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
마음이 이끄는 대로-9화(9/134)
#3장. 당신들은 누구시길래
#9.
로더릭 페루스 블레이크.
국왕의 미들 네임을 부르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카이엔 신민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군림하는 맹수. 그건 왕의 별명이자,곧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에게는 또 하나의 별칭이 있다.
미친 맹수.
귀족들 사이에서나 은밀히 회자 되는 것으로 기원은 역시 그의 광증이었다.
이재와 시녀들은 이른 아침부터 바깥에 나와 있었다.
국왕과 기사 들이 이박 삼일의 일정으로 사냥을 떠나기 때문이다.
왕실은 전용 사냥터를 소유하고 있었고,역대 많은 왕들이 그 행위를 즐겼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로더릭만큼 사냥을 자주 떠난 왕은 없었다.
로더릭은 자신에게 광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고,가끔은 통제할 틈도 없이 솟아나는 그 파괴적인 욕구를 이렇게라도 덜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멀찌감치 서 있는 이재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심경은 복잡했다.
왕은 확실히 성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침실은 흉가이자 공동묘지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이재는 꼭 하고 싶은 다른 말이 있었다.
당신은 살생을 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불자같은 말은 그와 기사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하게 들릴 것인가?
경건해 보이기는 하겠지.
‘왜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지.’
정말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이재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준비를 끝마친 로더릭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헤일리 던컨.”
“네?”
이재가 되묻자 그는 말했다.
“거기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이 쪽으로 좀 와 봐.”
그러나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그는 본인이 직접 말머리를 돌려 이재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불가의 십악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그는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주변은 성 안에서보다는 훨씬 말끔한 편이었다.
몇 안 되는 것들마저 이재와 가까워지자 획 멀어졌다.
그녀는 노파심과 불안은 접어 두기로 했다.
“넌 나한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
“……무슨 말이요?”
그는 말고삐에서 손을 떼고 몸을 약간 비스듬히 젖혔다.
“뭘 좀 잡아와 달라든가.”
이재는 웃었다. 살생하지 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어이가 없어서였다.
“죄송한데, 폐하. 저는 그런 건 전혀 관심……”
“그럼 잘 갔다 오라든가.”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래.”
하지만 로더릭은 아직도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딘가를 웅시하고 있던 그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넌 말고삐에 매어 줄 손수건도 하나 없나?”
로더릭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시녀 하나가 기사의 활에 손수건을 매어 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자 기사는 말 위에서 허리를 굽혀 시녀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크게 베어 물었다.
너무 다정한 나머지 소름이 끼치는 광경을 본 이재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로더릭은 굳이 덧붙였다.
“그냥 해 본 소리야.”
“………”
“나도 정인 있는 아내한테 그런 거 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이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옆에 있던 제이드는 이재보다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이 가만있는 왕후한테 꼭 시비를 거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입을 다물었네.”
“……가관이라면서요.”
“왜 뒤는 빼먹어. 그게 훨씬 낫다고도 했잖아.”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이재는 적당히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다녀오세요. 어디 다치지 말고요.”
미치지도 말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꾹 삼킨 이재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가 대화를 싹둑 자르자 그는 픽 웃었다. 진짜 가관이라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또 딱히 불쾌해서 짓는 표정처럼은 안 보였다.
그녀도 이제는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본 성격과 원귀가 충동질할 때 보여 주는 모습은 괴리가 너무 컸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귀들은 부정적인 생각,음습한 생각을 하는 사람,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재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로더릭은 말했다.
“물가 같은 데는 가지 마라.”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재가 표정을 굳히고 그를 바 라보자,방금 전까지는 나른해 보였던 그의 눈동자도 예리하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재는 이것이야말로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은 지금 함부로 죽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이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
국왕이 말고삐를 내리치자,그의 기사들은 그 뒤를 쫓았다.
「499년 2월 7일
아버지가 국왕 폐하와 결혼을 하라고 말했다.
나는 로렌스를 사랑하는데.
아버지는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이재는 오늘도 헤일리의 일기장을 보고 있었다. 석 달 전쯤의 일기였다.
그녀는 헤일리의 일기를 순차적으로 읽는 것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헤일리의 일기가 너무나 불친절하고 단문이었기 때문이다.
문장을 심히 아껴 썼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나무를 연민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죽기 싫었으면서 죽긴 왜 죽어, 이 바보야.”
입술을 삐죽인 이재는 일기장을 덮어서 서재 서랍에 다시 넣어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강이재는 어쩔 수 없는 운명론자였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팔자를 피해 갈 수 없다.
사소한 화는 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생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죽고 싶지 않다고 써 놓았지만,헤일리 던컨은 결국 죽을 팔자라서 죽은 것이다. 냉정하지만 운명론자인 이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모르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세간에는 운명애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까지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정확하게’ ‘어떤’ 고난이 ‘얼마나’ 주어질지를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다가올 고통의 깊이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신의 팔자를 한 번도 긍정해 본 적이 없는 이재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서재를 나섰다.
그러자 곧바로 시녀들과 기사들이 따라 붙었다.
이재는 데보라에게 물었다.
“산책하고 싶은데 좀 걸어도 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있 으십니까?”
“아니,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이 렇게 목적없이 막 돌아다녀도 되나싶어서.”
그러자 데보라는 상냥하게 웃었다.
“왕후 폐하는 성 안에서 어디든 가실 수 있습니다. 폐하만 계셨더라면 폐하 침실도 가실 수 있으십니다.”
다소 짓궂게 웃는 그녀가 어른들의 농담을 했다는 것을 느낀 이재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우,거기는 내가 싫은데.”
그러자 뒤따르던 사람들은 귀를 종긋 세웠다.
사실은 농담을 하면 서 왕후를 조금 떠보고 있던 데보라는 물었다.
“어째서요?”
“그냥 뭐, 조금…… 무섭다고 해야 되나.”
누가 즐거워야 할 산책을 흉가로 가겠어. 나는 유튜버가 아니란 말이야.
이재는 그런 의미로 얼버무렸지만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봤으니 왕이 무서울 만도 했다.
결국 이재는 뚜렷한 목적지 없 이 성 안 곳곳을 배회하다가 잘 관리된 정원에 멈춰 섰다.
정원 한복판에는 지름이 어지간한 저택만큼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그러자 로더릭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물가 같은 데는 가지 마라.’
호수를 뻔히 바라보던 이재는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화단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 게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당신이 가라고 등 떠밀어도 난 원래 물가는 안 가요.”
그러면서도 그녀가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재는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 지는 것을 느꼈다.
불온한 기운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강대한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이재는 인간의 넓은 시야각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꿋꿋이 앞 만 보고 있는데도 오른편에 커다란 백마가 보였던 것이다.
환장할 지경인데, 남자는 이제 그 백마에서 내려 이재 옆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식을 올릴 때 보았던 커다란 서양귀였다.
로더릭이 몰고 다니는 원혼은 수가 많을 뿐이지 이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영산할매가 모시는 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기세에서 이미 압도된 이재는 바싹 얼어붙었다.
그냥 일어나서 갈까? 역시 그게 제일 좋겠지.
이재가 힐끔 보자,시녀들과 기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거나 또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서양귀가 말을 걸었다.
-너, 나 보이지?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말 걸지 말아 줄래요?
난 사람이고 당신은 귀신이잖아요. 수호령도 귀신은 귀신이잖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엄연히 다른데 자꾸 너희들 맘대로 선을 넘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이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게 답이 되었는지 옆에서는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넌 사실 헤일리 던컨이 아니잖아.
“………”
-지금 로더릭이 오고 있어.
이재는 열심히 못 들은 척을 했다.
-많이 다쳤나 본데. 아직 후계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나.
그 말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선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하던 이재는 데보라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자 둥 뒤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봐. 다 들리네.
울컥한 이재는 뒤돌아섰다.
그러자 그녀한테도 어떤 기백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지금 장난치는 거예요? 사람 목숨 가지고? 너흰 인간이 그렇게 하찮아?!”
푸른 눈의 혼령은 어깨를 으쑥하더니 자신의 기를 과시해 보였다.
“만약에 장난이면 진짜……”
“………”
“그렇다고 제가 어쩔 수 있다는 건 아니었어요.”
바로 꼬리를 내린 이재는 그를 등지고 데보라 쪽으로 후다닥 달려 갔다.
둥 뒤에선 그녀만 들을 수 있는 공기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