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1)
마음이 이끄는 대로-91화(91/134)
#14장. 같이하는 퍼즐 놀이
#91.
이재는 오랜만에 침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발목을 까딱까딱하던 그녀는 협탁 위에 놓아둔 헤일리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대화 한번 나누어 보지 못했지만, 이재는 헤일리가 꼭 친구처럼 느껴졌다.
“헤일리. 괜찮은 거지? 그래도 거기선 네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강이재와 헤일리 던컨은 분명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영산할매처럼 비범한 사람에 비 할 바는 아니었지만,이재도 가끔은 사람의 미래와 어려음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재는 비로소 헤일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헤일리가 사람들에게 조롱받아 왔는지. 왜 그녀의 일기가 별 내용 없는 단문의 나열인지.
어쩌면 헤일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미래 를 궁금해하면서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알고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내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다가올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바꿀 수 없다는 좌절감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녀가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거라곤 아무 의미없는 말들 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내릴 선택ㅇㅣ 나와 로렌스의 운명을 바꿔줄 수는 없다.
-물가를 조심해라.
헤일리. 네 생을 관통한 큰 물 줄기는 무엇이었을까.
너를 정말로 좌절하게 한 운명은 무엇일까.
이재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비밀들을 혼자 짊어진 채,외롭게 죽어 갔을 그녀가 가엾기만 했다.
일정을 마친 국왕이 방문을 열 고 들어온 건 이재가 일기장을 소중히 품에 안았을 때였다.
왕의 손에는 지난번에 읽다 만 고서의 필사본과 왕실 계보가 들려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오늘은 뭐 했어?”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로 더릭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가 방금 전까지 뭘 읽고 있었는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팔 짱을 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남편 부탁 참 안 들어주지 싶다.”
“폐하. 이건 어쩌면 칠흑 같은 미래 속에 한 줄기 빛일지도 몰라요.”
암중유광.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과정.
그러나 국왕은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칠흑 같은 미래라. 혹시 일기 쪽이 조금 더 칠흑 같다고 생각 하는 건 나뿐인가?”
이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로더릭은 금세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폐하,전 예전에 이걸 읽으면 거리감을 느끼곤 했단 말이에요.”
전 정말 저한테 난독증이 있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이젠 아니에요.”
“……그래,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알아.”
사실 로더릭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헤일리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듯하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던컨가에 전해지던 가문의 능력.
하지만 그는 아내가 저 음울한 내용에 동질감을 느끼는 게 속이 쓰릴 뿐이었다.
로더릭은 한숨을 쉬며 침대로 올라왔고,이재는 웃음을 홀리며 일기장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곧 지난번처럼 이재를 다리 사이에 앉히며,역사서를 펼쳐 들었다.
왕의 머릿속에 새롭게 자리 잡 은 기혼자의 도리였다.
그러나 이재는 갑자기 책장을 넘기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 녀는 어둑해진 창밖을 힐끔 바라 보았다.
그러고는 국왕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피곤하진 않으세요?”
“응? 전혀. 왜?”
“폐하,이거 정말 계속 읽어 주실 거예요?”
로더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아내가 왕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마저 읽어야 할 게 아닌가? 그렇게 지루했나?”
“………”
“미안, 아직 구연동화까진 연습을 못 했어.”
이재는 웃음을 터뜨렸지만,역시 미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책장은 아직도 삼분의 일 지점에 멈춰 있을 뿐이다. 선대왕들이 남긴 오백 년간의 기록은 그만큼 방대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온 왕한테 계속 일거리를 얹어 주는 게 싫었던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페하,사실은요.”
“어,말해.”
이재는 선반 위에 놓아둔 나무함을 힐끔거렸다.
함의정령은 집 안에서 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함에 몇 차례 기를 불어넣어 준 뒤로는 자신의 집이 몹시 안락해졌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르면 또 신이 나서 나오겠지.
“이거 꼭 안 읽어 주셔도 괜찮아요. 저녁엔 그냥 쉬시라고요.”
“………”
“사실 저 이거 읽을 수 있거든요.”
그러자 그녀의 말이 몹시 이상하게 들렸던 왕은 가만히 책을 덮었다.
“……네가 이걸 어떻게 읽어?”
“따로 읽어 줄 수 있는 영이 성에 살아요. 원래 유서 깊은 고성에는 그런 게 한둘쯤 있기 마련이거든요.”
국왕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꽤 오랜 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이재는 어느 순간부터 힐끔거리며 왕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떨떠름 한 쪽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녀는 난감해졌다.
역시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됐 던 걸까. 말실수를 한 건가.
물론 국왕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다.
경험도 있었고,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자기 집 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말에 기 분이 좋을 사람은 드물었다.
조금 불안해진 이재는 변명하듯 말했다.
“역시 좀 찜찜하신가요? 악귀 같은 건 아닌데.”
“가끔 얄입긴 한데 착한 영이거 든요. 제가 부탁하면 들어줄 거예요.”
그러자 국왕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떨떠름해졌다.
떨떠름하 다 못해 이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원귀의 공격에도 삼 년간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통 담력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왕의 입에서는 이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홀러나왔다.
“……그거 너랑 친해?”
“네?”
“책을 읽어 줄 정도면 다정한 사이라는 뜻 아닌가.”
“네,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함의 정령은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 존재였다.
그녀가 뱀 귀신 앞에서 떨고 있을 때는 힘을 북돋워 주었고, 자신이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국 왕에게 가라고 말해 주었다.
이런 건 혹시 친구가 아닐까?
그러나 국왕의 입에서는 이번에도 예상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그는 지금 몹시 진지했다.
“나,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 나?”
“네,그러세요.”
“……그거 혹시 남자야?”
“………”
“남자냐고.”
“어,음……
이재도 국왕만큼이나 진지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 하기 시작했다.
걔를 과연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개는 그냥 오래된 물건에 깃든 사념체인데요. 인간이었던 적이 없어요.
심지어 키가 제 팔뚝만 해요. 그렇다면 저도 단신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그냥 어린애 같은 순진한 영이에요. 요정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하실까요? 어쨌든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이재가 적당한 결론을 내려 주었지만,로더릭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갑자기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지려고 하네.”
“왜요?”
“글쎄. 아내가 나 몰래 다른 놈이랑 밀회하면 이런 기분인 건가?”
“………”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수비 범위였다.”
이재는 순간 황당해져서 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얘기를 듣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감탄스럽기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아니, 어쩌면 원귀에 시달려 본 사람일수록 저런 사고는 어려울 텐데.
왕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떨떠름해할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 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 었다.
“폐하는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이번에도 칭찬처럼은 안 들리네.”
“왜냐하면 이번엔 진짜 칭찬이 아니었거든요.”
이재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쯤에서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왕은 사실 다른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이재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정확히 어떤 하루 를 보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알고 싶어도,더욱 깊게 닿고 싶어도.
‘난 아내와는 영원히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는 걸까.’
그러나 그건 누구보다 아내의 아픔일 것이다.
깊게 파고들면 그녀가 쓸쓸한 얼굴을 할 게 뻔했기 때문에 그 는 적당히 가볍게 말을 받았다.
“부인,솔직하게 말해 준 건 너무 고마운데.”
“네.”
“이런 건 내가 얼마든지 읽어줄 수 있으니까 다른 남자한테 가서 읽어 달라고 하지 마. 나 이상하게 좀 서운해지려고 한다.”
“……참 희한한 거에 질투를 하시네요. 사람이 아니라니까.”
“아무튼.”
“알았어요. 전 번거로우실까 봐 꺼낸 말이었는데,괜한 얘기였나 보네요.”
“괜한 얘기는 아니고. 물론 번거톱지도 않고.”
이재가 웃음을 홀리자 로더릭은 그녀를 품으로 바싹 끌어왔다.
“이리 와. 자장가 대신 이거나 듣다 자자.”
그는 이재를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한 후,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고생을 자처하는 남편 덕에 그녀는 오늘도 편한 자세로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되리라. 물론 힘의 균형이 그때까지 존재한 다면.”
왕은 몇 구절을 읽고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이재는 꽤 질문이 많은 청자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유심히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폐하. 5대 왕께서는 무슨 의미로 저런 유언을 하셨을까요.”
그러자 국왕도 잠시 생각에 잠 겼다.
5대 왕의 미들네임은 프로비시오였다.
역사상 성검과 던컨의 능력을 함께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왕.
전대 왕후가 바로 던컨 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건 의미 없는 유언일 리 없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으나, 이재의 표정은 점점 묘해졌다.
그녀는 이쪽 방면에 쓸데없는 잡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뒤를 힐 끔 바라보았다.
“폐하. 이건 몹시 불경한 질문인데,그래도 해도 될까요?”
그러자 로더릭은 웃음을 홀렸다.
“해. 왕실 욕이어도 비밀은 지 켜 줄게.”
“……5대 왕께서 하신 예언은 지금까지 얼마나 들어맞았나요?”
아무리 용한 무속인이라도 다 맞히는 법은 없거든요.
설마 돌팔이는…… 아니셨겠죠?
저도 정말 노파심에 확인만 해 보는 거예요. 업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라서요.
이재의 질문은 무척 조심스러웠지만,그녀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그 표정에서 그녀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을 짐작한 국왕은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기사단장이 그들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