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6)
마음이 이끄는 대로-96화(96/134)
#96.
이재가 날린 화살은 과녁 정중 앙에 박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 지 않고,또 한 발의 화살을 시위 에 걸었다.
왜일까. 입술을 깨무는 얼굴은 차분했지만, 어딘가 절실해 보였다.
뾰족한 화살촉은 다시 한번 과녁 중앙부에 박혔다.
그러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왕은 한숨을 쉬며 기사단 쪽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왕후만큼 못 쏘면 너흰 다 파직이다.”
입을 벌리고 감탄하던 기사들은 당황했다.
저 말은 결국 정중앙을 맞추지 못하면 다 파직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집단의 수장인 제이드는 기사들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저희는 기사이지, 궁병이 아닙니다.”
옳은 말이었다.
물론 기사단에는 전문 궁수보다 궁술이 뛰어난 기사들도 심심치 않게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검술과 체술로 이 자리 까지 온 자들이었다.
기사들은 단장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지만,그 순간 이상하게 짜증이 올라온 왕도 받아쳤다.
“내가 언제 너희 보고 궁병이라고 했나? 근데 저걸 보면서도 그 런 핑계를 대고 싶은가 보지?”
“………”
“너희 눈엔 지금 사람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안 보이난 말이다.”
“………”
“너희도 궁수가 아니지만,왕후는 궁수가 아닐뿐더러 기사도 아니다.”
그런데 저 애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잖아.
능력이 부족한 걸 미안해하고, 가끔 저런 얼굴로 입술을 깨물잖아.
로더릭은 기사들을 차갑게 노려 보다가 다시 이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 발을 더 쏘려던 그녀는 활 시위를 슬그머니 돌려놓았다.
세 발이면 시험 사격은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었다.
이재가 바닥에 주저앉자,왕은 얼른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 했어?”
“아직요.”
“우리 콩알,그래도 같이 날아 가진 않네.”
“이래 봬도 전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는 콩알이거든요.”
로더릭은 그녀의 짧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리 콩알 명사수였네. 내가 모르는 재주가 또 있으면 미리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재는 웃음을 홀렸다.
“이게 무슨 명사수예요. 전에 자주 해 봐서 그래요. 그리고 과녁이 말도 안 되게 가깝잖아요.”
그 겸손한 말에 국왕은 기사들을 또 한 번 차가운 눈으로 노려 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몰랑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빨개진 손이 불쌍하기만 했다.
이어 왕은 이재의 손에 들린 화살을 벳어서 화살통에 툭,집어던졌다.
화살은 정확하게 통 안에 들어가 팽그르르 돌았다.
그는 의아해하는 이재에게 말했다.
“위험하니까 날카로운 건 내려 놓고 쉬어라.”
“딱히 위험하진 않아요.”
“너 말고 내 정신 건강에 위험 하다고. 심장에 아주 해롭다.”
왕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근처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는 이재에게 화살대신 나뭇가지를 쥐여 주었다.
피식,웃던 그녀는 흙바닥에 낙 서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세 손을 멈추었고,골똘한 생각에 잠긴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폐하.”
“어,왜.”
“며칠 전 그건 어디서 날아온 살이었을까요? 역시 재건군 본영일까요?”
고개를 가웃거리던 이재는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그녀가 왜 굳이 이 순간에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몹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함 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 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이 추론은 합리적이었다.
예지자였던 헤일리,왕과 서부 군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이한 일, 조금씩 깨어날 기미가 보이는 왕가의 힘,서부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며 활개를 치는 다이몬 재건군.
일리아스가 멸문하지 않았다면, 그 추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왕과 이재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이 남아 있었다.
왕은 여전히 선대왕들의 유 훈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던컨을 믿지 마라.
“우리 현명하신 왕후께서는 던 컨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폐하는 아직도 그쪽이 신경 쓰 이세요?”
“의심은 하고 있지. 너도 성 내 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나. 다이몬이 이쪽 상황을 그 정도로 잘 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게다가 국왕은 어째서 공작이 알버트 던컨을 계속 서부 국경으 로 보내려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확인해 봐야겠어요.”
“……어떻게?”
이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 며 가져온 물건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활은 원귀를 격퇴하는 퇴마구이자, 점을 칠 수 있는 무구다.
물 론 신점은 이재에게 능숙한 분야 는 아니었다.
이론이야 훤했지만, 점패란 이론에서 나오는 게 아니 기 때문이다.
흐름을 읽는 능력은 무속인 본 인이나 그들이 모시는 신의 영검 함에서 나온다.
이재는 신을 업은 사람도 아니 었고,그 정도로 영검한 무속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재는 가지고 온 금속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비릿한 냄새가 흑,하고 끼쳐 왔다.
얘가 왜 이럴까,활도 쏠 줄 아는구나,정도로 생각하던 로더릭은 그 순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등장한 물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짐승 피였다.
“폐하,지금부터 저 방해하시면 안 돼요.”
“또 뭘 하려는 건데? 이재. 먼저 말을 하고 해라. 응?”
제가 재주를 부려 보려고요.
여기서 더 작아지는 재주 같은 건 없어요.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건 폐하도 그만 포기하세요.
하지만 이 정도는 저도 해 볼 만한 것 같아요.
“진짜 별거 아니에요.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그녀는 왕이 쥐여 준 나뭇가지 끝에 짐승 피를 찍었다.
그리고 백지 위에 복잡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본인의 피였으나, 왕이 옆에 있는 데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짐승 피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을 땐, 그 대담한 데보라마저 눈에 띄게 당황했던 것이다.
그녀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왕에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주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 하지 말란 뜻이었다.
왕은 뭔가 개운하지 않은 얼굴 이었으나,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지난번처럼 불길한 기운은 느껴 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과녁을 바꿔 걸 고,자리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모 두 숨을 죽였다. 과녁에 그려진 문양이 기이하기도 했지만, 갑자기 그녀의 온도가 변한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섭고도 예리한 눈빛이었다.
이재는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입술을 다시 한번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능력이 부족했고,아무리 노력해도 넓은 범위의 흐름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질문은 반드시 세밀하고 명확해야 만 했다.
‘살을 날리고 있는 곳은 서부 국경,다이몬 재건군 진영. 저는 거기에 걸어 보겠습니다.’
이재는 아까와는 다르게 활시위 를 당긴 손과 화살 끝에 자신의 기를 가득 실었다.
‘암중모색. 인간은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는다. 오직 답을 찾기 위하여.’
‘보무타려,안심입명. 모든 것을 굽어보는 존재여, 우리 인간에게 도 실낱같은 확신을 허락해 주길.’
이재는 진의 곳곳에 몇 발의 화살을 쏘았다.
거침없는 속도였 고, 화살은 그녀가 의도한 곳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하지만 이재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오는 기분을 느꼈다.
부족한 능력으로 감히 불확실한 영역을 엿보려 한 대가였다.
왕은 일개 개인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국운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재는 이 정도쯤은 자 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시도한 일 앞에 물러날 수도 없다.
이재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진을 주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영안에 무언가 피어오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종이에 그린 진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이게 그녀가 구하던 답이라면,이제 그 빛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빛이 점점 힘을 잃고,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뭐야? 왜 저래?”
명멸하던 빛은 곧 완전히 사그 라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다른 곳을 보다가 과녁을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동그랗게 말아 쥔 손으로 눈을 비볐다.
저게 대체 맞다는 거야,틀리다는 거야? 왜 말을 해 주다 마는 거야?
그리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번 엔 왕후가 왜 또 저러는 건지 이 해할 수 없었다. 정중앙은 아니었지만,화살은 모두 과녁 안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후는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둣 얼굴을 찡그리고만 있었다. 기사들은 오히려 그 태도 때문에 초라해지려고 했다.
왕후 폐하는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하셔야 만족하실 거지요?
“이재. 너,괜찮은 건가?”
“………”
“대답 좀 해라.”
이재의 표정이 썩 좋지 않자, 국왕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입술에 검 지를 갖다 댔다.
하루에 두 번이나 의식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건 그녀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다 강한 확신이 필요했다.
이재는 결국 굳은 표정으로 새 종이를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종이 위에 짐 승 피로 진을 그렸다.
기를 계속 끌어모으고 있던 그 녀는 이번에는 그 종이를 곁에 있던 기사에게 건넸다. 안 그래도 부족한 기를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종이를 받아 들고 한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데보라는 정말이지 한심하다는 둣 기사를 바 라보았다. 명백한 경멸의 눈초리였다.
“아니, 경은 왜 이 정도도 이해 를 못하십니까?”
기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훨씬 센 그녀는 종이를 획 벳어 들었다.
답답한 인간 같으니. 왕후 폐하가 지금 대신 좀 해 달라고 신호를 보내시잖아.
정말 너희같이 눈치라곤 없는 것들이랑 성에서 같이 일하는 게 창피해진다.
데보라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발걸음으로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쓸데없이 도도한 동작으 로 과녁을 바꿔 걸었다.
이재는 고맙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고,데보라는 그녀에게만큼은 상냥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같이 웃어 주기에 이재 의 상황은 지금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다시 한번 활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남은 기를 최대한 모아 화살에 실었다.
‘그렇다면 살을 날리는 쪽은 공작입니까? 신명이여,인간이 답을 간구할 때는 한 번쯤은 목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우리는 절대 아무 때나 당신께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이재는 연달아 화살을 날리고는 또 유심히 과녁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휘갈기듯 그려 넣은 진에서는 이번에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기사들은 이제 완전히 난감해지고 말았다.
화살들이 아까와 똑같 은 위치에 박힌 것도 정말 이상했지만,왕후가 무척 실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고 있던 활을 지면을 향해 떨군 그녀는 웃고 있을지언정 허탈해 보였다.
이재는 다소 힘없는 발걸음으로 과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둘 다 틀렸다는 걸까,아니면 내 능력 밖이라는 대답일까. 뭐가 문제일까.
이재는 과녁을 뜯어내고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5대 왕을 의심할 게 아니었군 요. 진짜 돌팔이는 여기 있었어요.
할매, 미안해요.
제가 업계 톱티어였던 당신의 명성에 또 이렇게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무룩해하던 그녀는 종이를 들 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멈칫하며 몇 차례나 뒷걸음질 쳐야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를 쏟은 탓인지,머리가 갑자기 핑그르르 돌았기 때문이다.
“이재!”
깜짝 놀란 로더릭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왔으나, 휘청거리던 그 녀는 꽝,하고 땅바닥에 엉덩방아 를 찧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