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Your Heart RAW novel - Chapter (99)
마음이 이끄는 대로-99화(99/134)
#99.
시녀들과 기사들이 접견장 안을 빠져나간 뒤,이재의 눈빛은 한결 차분해졌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공작의 얼굴을 들여다보며,생각에 잠겼다.
마찬가지로 이재의 얼굴을 보고 있던 공작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요청하지도 않은 독대였으나, 공작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도 남의 시선을 피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 람의 온도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상대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예감을 쌍방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대화는 조금 더 깊어 져야만 했다.
그 시작은 이재가 먼저 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아버지는 왜 그렇게 오라버니를 서부 국경에 보내려고 하셨나요.”
“다 가문의 번영을 위한 게 아니겠느냐. 던컨가는 최근 몇 년,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고, 네 오라비는 던컨이라는 이유만 으로 좌천당했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그런데 당신의 관상은 왜 꼭 여죄가 남은 사람처럼 그렇게 모호했던 걸까요.
거기서 자꾸 변하고 있는 건 왜 일까요.
이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 은 채 공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헤일리. 이제 우리 가문엔 그것보다 중요한 게 생겼다.”
공작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그의 목소리는 넓은 접견장 안에 울려 퍼졌다.
“역사적으로 이런 순간이 올 때 마다,우리 던컨들은 늘 옳은 선택만을 해 왔다.”
“………”
“이번엔 네가 가문을 위해 옳은 답을 내려 줄 차례다.”
그 순간이었다. 이재의 머릿속 에는 고서의 낡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3 년 전쟁이 격화되던 시점, 가장 먼저 연합군에 투항한 가문은 던컨이다.
-던컨들은 절대 틀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재는 그들이 옳은 선택만을 해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그들 가문에 예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던컨가는 전쟁의 향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는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가진 패를 하나 꺼내 보였다.
“아버지는 지금이 그 순간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나요?”
“……역시 너였구나.”
공작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만족감이 떠올랐지만,이재는 즉답을 회피하며 물었다.
“지금이 그때라는 걸 어떻게 아셨냐고요.”
난세. 모든 가문의 능력이 깨어 나는 시기. 그녀가 알고 싶은 건 지금이 난세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얼마 전 저택에 누군가 찾아왔었다.”
“……그게 누구죠?”
하지만 공작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이은 질문에 그는 한쪽 입술을 들어 올렸다. 오랜 시간 반왕파를 이끌어 온 공작은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상대 또한 지금 간절히 알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을.
“네가 지금 나를 떠보는 거냐?”
“………”
“네가 이 아비를 상대로 머리를 굴리고,많이 변했구나. 폐하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더냐?”
공작 또한 이재를 떠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폐하는 이 사실을 모르십니다.”
“그래?”
공작이 그녀의 말을 믿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국왕의 말처럼 숙련된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이 체스 말처럼 쓰던 딸 앞에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해일리. 이번엔 네 차 례다. 네가 먼저 가문의 능력을 중명하지 않으면,나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이건 진실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이재는 이내 입을 다물 고 말았다.
그녀는 이 거래에 응할 수가 없었다. 간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증명하거나 속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이재는 해일리 던컨이 아니었고, 국운 같은 거대한 미래는 점 칠 수 없었다.
헤일리의 지난 삼 년간의 기억이 불완전한 이유.
그것은 바로 예지가 영안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능력이 아니라, 영혼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재는 헤일리가 지난 삼 년간 예지 로 보았던 것들은 아무것도 기억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굳은 얼굴로 공 작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재가 식탁 앞에서 수심에 잠겨 있자,국왕은 물었다.
“오늘은 무슨 말을 지껄이던가? 또 반말 찍찍 하던가?”
그러자 죽상을 하고 있던 이재는 피식,웃었다.
그녀가 던컨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후, 공작을 언급하는 국왕의 태도는 더욱 거침없어졌다.
이재는 뒤늦게 깨달았다.
전에 그게 말을 많이 가려서 한 거였구나.
왕은 그나마 아내의 가족이라 고, 그녀 앞에선 말을 조심해 준 거였다.
그게 좀 웃겼던 이재는 괜한 장난을 쳐 보았다.
“누구요? 저희 아버지요? 근데 아버지가 딸한테 말 좀 편하게 하고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러자 로더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그런 농담 하지 마라. 그 호칭도 쓰지 말고.”
“왜요?”
“그동안 삽질한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나도 너한테 잘 보이려고 많이 참았단 말이다.”
이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 랬어도 나는 당신을 충분히 좋아 했을 텐데.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접견록 확인 안 하셨어요? 오늘도 안에 사람들 숨어 있는 것 같던데?”
“내가 그걸 뭐 하러 다 읽고 있어. 너한테 바로 물어보면 되는 데. 아,혹시 귀찮은 건가?”
“아니요. 전 폐하한테는 귀찮은 거 없네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혹 여 귀찮다 해도 매일 밤 책을 읽어 주는 자상한 남편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배신이었다.
“폐하.”
“옹. 왜.”
“공작은 정말 독사인가 봐요. 전 역시 뱀한텐 안 되는 것 같아요.”
로더릭은 어깨를 떨며 웃었으나, 이재는 미묘한 패배감을 느끼 고 온 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요. 보통 숨길 게 많은 사람들이 그래요.”
그러자 푸른 눈동자는 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좀 기가 찬다는 둣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아내도 지금 선문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 미안하지만, 해도 되 나?”
“네,하세요.”
“너도 가끔 그래.”
이재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 렸다.
사실 그녀도 마음 깊이 인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건 무속인 사회에 퍼져 있는 직업병 이었다.
천기를 누설한 대가가 크 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실상은 그저 책임 회피 일 뿐인지도 모른다.
빙긋 웃던 이재는 왕에게 말했다.
“폐하. 아까 공작이랑 얘기하다 든 생각인데요.”
“응.”
“던컨을 믿지 말라는 유훈 있잖아요.”
“어. 그게 왜.”
“어쩌면 좀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로더릭은 계속 말해 보라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미래를 보는 사람들은 꼭 대의에 따라 행동하진 않거든요. 전 그게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 지는 않아요. 가시밭길일 걸 뻔히 알면서 가고 싶은 사람은 없는 거잖아요.”
공작은 그녀에게 다이몬 재건 운동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 유형의 질문은 영산할매 밑에서 자란 이재에게는 익숙했다.
그녀 또한 지난 생을 그런 방 식으로 살아왔다.
사람들의 조언 에 의존해서. 물을 피해서.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재는 자꾸 만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누가 이길지가 아니라,누구의 편에 서고 싶은지를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 는 사람은 무속인이나 예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마음.
“그러니까 제 말은 던컨들이 신의를 따라 움직일 거라곤 생각하지 말라,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 까 해서요. 뭐,그 말이 그 말인 것 같긴 한데요.”
이재가 멋쩍게 웃으며 왕을 바 라보았을 때,그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봐. 너도 말을 이런 식으로 한 다니까? 공작이랑 비교해서 미안한데,난 네가 더 심하지 싶다.”
“이런 게 바로 핏줄인가 봐요.”
“아,그 농담은 하지 말라니까.”
“어쨌든 폐하는 제 말 다 알아 들으시잖아요.”
“그건 그래.”
둘은 키득거리면서 계속 잡담을 나누었고, 또 공작의 흉을 보았다.
접견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 기하기도 하고,회의장에서 있던 일을 나누기도 했다. 둘 모두 즐 거운 얼굴이었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웃지 못하게 된 건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면서부터였다. 이재의 표정은 점 점 멸떠름해지고 있었는데,로더 릭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피식 웃고만 있었다.
뒤늦게 그 웃음을 발견한 이재는 범인을 알아챘다.
“폐하,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요리 아닌가.”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요.”
그녀가 흘겨보기 시작하자 로더 릭은 어깨를 으쑥하며 답했다.
“몸에 좋은 거.”
“이게요?”
이재는 몹시 꺼림칙한 표정으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접시 안에 는 하나같이 괴생명체처럼 생긴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보 양식의 행렬은 여전히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로더릭은 손수 포크를 쥐여 주 었다.
“건강에 좋은 거니까,먹어.”
“제가 왜 이런 걸 먹어야 하죠?”
“네가 자꾸 몸을 축내는데 의원 도 소용없고, 뭐라도 해 주고 싶긴 해서. 너도 그래서 나한테 약 달여 줬던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또 사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재는 여전히 손이 가질 않았다.
서양은 보양식 재료도…… 크구 나. 근데 꼭 이렇게 원형을 다 유지했어야만 했나요?
“차라리 저도 약을 달여서 먹으 면 안 될까요?”
“좋은 질문이네. 그것도 이따 가져올 거야.”
본인 무덤을 파고 잠시 묵념하던 이재는 곧 물었다.
“종류는 왜 이렇게 많은 건데 요? 저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알아. 나도 다 먹으라곤 안 했다. 딱 한 입씩만 먹어.”
“참고로 이거 다 공작가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거야.”
하지만 이재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였다.
로더릭은 입안을 깨 물며 웃음을 꾹 참았다.
평소와 다르게 자꾸 트집을 잡는 게 어지간히 안 내키는구나 싶긴 했다.
“폐하,근데 이게 왜 다 제 앞 에만 놓여 있는 거죠?”
“내가 이런 거 먹어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