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0)
마음이 이끄는 대로-90화(90/134)
#90.
국왕의 서재에서는 보고가 한창 이었다.
기사단장과 군부 귀족의 얼굴은 말 그대로 흙빛이었다.
“방화라.”
로더릭은 서부 국경에서 온 서신을 읽지도 않고 책상 위에 툭 집어던졌다.
군부를 총 책임지고 있는 노귀족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왕은 그를 뚫어져라 옹시했다. 차분하기만 한 푸른 눈동자가 무서웠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한다더니, 그 말이 옳았네.”
“………”
“그래도 성문은 안 열렸잖나.”
로더릭은 재미있다는 둣 피식 웃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이건 뭐, 군대가 아니라 짐승 소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송구합니다, 폐하.”
군부 귀족과 기사단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을 뿐이지, 왕은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저 좀 어이가 없 을 뿐이었다.
왕의 마음속에는 이게 인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확신이 점점 자 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은 어떻게 됐나.”
“성으로 호송 중이라고 합니다.”
로더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앞에 딱 앉혀 놔. 아니,지하 감옥에 앉혀 놔라. 직접 심문하겠다.”
“예,알겠습니다.”
“할 말 끝났으면 나가 봐. 1기 사단장은 남고.”
식은땀을 홀리던 군부 측 인원들은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갔다.
왕과 단둘이 남은 기사단장은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 제이드는 지금 몹시 면구스러웠다. 그가 직접 발탁하고, 추천한 서부군 대장이 그럴듯한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송구합니다.”
“뭐가.”
“됐어.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니까.”
국왕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고, 제이드는 몹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예상한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국왕은 언제부턴가 통 알 수 없는 말을 하며,왕후와 귓속말을 속닥거리기 일쑤였다. 마치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제이드.”
“예,폐하.”
“네가 할 일이 있다.”
제이드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국왕의 말은 이 번에도 예상 밖이었다.
“왕제의 행방을 좀 쫓아 봐.”
“………….”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 정도는 너도 알고 있지?”
“예,폐하. 그런데…… 왕제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
국왕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둣 턱을 매만졌다.
로더릭은 요즘 또 다른 퍼즐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아내에 대 한 퍼즐을 다 맞추고 나니,이번 에는 서부 국경이 문제였다.
이건 또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 하는 걸까. 비어 있는 퍼 즐 한두 조각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왕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오갔다.
그 시각,이재는 국왕의 방 앞 에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녀는 혹시라도 근위병들이 문을 열어 주려나 싶어 서두른 참이었다.
이재는 왕이 없을 때를 틈타 결계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요즘 국왕은 그녀의 안색이 조금만 창백해져도 호흡,심박, 체온을 다 확인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환자는 분명 국왕이었는데,그는 언제부턴가 의원의 위치에 가 있었다.
“나 먼저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왕후가 조심스럽게 요청하자, 근위병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들 도 친왕파 단신 좌장을 복도에 세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근위병들은 결국 고개를 조아리며, 몹시 곤란한 둣 말했다.
“왕후 폐하,정말 죄송합니다. 의자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면 잠시 게스트 룸에 가 계시는 건……”
이재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괜찮아. 기다려야지, 뭐. 사실 내가 일부러 일찍 왔거든”
그녀는 금세 미소 지으며 근위 병들과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몹시 송구스러워하던 근위병들은 왕후의 온화한 태도에 긴장을 풀고 말았다.
그건 시녀들에게는 무척 익숙한 광경이었다.
저런 일은 유독 접견장에서 자주 벌어지곤 했다.
귀족 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왕후와 대화를 나누다 자신의 개인 사를 술술 풀어놓곤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따라 국왕도 꽤 일찍 방 앞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혹시라도 기다릴까 봐서 두른 결과였다.
로더릭은 복도 끝에서부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재와 근위병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 지난 번에도 저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 뭐 해.”
“폐하.”
왕을 발견한 이재는 반가운 얼 굴로 다가갔다.
그러자 로더릭은 한 팔로 그녀의 허벅지 뒤를 감더니 훌쩍 들어 올렸다.
이재는 으악! 하며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었다.
굉장히 거슬리는 게 있었던 로더릭은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재와 대화를 나누던 근위병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물었다.
“우리 왕후께서 뭐라던가?”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근위병들에게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왕후 볼 때,그 눈알 관리 잘하라고.
로더릭은 차가운 시선으로 근위 병들을 훌다가 문 열라고 턱짓을 했다.
국왕의 건장한 어깨에 팔을 걸 쳐 놓은 이재는 그의 귓가에 속 삭였다.
“폐하,내려 주세요. 코앞인데 왜 갑자기 사람을 들어 올리고 그래요?”
“그렇게 갑자기 귀에 대고 숨 쉬지 마.”
남들 들으란 둣이 말한 로더릭 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둥 뒤에서 문이 닫히자,그녀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는 몹시 불만스러운 둣 말했다.
“너 말이야.”
“네?”
“병사들이랑 기사들한테 말 좀 적당히 붙여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로더릭은 깊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좁혔다.
“콧대가 잘생겼다느니,그런 얘기는 대체 왜 하고 다니는 건가?”
“………”
“저 시커먼 놈들이 오해하잖아.”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에 그렇게 오해의 여지가 있었나? 난 분명 재물운이 따르는 코라는 얘기를 덧붙였던 것 같은데.
당혹스러워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요. 혹시 제가 홀리고 다녔다는 얘기인가요?”
그 말에 왕은 인상을 심하게 구겼다. 이번엔 제대로 짜증이 밀려온 표정이었다.
“어디서 그딴 거지 같은 표현들은 자꾸 듣고 오는 건지. 남편한테 말 조금만 더 예쁘게 하자?”
“네가 홀리긴 뭘 홀려. 넌 떨어진 것도 다 줍고 다녀. 내가 마음이 너무 알뜰하다고 했던 건 잊어버렸나?”
“………”
“네가 문제가 아니라 재네들이 무식해서 신호를 이상하게 받는거다.”
물론 로더릭은 여전히 언짢은 구석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아내가 스스로에게 저런 표현을 쓰는 게 더 마음에 안 들어서 금 세 말을 바꾸었다.
이재는 몹시 황당한 얼굴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보고 뭐 어떡하라는 거야? 지금 누가 잘못했다는 거야?
“그럼 제가 잘못한 게 아닌데, 폐하는 왜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다 내 잘못이라고 치자.”
로더릭은 그녀를 다시 안아 올렸다.
그는 이재를 침대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따라 올라왔다.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이재는 곧 웃음을 홀릴 수밖에 없었다.
왕이 그녀를 다리 사이에 끼워 놓고 책을 펼쳐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동화책이라도 읽어 주려는 듯한 자세였다.
폐하, 이런 로망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녀는 둥 뒤를 힐끔 바라보았고, 로더릭은 기다렸다는 둣 입을 맞추었다.
“뒤에 기대.”
이재는 몸에 힘을 풀고 그의 가슴팍에 둥을 기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조금 더 바싹 당겨 왔다. 이재는 어깨 위를 다시 힐끔 바라보았다.
“폐하.”
“어,왜.”
“이 소파는 마음에 들어요.”
로더릭은 피식 웃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맘에 드는 게 하나라도 있어서.”
“베개도 마음에 들어요.”
“그것 참 고맙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소리를 홀렸다.
국왕은 그 뒤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듣기 좋은 음성으로 읽어 주었다.
무척 편하긴 했지만,이재는 솔직히 좀 미안했다. 이런 건 바쁜 폐하 말고,안 먹고 안 자고 놀긴 하는 함의 정령이 읽어야 하는데.
“다이몬력 497년,다이몬 제국의 폭정은 심해졌다. 인근 국가들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으며, 제국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3년 전쟁의 기원이……”
이재는 계속해서 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때 다이몬 황가와 함께 대륙을 지배하던 다섯 귀족 가문. 일리아스,슈미트는 자취를 감추었고, 멜런,러셀은 멸문하였으며 대륙에는 던컨만이 남았다.”
“……일리아스?”
그녀가 갑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로더릭은 읽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아니, 왜 이렇게 익숙하죠?”
“왕국사 책 아무거나 펼쳐도 나오는 가문이니까.”
이재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 지만,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때부터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4대 왕,라이언 블레이크께서는 적극적인 민족 융합 정책을 펼치셨다. 그것은 사실 민족 융합 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 능력에 대한 경계 때문이니 유의하라.”
“5대 왕, 노엘 프로비시오 블레이크는 서거 전 유언했다. 앞으로 대륙에서 신비한 힘은 사라질 것 이다. 그것이 천의이자 천기. ……그러나 홋날 난세가 도래했을 때,사라졌던 모든 힘은 다시 발현되리라.”
“……난세?”
이재가 다시 한번 말을 끊자, 로더릭은 피식 웃었다.
“지금 나보고 읽으라는 건가,말라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로더릭의 손등을 잡았다.
잠깐만 말 시키지 말고 기다려 보라는 뜻이었다.
이상하게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던 이재 는 곧 그게 언젠가 소년왕이 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도 지금이 큰 물줄기가 바뀌는 시점인 것쯤은 알잖아. 난세는 원래 혼란스러운 법이다.
-그럼 네가 난세의 영웅이 되어 보든지. 멋진 일이잖아?
“난세. 그렇구나.”
지금이 5대왕이 말한 난세인 거였다. 사라졌던 힘이 다시 발현 되는 시기.
국왕의 대운과 나라의 국운이 한꺼번에 바뀌는 지금이 난세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폐하.”
“왜 자꾸 그래.”
“다섯 가문의 힘이 뭐라고 했지요?”
“우리 왕후는 질문이 참 많은 학생이었네.”
로더릭은 웃음을 홀렸지만,이재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폐하,저 진지해요. 제발 장난 치지 말고요.”
그러자 이재를 빤히 바라보던 로더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 장을 다시 넘겼다.
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절은 보통의 왕국사 서적에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왕국민들은 건국 신화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백여 년 전에는 대륙에 실존했던 힘.
“블레이크 왕가의 힘,풀고르, 성검.”
“일리아스의 힘은 에보카티오, 소환. 슈미트의 힘은 데펜시오, 결계. 멜런의 힘은 액소르키스무스, 영의 사멸. 러셀의 힘은 룸포, 파훼.”
“던컨의 힘,프로비시오. …… 예지.”
이재는 충격에 젖은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재의 머릿속으로는 갑자기 몇 달간 수도 없이 읽었던 해일리 던컨의 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꾸만 이상한 꿈을 꾼다. 무섭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다.
-어머니는 딸기 케이크를 사 오시겠지만…….
-나는 그게 그의 마음처럼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무서운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하지만 들어주시지 않을 테고….
-아버지가 내릴 선택이 나와 로렌스의 운명을 바꿔 줄 수는 없다.
이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재는 그 순간 예쁜 백치라고 조롱받던 헤일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헤일리.
너는…… 예지자였던 거구나. 그게 진짜 너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