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5)
마음이 이끄는 대로-95화(95/134)
#95.
이재는 오랜만에 호숫가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목소리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3년 전쟁의 시간 동안 두 가문은 자취를 감추었고,세 가문은 투항하여 카이엔 건국에 공헌하였다. 그들 둘의 이름은 일리아스,슈미트. 셋의 이름은 멜런,러셀, 던컨. ……던컨들은 절대 틀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왕을 매번 귀찮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중요한 문장들은 기억해 두었다가 메모를 하고는 했다.
이재는 멸문한 가문에 가위 표를 쳤다. 멜런,러셀.
비록 사백 년 전 일이지만,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근데 내가 왕후인데,왕가에 반기를 든 가문에 조의를 표해도…… 상관없겠지, 뭐.
그녀는 계속해서 다음 문장을 소리 내어 읊조렸다.
“블레어크 왕가의 힘,성검. 일 리아스의 힘은 소환. 슈미트의 힘은 결계. 멜런의 힘은 영의 사멸. 러셀의 힘은 파훼. 던컨의 힘은 예지.”
그녀는 이번에는 소환이라는 글자에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쳤다.
5대 왕은 난세에 사라졌던 능력이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 금이 난세이고,헤일리가 예지자였다면 다른 힘도 깨어나는 게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리아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건가?”
이재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이번에는 일리아스라는 글자에 여러 번 밑줄을 쳤다.
국왕과 이재는 며칠 전 일로 비슷한 확신을 얻었다.
카이엔 국왕과 서부군 병사들이 동시에 원귀의 공격을 받았다.
서부 국경에서는 다이몬 재건 세력 과의 국지전이 왕왕 일어난다.
일리아스는 옛 다이몬 제국의 귀족 가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리아스가 다이몬 재건 세력과 함께하는 게 아닐까?
“이건 아주 합리적인 추론이었다고 생각해.”
만족스러운 둣 고개를 끄덕이던 이재는 곧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작은 주먹으로 허벅지와 무릎을 탁탁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뭐 이렇게 다 들 복잡하게 사니.”
국왕을 처음 만났을 때,이재는 그가 죄를 지은 건가,혹은 왕가에 업보가 있는 건가 생각했었다. 그러니 원귀를 멸하고 방을 정화 하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살을 날 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문제는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재가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소년왕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 오랜만이다?
“그런가요?”
그런데 대꾸하는 이재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뚱했다. 그걸 눈치 챘는지 소년왕은 비식거렸다.
-뭐야,왜 이렇게 푸대접인데?
“헤일리가 예지자라는 것 정도 는 알려 줄 수 있지 않았나요? 그것도 천기예요?”
이재는 몇 달이나 헤일리의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부 부 싸움의 위기를 감수하고 그녀가 투신했던 강에도 다녀왔다.
사람이 이 고생을 하는데 그 정도 실마리는 줄 수있지 않았냐는 투정이었다.
“저기요.”
-왜.
“대단한 분이신 건 잘 아는데요. 그래도 수호령인데,아무리 봐도 너무 태업하고 계신 것 같 아요.”
소년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오늘 많이 까칠하다? 난 나름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절 위해서요?”
-뭐,네 힘으로 알아냈으면 된 거 아니야? 젊은 애가 자꾸 그렇게 지름길만 찾으려고 하면 못쓴다.
이재는 딱히 공감은 안 돼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가진 능력이라곤 딱 이것 밖에 없는데. 심지어 이것 때문에 제 팔자는 십수 년간 꼬이기만 했는데,이 정도 혜택도 누리지
말라는 건 너무한 처사인 것 같 네요.”
-오늘 진짜 비딱하네. 로더릭이 랑 또 싸웠냐?
“그런 거 아니거든요. 폐하는 제가 부탁하는 건 거의 다 들어 줘요. 그래서 싸울 일이 별로 없 어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근데 같은 핏줄인데 그쪽은 외.…
이재는 소년왕을 힐끔 바라보다가 얼른 말을 삼키며 알아서 기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주워다 가 흙바닥에 낙서를 했다.
수심 어린 얼굴이었다.
요즘 이재의 최대 고민은 앞으 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버킷 리스트에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움이 절실한데,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늘도 저렇게 태업 중이었다. 그러나 떼를 쓰고 애원해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건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떡하지, 이재는 계속 고민하며 바닥에 의미 없는 줄을 그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오랜 침묵을 깨고 말했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어요.”
– 뭔데.
“아무래도 저에겐 지금 신상 무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변이 없어서 이재는 시선을 힐끔 들어올렸다. 소년왕은 어깨를 떨며 괴로운 둣 웃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웃으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그럼 계속 웃으세요. 젊은 애는 갈 길이 멀어서 이만 가 볼게 요.”
이재는 무척 공손히 허리를 굽 히고 데보라를 향해 걸어갔다.
왕후가 또 이상한 걸 조각하고 있다는 소식은 성 안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이 번에는 목재의 크기부터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늘 팔뚝 정도 되는 나무토막이 나 가지고 놀던 왕후는 이번에는 자기 몸통만 한 목재를 달라고 요청했다. 모두가 참 특이한 취미야,라고 생각할 때 웃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국왕이 었다.
‘이재. 또 뭘 하는 거지?’
밤새 나무를 깎고 있는 아내를 보는 왕의 얼굴에는 늘 걱정이 어려 있곤 했다.
그런데 조바심과 함께 궁금중 또한 어려 있었다.
‘남편한테도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단 먼저 알고 싶은데.’
‘페하, 저 뭐 하나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로더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전 가끔 폐하가 이렇게 궁금해 하면,바로 알려 주기 싫을 때가 있어요. 저 얌체같이 왜 이러는 걸까요?’
‘아, 대단히 못된 취미를 가지셨네. 내 여우, 확실히 성격이 점 점 못돼지고 있어.’
‘그런 거예요?’
‘농담이지. 여기서 성격이 더 좋아져도 곤란해. 그런 건 호구야. 왕족이 그러면 안 돼.’
‘큰 위로가 되네요. 역시 폐하는 참 따뜻해요.’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왕후가 조각하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들은 기사들이었다.
모양이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왕후가 만들고 있는 건 분명 활이었다.
국왕과 소수의 최측근들은 왕후 궁 후원에서 왕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후원을 둘러보는 사람들 의 얼굴에는 저마다 할 말이 가 득했다.
가장 발언권이 센 기사단장이 국왕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성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음….”
차마 왕후의 취미가 이상하다고 까지 말할 순 없었던 제이드는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했다.
스물한 살,권세가 귀족 출신인 왕후의 놀이터는 그만큼 기괴했다.
한쪽에선 직접 재배한 약재들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고,또 한쪽에는 약을 달이는 각종 탕약기들이 놓여 있다.
저쪽 구석에는 조각을 위한 목 재들이 그득 쌓여 있었으며, 벽면 에는 이제 알 수 없는 과녁마저 붙어 있다.
이제는 제이드도 국왕의 말에 십분 동의하고 있었다.
던컨가는 왕후 폐하를 대체 어 떻게 키웠길래 왕후 폐하가 이렇게 되신 걸까요? 하나 가지기도 힘든 취미를 한 사람이 전부 갖고 있지 않습니까?
국왕은 눈썹 끝을 긁적이며 웃 었다.
왕이야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설명하려니 참 애매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왕후를 거짓말쟁이라고 몰아갈 게 아니었다.
그녀는 상식선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남들이 이해할만큼 설명해 준 거였다.
기사들이 이 괴상한 풍경을 둘러보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왕후는 뒤늦게 후원에 모습을 드 러냈다.
데보라와 기사 하나만 대 동한 채였다.
“폐하,일찍 오셨네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걸어오자, 로더릭은 얼른 다가서서 그녀의 양 뺨을 움켜쥐었다.
“어,너무 걱정돼서 회의 끝나자마자 왔다.”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
“네가 무기를 만진다는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우리 콩알, 화살이랑 같이 날아가면 내가 얼른 가서 주워 와야지.”
이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 을 홀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녀는 곧 화살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그 옆에서 같이 허리를 굽히고는 이재를 구경했다.
무속인들에게는 모두 자신들만의 무구가 있다.
신칼을 쓰거나 부적에 능한 사람이 있고, 오색기나 방울을 쓰는 사람이 있으며,무악기를 즐겨 쓰 는 사람이 있다.
신칼이나 부적을 쓰는 사람은 퇴마를 업으로 삼는 무속인이다.
오색기와 방울을 쓰는 사람은 미래를 들여다보는 역술인이다.
무악기를 즐겨 쓰는 사람은 위 령, 즉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할줄 안다.
영산할매는 거의 모든 무구를 다 다룰줄 아는 당대 최고의 무속인이었지만,이재는 그렇진 못 했다. 그녀의 무구는 염주 팔찌와 활이었다.
언제나 더 많은 무구가 필요했 지만,이재는 그동안 활에 대해서 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팔찌나 조각상은 성 사람들도 그러려니 해 줄 것 같았으나,활은 정말로 의아하게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모든 걸 알고 이 해해 준 이상 더는 거리낄게 없었다.
“근데 너,이거 정말 할 수 있겠어?”
“왜요. 제가 정말 화살이랑 같이 날아갈 것 같아서요?”
“………”
“어? 대답을 못하시네요?”
국왕은 난처한 둣 눈썹 끝을 긁적였다.
그 순간,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의 기사들은 모두 왕의 심정 을 이해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활이 왕후의 몸집에 비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인 체구에 맞춘다고 직접 깎은 듯한데, 그래도 왕후는 너무 작고 가 벼워 보였다.
이재는 웃음을 홀리며 활시위를 퉁, 퉁, 두어 번 튕겨 보았다.
“폐하,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 어요. 이건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뭔데?”
“흔들리는 것은 단지 너의 마음뿐 ”
그녀는 화살을 걸고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겨 보았다.
그러자 국왕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도 이재에게서 한 발 멀어졌다.
그녀의 눈은 한층 날카로워졌다.
“과녁은 저기 멈추어 있잖아요.”
“그러니 맞출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저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저는 반드시 맞출 수 있을 거 예요.”
그 순간 입술을 꽉 깨문 이재는 팽팽히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