몇 달을 보고도 모르겠나? 별 내용이 없잖아”
그녀는 감탄한 둣 고개를 끄덕 였다. 그걸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알아채다니 폐하는 역시 참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렇긴 한데 이게 또 나름 암호같이 읽는 맛이……”
암호? 이재는 고개를 조금 갸 웃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도 날카로운 직관 하나가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로더릭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튼 넌 이제 신경 쓰지 마.”
“뭘요?”
로더릭은 턱짓으로 벽에 붙어 있는 부적들을 가리켰다.
“저런 거 하지 말라고.”
“저 괜찮아요.”
“괜찮기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정말인데.”
그는 또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 리는 기분이었다.
로더릭은 허공 을 보며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 었다.
마음을 한 차례 다스린 그 는 다시 이재를 바라보았다.
“너,오늘의 태양이 몇 시간 전 에 뜬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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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거울이나 보고 말해라.”
이재의 안색은 아직도 조금 창백했다.
그가 의원을 부르지 않은 건 그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거 하지 마. 나 때문인 거라면 앞으로는 내가 따로 자겠다.”
멈칫하던 이재는 금세 시무룩해 져선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몹 시 서운한 얼굴로 이불을 움켜쥐 었다, 놓았다 하더니 말했다.
“싫어요.”
“………….”
“같이 있고 싶어요.”
“……미치겠네, 진짜.”
로더릭은 그녀가 알고 저러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 처연한 표정에 맥을 못 춘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고.
이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너랑 누구보다 같이 있고 싶은 건 나야.
“그럼 말 좀 듣자.”
하지만 이재는 고집스럽게 고개 를 저었다.
“그것도 싫어요.”
로더릭은 다시 한번 후우,깊은 한숨을 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런 짓을 못 하게 손발을 꽁 꽁 묶어 놓을 수도 없고, 쟤를 정말 어떻게 해야 돼.
왕은 이재가 꼭 자신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몹 시 인내하며 아내를 차분하게 설 득하려 들었다.
“너 시름시름 앓는 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
“나한테 이번 한 번만 져 줘. 그럼 다른 건 전부 다 네 말대로 하겠다. 부탁이다.”
“………….”
“몇 년간 아무 일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하지만 이재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올해는 국왕의 대운과 나라의 국운이 바뀌는 해다. 올해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면,그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비록 보잘것없는 무속인이었지만,그 정도 시이는 갖고 있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냥 조금 피곤한 거예요.”
“……거울부터 보고 와서 말하라고 했다.”
이재는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진짜로 거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설마하니 정말 거울을 보러 갈 줄은 몰랐지만,로더릭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나올 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왼쪽, 오른쪽 고개를 돌려 가며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어 보던 그녀는 돌아섰다.
눈을 깜빡거리던 이재가 말했다.
“예쁘기만 한데,왜요?”
“아니, 저걸 진짜.”
박복,어쩌고를 입에 달고 살더니 놀라울 정도의 임기응변이었다.
로더릭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이마를 짚었지만, 이재는 빙긋 웃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이재는 그의 손을 잡았다.
“폐하.”
“왜.”
“저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하지 마라.”
로더릭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여우 귀신이 자신을 또 홀리 려 든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조곤조곤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설득당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로더릭은 손을 떼어 내며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한번 시동을 건 이재는 발진을 멈추지 않았다.
“맞죠? 사실 저 되게 좋아하시죠?”
“하지 말라고 했다.”
“어? 아닌가? 안 좋아하시나?”
“야.”
“너무 서운하네요.”
“……넌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냐. 너 없으면 못 산다고 했잖아.”
이재는 배시시 웃었고,로더릭 은 기가 막혀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해맑은 미소와는 달리, 그녀의 입에서는 점점 극단적인 발언들이 이어졌다.
“근데 폐하. 저 없이 못 사시는 거면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안 그럼 폐하는 정말 홀아비가 되실 수도 있어요.”
“뭐?”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재혼은 적어도 사십구 일이 지나고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테는 좀 중요한 숫자거든요.”
로더릭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거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그는 곧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그게 남편한테 할 소리인가? 내가 할 말 다 하라고 했다고,이딴 말까지 해도 되는 줄 알아?”
그의 얼굴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소리인 건 둘째 치고,저런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났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런 말을 꺼낸 이재는 동요하지 않았다.
몹 시 미안하긴 했지만,그녀는 한없 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폐하,제가 살던 곳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
“둑은 작은 구멍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제궤의혈.
“이런 말도 있어요. 작은 불씨가 퍼지면 넓은 들판을 태운다.”
성화요원.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손가락을 아끼려다 손바닥을 잃는다.”
석지 실장.
왕은 명석한 사람이었고,이재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이해했다.
하나같이 작은 일을 그르 치거나 소홀히 하면 더 큰 화를 입는다는 이야기였다.
왕은 저 말을 바로 이해한 자 신에게 짜증이 났다.
“폐하께 지난번과 같은 일이 생기면 저는 두고 보지는 않을 거예요. 이해는 안 되시겠지만, 그게 제 업이에요.”
“……………”
“지금은 조금 피곤한 걸로 그걸 막을 수 있지만,지금 피곤하지 않으면 저는 그때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뭐?”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요. 이건 폐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
“절 진심으로 위하신다면,제가 하는 일을 막으시면 안 됩니다.”
로더릭은 몇 차례나 입술을 달싹이며,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좀처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는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건 왕후와 처음으로 식사를 함께하던 날이었나.
그녀는 사가의 사람들을 보내겠다는 공작의 서신을 들고 와서 말했었다.
안 된다고 쓸 거라고. 왕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그렇게 하면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그때 왕은 위화감을 느꼈었다. 거절의 원인을 왕실에 돌리지 않고, 그녀 자신이 다 떠안는 둣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빚진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던컨 같은 처세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건 빚을 지우기 위한 게 아니었다.
상대의 짐을 몰래 덜어 주고, 책임은 자기가 다 가져가고 싶어 하는 아내의 방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바보야.
이게 어떻게 너를 위한 거야. 나를 위한 거잖아.
내가 너를 몰라? 설마 그런 말에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가?
문득 그의 마음속에서는 크나큰 원망이 일었다.
어떻게 나한테 네 목숨을 가지 고 협박할 수 있냐고 따져 물어야 했다.
영악하게,너 없이 살 수 없는 내 마음을 무기 삼지 말 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너무나 영리하고 현명했다.
이 협박은 유효 했기 때문이다.
왕은 화를 내지도 못 하고,더 이상 애원하지도 못했다.
그저 하 염없이 이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푸른 눈에서는 어쩔 수 없는 미련과 원망이 뚝뚝 떨어졌다.
차분하게 말했지만,사실 이재 의 마음도 시큰거렸다.
그가 시종 일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 기에 더욱 미안했다.
이재는 그의 손을 끌어와 꼭 잡았고,로더릭은 자신의 손을 쥔 작기만 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일렁거렸다.
왕이 입을 땐 건 꽤 오랜 시간 이 흐른 후였다.
“널 정말 어디 가둬 놓았으면 좋겠다.”
“………….”
“손발도 꽁꽁 묶어 놓고 싶다.”
“………….”
“네가 밉다.”
이재는 그 말에 덤덤하게 미소지었다. 왕이 왜 그녀를 입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마음을 다 알면서 그런 못 된 말을 하는 네가 미워.”
“………….”
“내 마음을 이용해서 내 입을 막는 네가 밉다.”
로더릭은 마음속에 이는 슬픔과 격랑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이재,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내 앞에서 죽는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마라.”
“……응. 미안해요.”
“네가 날 진심으로 위한다면, 절대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신이여. 슬픔은 나누면 정말 반이 되는 것입니까.
슬픈 사람만 둘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녀는 마음이 몹시 아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울면 이 커다란 남자가 더욱 슬퍼할 것 같아서, 그녀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위로하듯 그의 둥을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