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89)
마음이 이끄는 대로-89화(89/134)
#89.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잠시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방으로 돌 아왔다.
로더릭은 이재와 조금 더 대화 를 나누고 싶었다. 아내와 나누는 대화는 부인할 수 없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요즘 자신보다도 바쁜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또 일기장을 펼쳤다.
“그거 그만 보라니까 그러네.”
“그냥 제 취미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로더릭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별로 좋은 내용도 아니던데 왜 자꾸 보고 그래.”
그러자 이재는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 보셨어요?”
“그래.”
‘근데 왜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럼 내가 뭐라고 해야 하지?”
로더릭은 해일리 던컨의 개인사에 더는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작은 던컨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던컨가는 그에게 남이었다.
하지만 왕은 아내가 저런 음울한 내용의 일기장을 보고 있는 건 마음이 쓰였다.
그는 결국 이재의 손에서 일기장을 벳어 들었다.
그리고 협탁에 툭,던져 놓았다.
“그만 봐. 난 네가 이런 우울한 거 보는 거 싫어.”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국왕이 요즘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녀도 왕만 보면 걱정 되고,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거기 에 더해 귀엽고 좋기까지 했다.
로더릭은 이재를 바로 눕히며 팔베개를 해 주었다.
답답하거나 난감한 일이 있을때,본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것은 왕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러 나 그에게는 어느덧 새로운 습관 이 하나 생겼다.
로더릭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가 짧은 살구색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동그란 이마에 입을 쪽 맞추었다.
“부인.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네,그러세요.”
“네 이름은 무슨 뜻이야?”
멈칫하던 그녀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선뜻 물어보라고 했지만, 왕의 질문이 그녀에게는 생각보다 예민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재는 왕의 이름이 성명학적으로는 썩 좋지 않지만,그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녀만큼 팔자와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이도 드물 것이다.
그녀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왕은 또 그걸 기민하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가 눈썹 끝을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곤란한 질문이었나?”
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사연 많은 이름이었지만,왕에게 알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다른 존재.”
“다른 존재?”
다를 이,있을 재.
이 이름은 부모가 그녀에게 남겨 준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름자로 미루어 짐작건대,그 녀의 부모는 그녀의 미래를 내다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재는 자신의 부모 중 어느 한쪽은 역술인이 아니었을까,생각하고 있었다.
“네,다르게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그러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네.”
“……그런가요?”
뜻밖의 감상에 그녀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로더릭은정말 좋은 이름이라는 둣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응. 네가 특별하다는 뜻 아닌가.”
“폐하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뭐야,그게.”
이재는 새로운 걸 알았다는 둣 말갛게 웃었고, 로더릭은 손등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사실 그는 정말로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
로더릭이 일기장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 건, 단지 죽기 전 헤일리의 일기가 음울해서는 아니었다.
맞고 싶지 않다는 구절을 읽으니 공작저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아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장 거리 상인에게 ‘얘는 아직 잘 막지도 못하는데?’ 따지던 모습도 떠올랐다.
세상 온화하던 아내는 곰 같은 덩치의 사내와 공작 앞에서는 좀 처럼 감정 조절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걸 물어도 괜찮은 걸까.
로더릭은 몹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런데 이재.”
“네.”
“어,그러니까……”
“뭔데 그러세요.”
왕은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였고, 이재는 의아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을 긁적이던 그는 말했다.
“혹시 전에 누가 너한테…… 함부로 대했나? 그,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재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몹시 당황한 얼굴 이었다.
그녀는 이제 와서 그런 것에 상처받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그 렇게 박복한 티를 많이 냈나,당혹스러웠을 뿐이었다.
영산할매가 어디 가서 불쌍한 티 좀 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
“………”
“그랬다고?”
로더릭은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긍정이나 다름없는 반문을 내뱉자, 그때부터는 속에서 시커먼 뭔가가 끓기 시작하는 것 을 느꼈다.
“그래서, 그 개자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데? 응?”
“………”
“이재. 내가 물어봤잖아. 남편 한테 대답 안 해 줄 건가?”
“폐하,신경 쓰지 마세요. 다 지난 일이에요. 별거 아니었어요.”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그녀를 살살 달래서 답을 들으려던 왕은 급발진을 하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울컥하자 이재는 움찔했다. 아,아니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나셨죠?
“폐하,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미안해요.”
“네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버럭, 하며 시작한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이재가 몹시 놀란 둣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 었기 때문이다.
잠시 얼굴을 감싸 쥔 로더릭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야. 내가 지금 속에서 뭐가 너무 올라… 미안하다.”
하지만 로더릭은 분이 가라앉질 않아서 잠시 그녀를 외면했다.
너 무 화가 나니 손이 다 떨려 오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내 여우한테 그런 일 이 있었던 걸까.
너는 쭉 행복한 것만 보면서 살다가 나한테 왔어야 했는데.
“언성 높여서 미안하다. 그러니까 넌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무 때나 미안하다고 해. 순간 욱했잖아.”
“그러셨어요? 그럼 미안합니다 말고…… 감사합니다?”
“농담할 기분까진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닌데. 아무튼 저 대신 화내 주셔서 감사하네요. 절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로더릭은 기가 막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빙긋 웃고 있 는 것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재를 정말 어째야 해.
“너,이런 얘기 하면서 웃지마. 네 남편은 가슴 찢어질 것 같으니까.”
“………”
“차라리 욕을 해라. 속도 없어? 그런 거지 같은 새끼를 너 혼자 용서하고 그러지 말라고.”
그러자 이재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로더릭은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신은 속이 쓰리고 열이 올라 죽겠는데, 그녀는 정말 아무 렇지 않은 둣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세상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던 이재는 고개를 저었다.
왕이 지금 너무 큰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는 저를 잘못 보고 계세요.”
“내가? 뭐를.”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폐하,저는 이런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어,해라.”
“네,그럼 폐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드릴게요.”
“………”
“폐하,전 그 사람들을 용서한 적이 없어요.”
“들? 그 사람들? 이런,씨.”
로더릭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이재는 찔끔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왕은 또 한 번 속이 부글 부글 끓는 것을 느꼈지만, 말을 끊지 않기 위해 꾹 참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이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용서는 신이 할 일이고요. 전 그냥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을 뿐이에요. 저는 성자가 아니거든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아무도 그걸 강요할 수 없었다.
용서를 해야만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용서하지 않는다고 모진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심판은 법과 신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재는 이유 없는 돌맹 이를 던진 사람들을 이해할 생각도,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전에 저희가 강에 갔을 때요.”
“어.”
“전 사실 그때 폐하가 많이 좋아졌어요. 그날 폐하가 네 자신에게도 관용을 베풀라는 말을 했거든요. 기억나세요?”
“응”
“그 말이 내심 듣기 좋았나 봐 요. 저 유치하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나니 화해하고,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폐하,제가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그녀가 용서하고 싶은 것도,용 서할 수 있는 것도 한 명뿐이었다.
“그게 누군데.”
“저요.”
“과거가 좀 안 좋았다고,제 현재를 함부로 여겼던 바보 같은 제 자신이요.”
로더릭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말을 잃었고,이재는 그런 왕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저한테 실망하셨나요?”
“내가 왜.”
“제가 생각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녀가 농담조로 물었지만,로 더릭은 웃지 않았다. 그저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푸욱, 쉬었다.
“아닌 거 뻔히 알면서 그런 식 으로 사람 속 뒤집지 마라. 나쁜 버릇이야.”
이재는 홈,웃었다.
“그럼 제가 사실은 얼마나 유치한 인간인지도 알려 드릴까요?”
“하고 싶으면 해 보든가.”
“폐하가 저 대신 화내 주시니 까,뭔가 위로가 돼요.”
로더릭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사실은 어이가 없다는 실소에 가 까웠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유치함의 척도가 나랑 많이 다 르네. 부인,진짜 유치한 건 이런 거야.”
왕은 팔을 뻗어 협탁 위에 있던 일기장을 집었다.
그리고 방 한구석으로 획, 집어 던졌다.
“이건 금지다.”
“……어? 왜요.”
“앞으론 좋은 것만 봐. 차라리 역사서를 읽어.”
“폐하는 역시 다 하지 말라고만 해요.”
이재는 남의 일기장이 구석에 처박힌 게 마음에 걸려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로더릭은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내일 주워 오면 큰일 나냐? 다시 주워다 줘?”
“………”
“근데 넌 읽지도 못하면서 그런 책은 또 왜 빌려 왔어?”
“………”
“혹시 나보고 읽어 달라는 무언의 시위인가?”
그녀가 빌려 온 역사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건 왕족들만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국왕이 모를 뿐이지,그 녀에게는 그걸 읽을 수 있는 고성능 리더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앙칼지고 귀여운 리더기였다.
하지만 이재는 오늘만큼은 그 사실을 함구하기로 했다.
그를 속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왕이 지금 기대감에 찬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진짜 그런가? 고민하던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읽어 달라면, 읽어 주실 거예요?”
로더릭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둣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코 도롱도롱 골 때까지 읽어 줄게.”
“정말?”
“그래. 며칠 전에 빌려 왔던데, 왜 읽어 달라고 안 하나 기다렸잖아.”
이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녀에게는 뜻하지 않게 또 하나의 리더기가 생기고 말았다.
이 번엔 몹시 잘생기고 힘도 좋은 리더기 였다.
일국의 왕을 고작 이런 용도로 취급해도 되는 걸까,싶긴 했다.
그러나 국왕 본인이 원하는 것 같으니 괜찮은 게 아니겠냐고, 그 녀는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