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8)
마음이 이끄는 대로-88화(88/134)
#88.
이재는 그 뒤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녀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시녀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데보라는 조심스레 물잔을 내밀었다.
“송구합니다, 왕후 페하.”
“응? 뭐가?”
“저런 개인사를 들고 올 거란 얘기는 없었기에 저도 예상을 못 했습니다.”
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 결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긴 한데……”
데보라도 이재와 같은 생각이었다.
결혼은 사람의 대소사 중 가장 중요한 축에 속하는 일이었다.
왕족에게 축하받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왕후가 심란해 보이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이재는 시종일관 덤덤한 얼굴이 었지만,옆에서 계속 보필해 온 데보라만큼은 미묘한 차이를 느 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결정한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던 왕후는 어딘가 쓸쓸한 기색이었다.
그때,시녀장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방문객이 또 한 명 찾아왔다.
“왕후 폐하,던컨 공작이 잠시 뵙고 싶다고 접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근위병이 난처한 둣 고하자,데보라는 다시 세모눈을 떴다.
아니, 이것들이 날을 잡았나. 근데 왜 공작은 자꾸 사전에 약속 없이 찾아오는 거야?!
우리 왕후 폐하가 호구인 줄 아나?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
그리고 데보라는 공작이 약속 없이 찾아오는 이유 또한 잘 알고있었다.
사전에 요청을 넣어 봐야 중간에서 퇴짜를 놓으니 그냥 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국왕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왕은 왕후와 공작이 마주치지 않게 하라고,몇 차례나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문제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 같은 왕후의 태도였다.
이재는 홈, 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천재일우. 좀처럼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
공작을 만나며 쓰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놓칠 수 없는 기회인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공작이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직접 불러들일 생각까지 하고있었다. 남편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오시라고 해. 기다리던 사 람들한테는 양해 좀 구해 줘. 아버지를 못 만난 지가 오래돼서 잠시만 얘기 나누겠다고.”
“……왕후 폐하.”
데보라는 이재를 간절한 표정으 로 바라보았다.
국왕이 이 얘기를 들으면 또 얼마나 짜증을 낼지 흰했다.
“외람되지만,그렇게 애틋한 부녀지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른 척 좀 해 줘.”
“……부디 독대만큼은 참아 주십시오.”
이재는 말없이 웃으며 빈 물잔을 내밀었고, 데보라는 결국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이재는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 공작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 시 후,공작이 접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빠르게 그의 얼굴을 훌었다. 관상을 살피기 위해 서였다.
이재는 고개를 기곳거렸다.
‘참 알 수가 없네.’
그녀는 이런 기분을 최근 들어 여러 번 느껴 왔다.
공작도 그러했지만,국왕도 왕제도 그랬다.
볼 때마다 관상이 변하고 있는것이다.
사람의 상이라는 것은 본래 변 하기 마련이지만, 또 이렇게 단시 일 내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 었다.
그런데 그녀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상이 바뀌고 있었다.
이재는 계속 의아하게 생각하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어쩐 일로 왕후 폐하께서 이 아비를 다 반가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재는 조금 움찔했지만,공작 은 크게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 닌 듯했다.
“요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안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꽤 오 랜 시간 침묵했다.
국왕의 말에 따르면 공작은 독사 같은 인간이었다.
이재는 어떻게 하면 의심받지 않고,그를 떠 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공작 또한 그녀를 관찰하는 둣 보였다는 것이다.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그녀가 시선을 불편하게 여길 때쯤,공작은 말문을 열었다.
“왕후 폐하.”
“네. 말씀하세요.”
“왕후 폐하는 다이몬 재건 운동이 향후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십 니까.”
접견장에는 싸늘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이런 식으로 거론하기에 는 너무나 민감한 화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후와 공작의 뿌리 는 그쪽이었다.
그러나 이재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공작의 말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왕후 폐하께서는 서부 국경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걸 처음 물었던 사람은 왕제의 벗이었나.
왜 자꾸 사람들이 나한테 저런 걸 물어보는 거지. 내가 무속인 티를 그렇게 많이 냈나.
하지만 아무리 용한 무당이라도 전쟁의 향방을 점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
“전 그저 이 환란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답했지만,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왕후 폐하는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요?”
공작을 떠보려던 이재는 오히려 지금 공작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단서를 발견하려는 사람처럼 그녀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상한 말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왕후 폐하,저는 아닙니다. 알버트도 아닙니다.”
“………”
“그렇다면 왕후 폐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뭐가 아니냐고요.”
조금 답답했던 그녀는 결국 추궁하듯 묻고 말았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던컨 공작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둘은 의 심과 불신이 섞인 눈으로 서로를 관찰할 뿐이었다.
둘 중 어느 누 구에게도 소득이 없는 눈싸음이 었다.
그녀를 날카롭게 주시하던 공작은 오랜 침묵 끝에 허리를 숙이고는 접견장을 빠져나갔다.
이재는 너무 당혹스러워서 시녀장을 바라보았다.
데보라도 잘 모 르겠다는 둣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독사를 떠보려던 여우의 계획은 그렇게 허무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왕은 오랜만에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이재는 식탁 위의 접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화나셨어요?”
“어.”
“………”
“언제 말 거나 했다.”
왕후가 공작을 접견했다는 소식 을 듣고, 국왕은 몹시 언짢아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왕후에게는 언성 한번 못 높이는 게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너,내가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제가 부른 적 없어요. 아버지 가 찾아왔어요.”
“……아버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기사단장과 시종장은 시선을 교환했다.
아버지 맞는데 폐하가 왜 저렇게 발끈하시지?
“왕후는 언제든 접견을 거부할 권리를 가진다.”
“………”
“속일 사람을 속여라. 어? 네가 이때다 싶어서 만난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이재는 입을 다물었다.
잘됐다고 공작을 불러들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주눅 들게 만드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고집을 피웠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그래라,응?”
“죄송해요.”
로더릭은 깊은 한숨을 쉬며 손 을 내밀었다.
됐고, 접시나 빨리 내놓으란 뜻이었다.
눈치를 보던 이재는 얼른 접시 를 내밀었다.
유부남은 오늘도 아내의 고기를 대신 썰어 주며 투덜거렸다.
“내가 괜히 이래?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
“………”
“넌 참 개미 한 마리도 못 잡게 생긴 게 희한하게 용감하다.”
이재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으 려고 했다.
지은 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의 말에서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 지자,그녀는 되묻고 말았다.
“……제가 왜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로더릭은 그녀를 아래위로 훌어보았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뜻이었다.
아내는 너무 조그마해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사실 국왕은 그녀의 손목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에 젖곤 했다. 저건 내가 힘 조절을 조금만 잘못해도 부러질 수 있겠구나,하는 위기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힘 은 신체에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금 뾰로통한 얼 굴로 말했다.
“폐하 눈엔 제가 되게 하찮아 보이나 봐요.”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한 적은 없는데.”
그는 즉시 변명했지만,이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듣는 귀가 많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잠깐만 가까이 오라는 둣 왕에게 손짓했다.
왕은 이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그녀는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속삭였다.
“폐하,제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원귀를 때려잡았는지 아세요?”
“……나야 모르지.”
“전 사실 이 차가운 귀신 사회의 잔혹한 학살자예요. 아시겠어요?”
“………….”
“다들 절 보면 벌벌 떨면서 도 망가기 바쁘다고요. 물론 예외는 있어요.”
사람들은 국왕과 왕후가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궁금해했다. 귀를 종긋 세워 보았지만,왕후는 원래도 말을 조용조용하게 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마음먹고 속삭이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무척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더니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왕은 그때부터 어깨를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이재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콕 찔렀다.
“지금 비웃으시는 거예요? 진짜 예요.”
“어, 그래.”
“아니,진짜라니까요?”
“그래, 알았다고.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나?”
“근데 왜 웃어요?”
“………”
“사실 좀 허세이긴 했어요. 티 많이 나요?”
로더릭은 결국 얼굴올 가린 손을 떼고 웃음을 터뜨렸다.
왕은 쉽사리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이재는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뿌듯함마저 느껴지는 미소였다.
“페하,기분 풀리셨네요?”
“애초에 너한테 화난 적도 없다.”
“그럼 저 괜한 짓 한 건가요? 그래도 폐하가 웃으셨으니까 전 만족해요.”
“그것 참 고맙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네.”
왕은 이마를 감싸 쥐며 뒤늦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미칠 지경이었다.
저런 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왕후는 혼자 귀엽고 웃기고 불쌍하고를 다 해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왕은 연신 한숨을 쉬다가 내려놓았던 기혼자의 도리를 다하기로 했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아내의 고기를 썰어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