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7)
마음이 이끄는 대로-87화(87/134)
#87.
국왕과 기사단장은 오랜만에 대련을 하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그들의 대련은 얼마 안 되는 성 안의 볼거리 중 하나였다.
왕과 기사단장은 검술로는 카이 엔에서 호적수를 찾기 힘든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늘 둘이서만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궁지로 모는 취미는 없었다.
“그때 그 기사는 어떻게 됐나?”
“누구 말입니까?”
“있잖나. 내 아내한테 서약을 바치겠다고 미쳐 날뛴 놈”
제이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목을 긁적였다.
“기절하고 일어난 뒤로는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린 거 맞아?”
로더릭은 당장 가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 사단장도 나름 할 말은 있었다.
“그러게 왜 왕후 폐하는 순진한 애들한테 그런 얘기는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뭐?”
“아니,콧대가 잘생겼다느니 그 런 말을 하면 저 시커먼 사내놈들은 바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이를 악물었다.
로더릭은 꽤 괜찮은 남편이었다. 자신이 나쁜 소리를 들으면 코웃음이나 치고 말았지만,아내 가 나쁜 소리를 들으면 잘 안 참 았다.
“그래서,뭐,내 아내가 여지라도 줬단 말인가?”
“아니,그런 뜻이 아니고……”
솔직히 기사단장은 왕후의 잘못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예의상 하는 말을 가려듣기에 기사들은 대체로 순진하고 직선적인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단장이 듣기에는 예의상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험상궂게 생긴 사내를 두고 이건 아주 괜찮은 얼굴이라고 감탄하는 왕후는 분명 진심이었다.
“왕후는 늦게까지 고생하는 기사들이 안쓰러워서 말을 붙여 준 거다.”
“예,그건 저도 압니다.”
“근데 사람이 마음을 써 주는걸 그런 더러운 의도로 받아들여?”
로더릭은 몹시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의문이었다. 왕후가 기사 서약을 받는 건 저렇게 분개할 일이 아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을 지킬 검 하나둘쯤은 갖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서약은 하나도 못 받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있는데 다른 놈이 왜 필요한가? 기사단에 너 말고 검술로 나보다 나은 놈 있어? 너 정도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겠다.”
“뭐,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실력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면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상 많은 기사들을 거느린 왕후는 국왕이 전형적인 학자형이었다는 배경이 있었다. 부부 사이가 썩 좋지도 않았다.
현 국왕 부부는 그중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검술 실력으로 그랬지만, 무엇보다 둘은 틈만 나면 끌어안고 붙어 있으려 들었다.
제이드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듣자마자 기사를 냅다 한 대 갈긴 것이다. 1기사단장도 여러모로 피곤한 자리였다.
“폐하.”
“왜.”
“저는 폐하가 왕위에 오르시고 저를 이 자리에 앉혀 주셨을 때 참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 잘 둔 덕을 이제야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더릭은 무슨 소리를 하고 싶 은 거냐는 둣 바라보았다. 제이드 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요즘은 저를 무척 싫어 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근육밖에 없는 사내놈들 통솔하는 게 나름 힘에 부칩니다.”
로더릭은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하소연에 피식 웃었다.
“널 싫어한 게 아니라,나도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었던 거다.”
“………….”
“왕후는 그걸 알더라고. 참 신기한 일이지. 널 안 지가 얼마 안 됐을 텐데. 혹시 왕후랑 대화를 깊게 나누어 본 건가?”
“예?”
제이드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가 안 돼서 되물었고, 로더릭은 고개를 저었다.
“별 얘기 아니야.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시작하지.”
국왕이 검을 뽑자,기사단장도 사담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둘의 눈빛은 거의 동시에 변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건 국왕이었다.
로더릭은 어깨를 벨 것처럼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대각선으로 쳐올리며 왕의 검을 맞받았다.
합을 겨루는 동안 둘의 위치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의 검이 파고 들었다.
꼭 목을 노리는 것 같았지만,눈속임이라는 걸 알고 있던 왕은 허리 부근에서 그의 검을 찍어 내렸다.
제이드는 자세를 틀 며 그 힘을 그대로 바깥으로 홀려 보냈다.
두 사내는 하나같이 흰칠하고 건장했다.
넘치는 힘으로 검을 부딪칠 때는 박력이 있었고,유려하게 자세를 바꿀 때는 우아함이 넘쳐흘렀다.
감탄을 자아내는 광경이었지만, 사실 로더릭은 지금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제이드의 검로가 이렇게 훤히 보이는 거지.’
둘은 물론 유년 시절부터 검을 맞대 왔다.
서로가 즐겨 쓰는 기 술 같은 건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걸 서로 잘 알 때 승부를 판가름하는 것은 바로 실력이었다.
기사단장은 국왕이 카이엔 내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그들이 사사한 스승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무인으로서 타고 난 재질은 비슷하나,기술로 기사 단장을 꺾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그런데 로더릭은 지금 기사단장의 검을 모두 받아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형의 기운이 흐르는 방향이 느껴진다.
그러니 검이 어디로 향 할지도 예측할 수 있다.
로더릭은 공격하지 않고 방어적 으로 계속 그의 검을 쳐내기만 했다.
평소와 다른 수동적인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난,사실 많이 짜증이 난 제이드는 어릴 때의 말투를 썼다.
“뭐 해? 안 하고.”
하지만 국왕은 아예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왕도 이 상황이 무척 황당했기 때문이다.
“왜 이러는 거지?”
“뭐가? 아니, 뭐가 말입니까?”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더릭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검을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투지가 끓어올랐다. 해볼 만한 상대를 만 났을 때 생기는,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왕은 무거운 검을 크게 휘둘렀고, 기사단장도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국왕과 기사단장의 대련은 대부 분 몸풀기 수준에서 그치곤 했다.
진심이 될 것 같으면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대련을 멈추곤 했다. 최선을 다하면 양쪽 다 큰 부상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진심인 것 같았다.
검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나머지 주변에 섬광이 번 쩍이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이 몇 번이나 검을 맞댔는지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챙, 챙 하는 금속성으로 짐작할 뿐이 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수십 합을 주고받으며,정신없 이 몰아붙이던 로더릭은 마침내 빈틈을 발견했다. 왕의 검은 제이 드의 허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기사단장은 서둘러 방어했지만, 검날의 뾰족한 끝으로 블레이드 전체에 실린 힘을 막기란 어려웠다.
국왕은 기교로는 늘 기사단장보다 한 수 아래였다.
하지만 힘으 로는 누구에게도 딱히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왕은 그대로 제이드의 검을 밀어냈다.
국왕의 검은 제이드의 옆구리를 스치는 데 그쳤다. 깊은 곳을 베기 직전,가까스로 검로를 틀었기 때문이다.
침묵과 경악이 공존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국왕이었다.
가쁜 호흡을 정리하던 로더릭은 난감한 둣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순간 멈추는 게 잘 안 됐다.’
“미안하다. 오랜만이라 내가 너무 홍분했다.”
로더릭은 시종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의원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기사단장도 오랜 시간 검도를 걸어온 자였다.
그는 피가 흐르는 옆구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국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제이드의 눈에 온통 흥분이 가득했다.
“폐하.”
“어,왜. 많이 안 좋은가? 다시 한번 사과하지.”
“아닙니다. 이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피가 번져 가는 셔츠를 바라보던 로더릭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눈썹 끝을 긁적이던 왕은 다시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제이드는 왕을 붙잡고 늘어졌다. 몹시 간절한 얼굴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 건데. 근데 이것 좀 놓고 말해라. 사내새끼가 징그럽게 왜 이래. 왕후도 나한테 안 이러는데.”
왕은 미안해할 때는 언제고,핀잔을 주었지만 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제이드는 불세출의 기사이자, 카이엔이 낳은 최고의 검술가였다. 타고난 것이 반 이상이었지만, 그도 이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노력을 해왔다.
기사단장은 더 높은 경지를 위 해서라면 영혼을 팔 준비도 되어 있었다.
“실력이 몰라볼 정도로 느셨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사실 요즘 몸이 좀 가볍긴 해. 나도 정확 한 건 모르겠다.”
이걸 아내한테 물어봐야 하나. 왕후도 잘 모르는 눈치던데.
왕은 당혹감을 느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이번엔 진짜 의원을 부르기 위해 세 번째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재는 또 접견을 하는 중이었다.
왕족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사람을 만나거나 파티를 여는 것이다.
정치는 세를 이루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후궁 사람들은 접견의 성격이 자꾸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들 정치적 목적은 없었고 개인 상담을 하러 물밀 둣이 몰려오고 있었다.
데보라와 시녀들은 그게 너무 못마땅했다.
왜 너희 개인적인 스트레스를 왕후 폐하한테 푸는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돈이라도 내든가.
“왕후 폐하,오랜만에 뵙습니다.”
젊은 남녀가 나란히 인사를 하자, 이재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 았다.
언제 봤지,했는데 왕제의 귀국 축하연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재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으나,데보라는 세모눈을 떴다. 왜 왔는지 금세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니,너희 둘이 같이 들어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진짜 귀신은 시녀장이었다.
“네,오랜만이네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저희가 조만간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바쁘신 줄 압니다만 축하 받고 싶었습니다.”
소공작이 연인의 손을 잡고 즐겁게 말하자,자작가 막내딸은 쑥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이것들이 통 들어 먹질 않습니다.’
아,그 집안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남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동그란 눈동자가 예리하 게 빛나며, 이곳저곳을 훌었다.
이재는 결국 난감한 기분으로 뺨을 긁적였다.
‘좋지 않네.’
넘어야 할 게 산더미였다.
이재는 사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자주 겪어 왔다. 신당에 찾아 오는 남녀 중에 꼭 합이 좋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험이 많은 어른이라고 옳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영안이나 신기가 없으면서도,부모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지 무속인들보다도 굴곡을 먼저 예견하고 반대하곤 했다.
어린 이재는 그걸 보면 당혹스러워서 영산할매에게 묻곤 했다.
‘할매, 둘이 안 좋지 않아? 왜 안 말려?’
‘순진한 년. 년 귀신 보는 눈 말고 다른 눈이 트여야 혀. 어디
가서 이렇게 불쌍하게 산 티 내지 말어.’
‘무슨 얘기야?’
‘서로가 귀엽고 딱해 보이면 이미 끝난 거지. 넌 인력으로 저 둘을 떼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설거지나 혀. 정신 사납다.’
‘아까 다 했는데.’
이재는 영산할매가 참 야박하고 칼 같은 노인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 보니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가 귀엽고 애잔해 보이면 떨어질 수 없는 거였다.
힘들 걸 알면서도 나를 희생하고 싶어지면 끝이었다.
그때부터는 사주도 운명도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의 앞길을 누가 재단하고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세 치 혀에는 그럴 권리와 능력이 없다.
“두 분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리길 바라세요?”
그러자 소공작은 웃었다.
“그냥 축하해 주십시오. 제 외조부가 공작님과 연이 있어서 의심스러우실 줄은 압니다만,정말 축하가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빙긋 웃었다.
“제 축하 같은 게 과연 도움이 될까요?”
“분에 넘칩니다. 사실 저희가 축하한단 말을 거의 못 들어서요.”
그러자 이재의 미소는 조금 더 깊어졌다.
“또 축하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오세요.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시면 그 말을 해 줄 사람은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
“그러니 저는 다른 말을 해도 될까요?”
“예,뭐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기를 실었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축하였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지 마세요. 지금 두 분이 결정하신 대로,두 분이 원하는 길을 걸어 가시면 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재는 기를 거두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데보라와 시녀들은 왕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건 거의 성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