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6)
마음이 이끄는 대로-86화(86/134)
#86.
둘은 그 뒤로도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았다.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대화였다.
로더릭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이재도 그 앞에서 의식을 하려니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도 남편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소박한 욕심 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오래전에 망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대화 후,이재는 다시 진지해졌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고, 로더릭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곧 그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온화하던 눈동자에 서는 갑자기 안광이 번뜩이는 것 같다. 조각도를 쥘 때마다 보았던 눈이다. 날카롭고 매서웠지만,그 만큼 신중한 눈이었다.
이재는 잠시 잡귀가 있는 방향 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돌돌 말기 시작했다. 그녀는 촛대 위에 종이 를 갖다 대고 불을 붙였다.
방 안 에는 연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축,멸,파,참. 다시 축.
‘속거천리 급급여율령 사바하.’
‘고여 있는 자들이여. 너희의 땅으로 속히 돌아가라.’
‘강물처럼 흐르는 인세의 시간 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
로더릭은 이재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그녀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가끔씩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로더릭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그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방 안의 공기가 급변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녀가 부적을 한 장씩 붙일 때마다 휘몰아치던 방의 공기는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기운 도 서서히 안정되어 간다.
‘참 이상하다.’
로더릭은 몹시 의아했다. 검도 를 걸은 자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는 이런 감각이 발달해 있는 법 이다. 그도 그 점은 충분히 인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감이 왜 거기에서 나 날이 강해지고 있는 걸까.
마침내 이재가 한 손을 허공으 로 뻗었을 때,로더릭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지금 뭔가가 뻗어 나가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자꾸 이런 게 느껴지는 거지.
이건 아내가 너무 맑고 남다른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런 건 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이재는 왕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끝났 다는 것을 깨달은 로더릭은 고개 를 끄덕였다.
“이리 와. 응?”
하지만 말과는 달리,로더릭은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왔다.
그는 이재의 뺨을 움켜쥐며 허리를 숙였다. 그녀를 면밀히 살 피는 태도에는 세심함이 가득했다.
“괜찮아?”
“네.”
하지만 로더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래도 안 괜찮은것 같다.”
“괜찮다니까요.”
“어떡하면 좋지. 안색이 나쁜 데.”
“아니, 제가 괜찮다니까요?”
“혹시 모르니까 의원이라도 불 러 볼까?”
“……제 말 안 듣고 이렇게 혼 자 말하실 거면 대체 왜 물어보 셨죠?”
로더릭은 대답하지 않고,그녀 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그는 이
재를 침대에 눕히고 말없이 내려 다보기만 했다. 가끔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손등을 대어 보기도 했다.
푸른 눈동자에는 걱정이 한가득 했다.
왕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같은 말을 또 반복했다.
“정말 괜찮아?”
“지금 혹시 말하기가 힘든 건 가?”
“그런 거면 그냥 눈만 깜빡거려 봐.”
이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사실 그 정도로 힘들지 는 않았다. 살짝 어지럼증이야 느 꼈지만,결계만 쳐도 앓아누웠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재가 웃자, 로더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난 걱정돼 죽겠는데,넌 웃음 이 나와?”
“그럼 울까요? 이렇게 걱정하실 거면 앞으로는 나가 계세요.”
“아,왜 또. 그 얘기는 다 끝났 잖아.”
물론 그렇기는 했지만,이재도 그가 저렇게까지 속상해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폐하,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건 너무 불평등한 조약인 것같아요.”
“뭐가.”
“코피 쏟으면 협상은 파기라면 서요. 방에 꽁꽁 묶어 놓으실 거 라면서요.”
로더릭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어. 그럴 거다.”
“그럼 저한테도 단서 조항이 있 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걱정하실 거면, 저도 폐하 안 보 는 데서 할 거예요.”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왕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 고 싶었지만, 이 협상에서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 보고 조인했어야지. 계약서에 함부로 서명하면 안 된다는 얘기 못 들 어 봤나?”
“폐하,구두 계약이잖아요? 전 서명 같은 거 한 적 없네요.”
“아,이런 식으로 또 부부간의 신뢰를 저버리시겠다?”
그러나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왕의 커다란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옴직였다.
그저 미소 짓고 있던 이재는 점점 황당해졌다. 체온을 확인하 고 이마를 짚어 볼 때까지는 그 러려니 했다.
그런데 왕은 난데없이 그녀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사 람이 멀쩡히 소리 내어 말하고 있는데,심박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는 에잇,하며 손을 치웠다.
“뭐 하는 거예요, 진짜!”
“아니,난 만지려던 게 아니라 혹시 이상 있나 걱정돼서.”
“………….”
“근데 부부 사이에 이게 아직도 불쾌한가?”
그녀는 결국 얼굴을 가리며 흑 혹 웃고 말았다. 진짜 웃긴 사람 이야.
로더릭이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을 때,이재는 여전히 웃 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재는 예전에 왕이 자신을 애 취급한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싶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어리지 않다는 걸 알려 준 뒤에도 왕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경향이 있었다. 그는 그냥 부인에게 자상한 남자일 뿐이었다.
“폐하,지금 좀 과해요. 이 정도 피곤한 건 접견을 오래해도 그렇고,책을 늦게까지 읽어도 그 런 거예요.”
“그럼 접견을 하고 책을 읽어.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나?”
“제 본업은 이건데요. 창피하지 만 제가 갖고 있는 재주는 이것 뿐이에요.”
이재가 진심 섞인 농담을 했지 만 로더릭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좁히며, 몹시 못마땅한 듯말했다.
“그게 왜 창피하지? 그리고 네 가 재주가 왜 그거밖에 없어. 말 조금만 더 예쁘게 하자.”
왕의 말에서 속상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이재는 잠자코 고개를 끄 덕였다.
실제로 로더릭은 지금 속이 몹 시 쓰렸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내의 안색이 파리 했기 때문이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역시 던컨 가를 쳐야 하나.
그런데 던컨가를 치면 왕후가 다칠 위험이 너무 크다.
왕후한테 칼을 날리지 않고,던 컨가만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접견록을 조작할까. 공작가의 심복들을 털어 볼까. 아니면 투서 를 빌미로 재정을 압박할까.
“그런데 만약 던컨가가 아니면……
로더릭이 무심결에 생각하던 것을 말로 홀리자,이재는 그를 빤 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살을 날린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고심하는 것이다.
그건 왕과 그녀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민이었다.
“폐하.”
“응,”
“제가 공작을 한번 떠볼까요? 지난번처럼?”
로더릭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듯 웃었다. 이젠 저런 것 까지 하려고 드는구나 싶어서였다.
왕은 그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던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도 아닌데 왕 후가 그런 인간과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왕은 이재가 공작에게 반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공작을 대할 때만 유독 날이 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 이유마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제안을 단칼에 잘랐다.
“이재. 공작은 독사 같은 인간 이다. 하지 마라.”
너무 빠른 부정이었을까.
이재의 얼굴은 조금 서운해졌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말했다.
“폐하는 저한테 뭐든 다 하지 말라고만 해요.”
사람 마음을 약하게 하는 말이 었지만,로더릭은 솔직히 좀 기가 찼다.
그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 어서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조 금 억울하지 않겠나? 나는 이제 껏 네 말은 거의 다 들어줬다. 적 어도 타협점은 찾고 싶어서 노력 했다. 이것 말고 무조건 안 된다 고 한 게 있으면 말해 봐라.”
“………….”
“이건 네가 좀 양보해. 난 위험 하니까 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재는 전혀 그렇지 않 다는 둣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 이 꼭 ‘위험하지 않아요’ 하며 조각도를 다시 달라던 때 같았다.
로더릭은 이제 진짜 귀를 막고 싶었다.
“폐하,전 여우잖아요. 저도 아주 독살스럽고 교활한 여우예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로더릭은 순간적으로 입안을 꽉 깨물었다.
이씨. 웃을 상황이 아닌데 저 여우 귀신 때문에 자꾸 웃음이 터지려고 하네.
“네가 무슨 교활한 여우야. 너는 그냥 아기 여우야. 털이 보송 보송한 아기 여우.”
“언젠 야생 여우라면서요? 여우는 뱀도 잡아먹어요.”
그러자 기가 차서 듣고 있던 로더릭은 특,내뱉었다.
“넌 뱀 무서워하잖아.”
“………….”
“그쯤 하고 빨리 자.”
로더릭은 더 말해 봐야 부질없 는 것 같아서 그녀를 얼른 재우기로 했다.
어차피 아내랑 언쟁해 봐야 자신이 말리는 건 순식간이 었다. 이길 자신도 없었고,그럴 의욕도 안 생겼다.
왕은 이불을 끌어오며 손수 잠 자리를 정돈했고 그녀의 머리 뒤로 팔을 넣어 주었다.
이재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평소처럼 그를 등지고 눕는 대신 마 주 보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척,하고 팔을 올려놓았고,딱딱 한 팔뚝에도 뺨을 여러 번 비볐다.
로더릭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아내가 이러는 의도야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은근히 몸을 맞대 오며 엉겨 붙는 게 싫지도 않았다. 그게 늘 결정적인 패인 중 하나였다.
“웬일로 우리 왕후께서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오시나.”
이재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이러 는지는 잘 알겠는데,내일 하자.”
“………….”
“피곤할 테니까 우선 자라.”
그는 이재의 짧은 앞머리를 쓸 어 을리며 동그란 이마에 쪽,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살구색 여우 를 재우기 위해 등허리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 또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이재는 그 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찔렀다.
“왜 또. 내일 얘기하자니까.”
“나 그 얘기 하려던 거 아닌 데.”
“응?”
로더릭은 눈을 뜨고,의아한 둣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재는 푸른 눈동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빙긋 웃었다.
“공작 얘기하려던 거 아니라
“아니야?”
“네.”
“그러면?”
로더릭은 더욱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재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하려는 말이 좀 볼품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솔직한 인사는 생각날 때 건네야만 했다.
“폐하,고마워요.”
“뭐가.”
“걱정해서 계속 같이 있어 준 것도 그렇고요. 오늘 저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
“좋은 꿈 꾸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쑥스러운 둣 웃음을 홀리다가 알아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남겨진 로더릭은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겨우 이런 거나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네가 지금껏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해 왔는데.
그럼 내가 너를 이상하게 볼 거라고 생각한 건가?
“……너,진짜 사람 돌아 버리 게 하는 데 뭐 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먹먹해서, 이불 속에 둥그렇게 자리 잡은 형체를 오랜 시간 바라 보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불 밖으로 한 줌 홀 러나온 머리카락을 쥐고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