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is money RAW novel - Chapter 13
이게 프로 축구선수의 계약서구나
“이… 새끼가.”
어차피 동기 중 나중에 K리그 드래프트에 뽑히는 건 한기룡 한 놈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축구화를 벗기는 게 그들을 위한 길이다.
나의 냉정한 말에 다들 분노했지만 감히 덤비지는 못했다.
자신의 한계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어릴 때부터 일반 학생들과 분리되어 죽도록 맞고 터지며 배운 게 축구뿐이라 그 세계를 떠나는 게 두려운 거다.
딱히 축구가 좋아서가 아니다.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나도 부상으로 축구계를 떠나야 했을 때 무척 두려웠다.
나중에 용기를 내어 다른 분야에 도전해서 인정을 받았을 때.
그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깨달았다.
뭐. 바리스타로 결국 오래 일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축구 이외의 다른 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경험 덕분에 처음으로 내가 축구 외에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기 덕을 봐서 대학에 들어가 어떻게든 비벼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거다.
그런 놈들과 의리를 지킨다고 더 좋은 계약을 내쳤던 전생의 나야말로 최고 멍청이다.
“김건우! 잠깐만!”
학교를 나와 강남역에 가려는데 한 녀석이 쫓아왔다.
난 맞짱이라도 뜨자는 줄 알았다.
“뭐야. 진혁아.”
“잠깐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맞짱 상대로는 최악이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김진혁.
3학년 센터백으로 축구선수라기 보다는 레슬러 같은 몸을 지닌 녀석이다.
실제로 명성고 짱이기도 했는데 성격 좋고 리더십도 있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문제는 축구 실력.
스피드, 피지컬은 극강인데 최악의 볼터치와 최악의 축구센스를 자랑했다.
오죽했으면 다들 달구지 드리블이라고 놀렸으니까.
이 녀석이 왜 나를.
“너 어디서 무슨 운동하냐?”
“왜?”
“3월에 학교 훈련 빠지고부터 지금까지 너의 몸을 유심히 살펴봤거든.”
“내 몸을!? 샤워장에서!?”
“오해하지마! 그런 뜻이 아니라. 너의 플레이가 폭발적으로 좋아지는 걸 보고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나… 너의 말을 듣고 정말 쪽팔렸다.”
김진혁은 울 거 같은 표정이었다.
고릴라가 우는 것 같아 좀 귀여웠다.
“프로가 되겠다고 말은 하면서 너무 안일하게 살았어. 나도 발전하고 싶어. 네가 하는 운동을 알려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디서 뭐 하는지 좀 알려주면 안 되냐?”
“…”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김진혁은 대학 졸업 후 당연히 K리그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했다.
김진혁은 고릴라를 닮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유소를 여러 개 소유한 아버지를 둔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졸업 후 골프 사업을 한다고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를 오가며 집안 돈을 물 쓰듯이 쓰다가 내가 사고로 죽기 1년 전쯤 필리핀에서 총에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리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
순간 호기심이 생겼다.
김진혁에게 내가 하는 21세기식 최첨단 트레이닝과 식이요법을 시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나 같은 경우는 천재적인 축구센스에 비해 허약했던 피지컬을 보강하며 실력이 급성장했다.
하지만 김진혁에게는 가장 중요한 축구센스가 없었다.
“좋아. 알려줄게. 따라와.”
“지금!?”
“싫으면 말고.”
“아, 아니야!”
김진혁은 학교를 땡땡이치고 나와 함께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의 선택이 앞으로의 한국 축구 역사를 어떻게 바꿀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기로 했다.
뭘 해도 필리핀에서 총 맞는 거 보다는 나을 테니까.
***
강남역에 도착해 8번 출구로 올라가다가 기겁했다.
입구 앞에서 매우 낯이 익은 남자가 몹시 부끄러운 옷차림으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 쪽팔려. 저런 차림을 하고 강남역 앞에 나오다니…”
“우와~~ 몸 진짜 멋지다~~”
나와 김진혁은 한 남자를 보고 정반대 반응을 보였다.
전단지 돌리는 남자는 바로 마빈 리.
그는 유두가 훤히 드러나는 헐렁한 나시 티에 미국 성조기가 수놓아진 반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프로레슬러 더 락처럼 워낙 몸이 좋은데다가 외모가 신기해서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열심히 하시네요. 관장님.”
“아! 건우 씨!”
“새 회원을 데려왔어요. 저랑 같은 축구부에요. 인사해. 진혁아. 이분이 마빈 관장님이야.”
“안녕하세요! 김진혁이라고 합니다. 관장님 진짜 몸 좋으시네요. 완전 멋있어요.”
“하하핫! 그래요? 학생도 척 보니까 몸이 보통이 아닌데? 평소 무슨 운동해?”
“저는 그냥 동네 헬스장에서 벤치랑 머신 같은 걸.”
“잠깐. 벤치프레스? 머신? 노. 노. 그건 아니지… 축구선수는 그런 운동이 전혀 도움이 안 돼요. 몸을 망치고 있는 거야.”
“그럼요?”
“내가 만든 축구 선수 전용 프로그램을 훈련하면 지금보다 경기에서 몇 배 나은 퍼포먼스를 뽐낼 수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관장님! 당장 1년 치 끊을게요.”
“정말!? 오! 쿨가이~~”
진혁과 마빈은 의기투합하더니 함께 전단지를 뿌리며 운동, 보충제 등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두 근육맨의 예상 못한 캐미에 흐뭇해하는데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전단지를 무심코 본 나는 기겁했다.
[축구천재 김건우의 비밀 훈련장! 전국 고교 챔피언 김건우가 애용하는 펑셔널 트레이닝의 명가! 캘리포니아 짐!]스포츠신문에서 내 사진을 오려 붙여 인쇄했는지 매우 조악한 화질의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관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사진이라도 좀 잘 나온 걸 쓰던가.”
“어! 김건우 선수다! 싸인 좀 해주세요! 싸인!”
곧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잔뜩 몰려들었다.
나는 1시간 넘게 강남역 앞 땡볕에서 싸인을 해줘야 했다.
그 망할 전단지에…
***
일주일 후.
나는 학교 대신 강남역으로 매일 출근했다.
아침부터 어학원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요가원과 체육관에서 운동을 빡세게 했다.
축구공을 차는 훈련은 밤에 집 근처 공원에서 혼자 감각을 조율하는 정도로 가볍게 했다.
그만큼 볼 터치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성인 리그에서 밀리지 않게 최대한 신체력을 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김진혁은 첫날부터 마빈 관장과 불꽃 캐미를 보여주더니 그 후로 하루도 빼지 않고 체육관에 나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마빈 형과 근육 형제처럼 붙어 다녔는데 벌써 나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네요.”
정확히 일주일 만에 DHL 국제 등기 소포 3개가 바르셀로나 어학원에 도착했다.
지금은 이메일로 보내면 땡이지만 98년에는 다 국제 등기 소포로 보냈다.
[가시마 앤틀러스] [교토 퍼플 상가] [하카타 블루샤크]나와 협상하고 있는 J리그 구단은 총 3개다.
나를 만난 스카우트들은 각자 구단으로 돌아가 수뇌부와 상의하고 가계약서를 만들어 보냈다.
퇴근 후 강남역으로 넘어온 최재성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영문 계약서를 검토했다.
잠시 후 김승진 의사도 왔는데 케빈 킴까지 3명의 S대 축구부 출신 아재들은 묘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돌려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이야~ 이게 프로 축구선수의 계약서구나. 멋있다. 종이에 구단 엠블럼 찍힌 것 좀 봐. 죽이지 않냐?”
“마라도나가 나폴리에 입단할 때 작성했던 계약서는 지금 이탈리아 축구 박물관에 남아 있다잖아.”
“진짜? 우와~~”
어린 시절 프로축구선수를 꿈꾸었다가 좌절하고 다른 길을 가게 된 전직 축구소년들에게 이런 활동은 일종의 가상 현실 게임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현실적 도움을 받고 그들은 나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하는 사이랄까.
최재성 변호사에게 일단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사야카는 옆에서 일본의 계약 문화라던지 유의해야 할 점, 애매한 점을 찍어 주었다.
최재성이 어느 팀과 본격 협상을 시작할 건지 며칠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렸다.
“하카타 블루샤크로 가겠습니다.”
“왜!? 하필 거기야!?”
“유일한 2부리그 팀인데다가 도쿄에서 가장 먼 시골인데!”
다들 나의 결정에 당황했다.
3팀 중 가장 매리트가 없었으니까.
가시마 1부리그 3천만엔 C계약
교토 1부리그 4천만엔 A계약
하카타 2부리그 3천만엔 A계약
“왜 하카타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맞아. 팀 레벨로 치면 가시마는 J리그 최고 명문이잖아. 연봉으로 치면 교토가 1등이구.”
“일단 가시마를 가장 먼저 제외했어요. A계약이 아니라 C계약이니까요.”
당시 J리그에서 C계약은 조건부 가계약을 뜻했고 A계약은 정식계약을 뜻했다.
“계약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신인이 리그에서 꾸준할 수 없어요. 또 가시마는 강팀이라 제가 첫해부터 주전을 뛸 가능성이 희박해요.”
“그럼 교토로 가면 되잖아. 거긴 주전이 보장되는 A계약이니까.”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보면 케빈 형 말이 맞으니까.
하지만 감성적으로 보면 이건 일종의 경력 도둑질이었다.
앞으로 2년 후면 한국의 박지승 선수가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해 2부리그로 추락한 팀을 하드캐리해서 승격시키며 교토의 구세주가 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유럽으로 진출한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내가 냉큼 교토에 입단해 박지승의 경력을 망칠 수는 없었다.
사실 내 입단이 박지승의 축구 경력을 어떻게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원래 실력이 좋은 선수니까 오히려 다른 구단에서 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영광을 원하지 남의 영광을 뺏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