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is money RAW novel - Chapter 124
이제 나는 그 꿈에서 깨어날 때야
[… 판힐 감독은 올 시즌 내내 선수 기용 문제로 비판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네덜란드 커넥션이란 비아냥까지 들으면서도…. 상위권으로 올라가지 못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오빠…”
나는 케이코를 내려놓고 티비 앞으로 갔다.
화면 가득 판힐 감독의 성난 붉은 얼굴이 나왔다.
“내일 훈련장에서 뵐게요.”
“…”
어제 통화할 때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마음을 굳힌 걸까.
‘역사의 관성… 또 너냐?’
판힐은 결국 역사대로 시즌 중에 팀을 떠나게 됐다.
이상한 타이밍이다.
아직 5위에 불과했지만 리그 후기 첫 경기에서 대승을 거두며 팀 분위기가 상승세였다.
어제는 바르사가 리그 후반기를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는지 보여준 경기였다.
나는 파드릭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며 젊은 미드필더 차비와 이니에타의 잠재력까지 끌어냈다.
바르사는 전보다 훨씬 재밌는 축구를 하는 팀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띵- 동-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작은 화면 가득히 붉은 얼굴이 떠 있었다.
“판힐 감독님?”
“김건.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예. 잠시만요.”
나는 야시시한 실크 유카타를 입고 있는 케이코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자 정말 루이 판힐 감독이 서 있었다.
뒤에는 그가 타고 온 볼보 SUV가 세워져 있었는데 짐이 가득 차 있었다.
“감독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가도 되나? 오후 훈련까지는 시간 있잖아.”
“예. 들어오세요.”
“모닝커피를 안 마셨더니 머리가 뻑뻑하군. 커피 좀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판힐은 정원을 한번 둘러보더니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멀리 보이는 해변을 감상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커피를 만들어 내왔다.
“고마워. 참 멋진 저택이군. 주식과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봐.”
“뭐. 제 나이에 적은 재산은 아니지만 아직 멀었죠.”
“나도 이렇게 바르셀로나를 떠날 줄 알았다면 좀 무리해서라도 좋은 집에서 살아 볼 걸 그랬어. 내가 언제 다시 여기서 살아보겠어?”
“감독님…”
판힐은 멀리 보이는 지중해의 풍경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고향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으니까.
그리고 바르사 구단에서 그를 다시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커피 맛도 좋군. 후후.”
나는 한동안 그를 놔두었다.
도대체 왜 나를 찾아왔는지 감독은 왜 그만둔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일단은 놔두기로 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잔 게 확실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나는 한 가지는 확신했다.
‘절대 자진 사퇴가 아니야. 이 사람 짤렸어.’
판힐이 한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케이코가 쿠키와 과일을 내왔다.
야시시한 유카타를 벗고 평범한 츄리닝 차림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아. 김건 선수의 약혼자시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직접 구운 쿠키에요. 드셔보세요. 커피 더 드릴까요? 감독님?”
“아. 부탁할게요.”
“예~~”
케이코가 일본 여자 특유의 애교를 부리며 접대하자 판힐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 부러운 인생이군. 너는 이미 남자가 삶에서 꿈꾸는 것들을 다 가졌어.”
“…”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케이코는 커피를 더 내오고 정중히 인사한 후 들어갔다.
판힐의 상태를 보고 알아서 자리를 피한 거다.
참 센스가 좋은 여자야.
“둘이 결혼식은 언제 올리나?”
“이번 시즌이 끝나면 하와이에서 할 생각입니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라… 좋겠지. 나도 꼭 참가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당연하죠. 고맙습니다. 감독님. 바쁘실 텐데. 하와이까지…”
살짝 걱정은 됐다.
하이팅크 감독도 올 텐데 둘이 만나서 난투극이라도 벌이는 건 아니겠지?
둘은 이미 언론을 통해서 상대를 거세게 비판하는 난타전을 벌인 전적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참 멋진 도시야. 그리고 FC바르셀로나는 우리 같은 축구인들의 꿈이지. 이제 나는 그 꿈에서 깨어날 때야. 아쉽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던 거지. 커피 잘 마셨네. 김건 선수.”
“감독님.”
“응?”
“도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서…”
“훗. 자네도 여기 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빅클럽에는 빅클럽만의 방식이라는 게 있어. 그걸 인정해야 쓸데없이 상처받지 않는다구. 명심해. 언론에서는 챔스 우승한 명장이다 뭐다 떠들지만 이게 현실이야. 빅클럽의 입장에서 나 같은 일개 외국인 감독의 목숨 따위는… 뭐.”
판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일어섰다.
차에 올라탄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건. 가스파르 회장을 조심해. 아마도 다음 타겟은 네가 될 거야.”
“예!?”
“그는 네가 주앙 라포타를 만난 걸 잊지 않고 있어.”
“…”
“다른 팀에서 또 만나자. 그럼.”
물론 나는 그와 다시는 같이 일할 생각이 없다.
그래도 불쌍해서 손을 흔들며 잘 보내주었다.
판힐은 그렇게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
“가스파르 회장이 나를 노린다구?”
찝찝한 상태로 오후에 훈련장을 갔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건! 왔어!”
감독 목숨이 하루아침에 날라갔는데 구단 분위기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마인츠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클롬 감독을 그런 식으로 잘랐다면 선수, 스태프, 팬들 모두 난리가 나서 구단 사무실을 박살냈을 거다.
“뭐. 빅클럽이라 이건가.”
바르사에서 감독은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 중 하나였다.
코치와 스텝들은 평소대로 움직였고 선수들도 평소처럼 훈련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자 슬슬 변화가 보였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흐림.
스페인 선수들은 맑음.
남미 선수들은 아주 맑음이었다.
코치와 스텝들은 누구에게 줄을 섰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랐다.
판힐과 네덜란드 인맥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복 훈련이 끝나자 다들 이런저런 소문을 떠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다른 선수들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판힐 감독 짤린 거래. 자진 사퇴가 아니야.”
“그래?”
“가스파르 회장한테 당한 거지. 시즌 초부터 계속 부딪쳤는데 성적도 기대 이하니까. 결국 언론에는 자진 사퇴로 발표해서 체면을 살려주고 잔여 연봉을 챙기는 걸로 합의를 봤겠지.”
구단에서 감독을 경질하면 잔여 연봉을 모두 지급해야 한다.
반면 감독이 자진 사퇴 하면 잔여 연봉은 지급되지 않는다.
바르사 구단은 판힐의 명예와 돈을 지켜주는 대가로 거래를 한 거다.
“후임 감독은 누가 오는 거야?”
“몰라. 가스파르가 이미 만들어놓은 사람이 있겠지. 자기 말을 아주 잘 들을 녀석. 그러니까 이렇게 자신 있게 잘라버리지.”
“그 인간 회장 자리 지키려고 초강수를 뒀네.”
[바르셀로나 회장 선거]정신이 번쩍 났다.
FC바르셀로나 구단은 소시오들이 주인인 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투표로 회장을 뽑는 민주주의 축구단.
전생에서부터 나는 이런 시스템을 동경해왔다.
하지만 바르사에 입단해 직접 겪어본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결론은 이렇다.
바르셀로나의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문제.
첫째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회장이 선출되어도 반대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반대파는 임기 내내 비판과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둘째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축구가 정치적으로 흘렀다.
승리를 위한 길이 아닌 권력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소시오들의 투표로 뽑힌 회장은 임기 동안 반대파들과 싸우며 동시에 지지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팀 플랜을 세우기 어려웠고 여론에 휩쓸려 불합리한 선택을 할 위험성이 있었다.
지금 가스파르 회장을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반대파의 대장이 주앙 라포타였는데 그는 가스파르의 모든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기가 회장이 되면 [잉글랜드의 스타 데이비드 베컨을 데려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바르사에 베컨이라니…”
우리 팀 컬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수였지만 소시오들이 좋아하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닌 줄 알면서도 해야 하는 게 바르사 회장의 딜레마였다.
가스파르는 어떻게든 회장 자리를 유지하려고 판힐을 희생양으로 써먹었다.
웃긴 점은 바르사가 지불한 판힐 감독의 잔여 연봉은 가스파르의 주머니가 아니라 소시오들의 주머니에서 나간다는 거다.
“그래도 이건 좀 씁쓸하군.”
판힐이 바르셀로나를 떠난 지 10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지워졌다.
판힐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만 어쨌든 처음 맛보는 빅클럽 맛에 입이 썼다.
***
“다들 반갑다. 나는 라도미라 얀티치라고 한다. 지금까지 했던 판힐의 축구는 전부 잊기 바란다. 나는 그 친구 축구를 싫어하거든. 오늘부터 너희들은 나의 축구를 해야 한다.”
다음 날.
훈련장에 새 감독이 등장했다.
풍채가 워낙 좋아서 시베리아 불곰 같았다.
세르비아 출신 라도미라 얀티치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을 거친 명감독이었다.
특히 아틀레티코에서는 19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더블을 달성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유명한 사건은 그가 아틀레티코에서 3번이나 경질을 당했다가 재임명 됐었다는 거다.
그런 짓을 한 구단이나 그걸 받아들인 얀티치 감독이나 참 대단하다.
“우리 팀에 계집애처럼 공을 차는 녀석은 필요 없어. 압박할 때는 더 확실하게 해. 거칠게! 상대가 겁을 먹게 만들어!”
코치들 목소리가 커졌다.
얀티치 감독은 첫날부터 수비에 공을 들였다.
판힐처럼 혼자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입을 굳게 다물고 근엄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지켜보았다.
“엄청난 카리스마네.”
선수들은 그 눈빛에 질려 훈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얀티치는 판힐이 시도했던 스리백, 포백 변환 수비 시스템을 백지화시켰다.
그리고 포백라인을 고정해서 견고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과연 훗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디에고 시메오니 감독의 직계 스승다웠다.
얀티치는 직접 말을 걸지 않고 코치들을 통해서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선수들은 감독을 전보다 어렵게 생각했다.
“김건! 감독실로 가봐.”
“예. 코치님.”
22R 에스파뇰 경기 이틀 전.
얀티치가 나를 불렀다.
이 남자와 처음으로 대화 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