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is money RAW novel - Chapter 221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라커룸에 들어온 소감이 어때?”
시어러의 물음에 유찬이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가 계속 찍으라고 손짓했다.
“냄새나고 더럽고 좀 그렇지? 사내 녀석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하하하.”
“아. 아닙니다. 정말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이.”
“뭐? 그건 좀 오버다. 어쨌든…”
시어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물끄러미 라커룸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이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듯.
“… 어쨌든 특별한 곳이긴 해. 축구에 미친 사내들에게는 말이야.”
시어러는 결심한 듯 테이핑을 끝내고 바닥을 몇 번 굴러본 후 라커룸을 나섰다.
유찬은 홀린 것처럼 그의 뒷모습을 찍었다.
참으로 늠름한 사나이 대장부의 등이었다.
저 사내는 지금까지 이 통로를 몇 번이나 오고 갔을까.
피치로 나가던 시어러가 잠시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기자 양반. 잘 찍어달라구.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FA컵 결승전이 열리는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입니다. 7만 5천 석을 가득 채운 축구팬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습니다. 경기장 가득 붉은 물결이 마치 아스널 홈구장 같네요.]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팀과 뉴캐슬을 연고지로 하는 팀의 규모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최근 뉴캐슬의 글로벌 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뉴캐슬은 팀 전술적으로도 실험적이지만 마케팅적으로도 다양한 실험을 하지 않습니까?] [스탠리 스포츠 디렉터를 중심으로 공격적인 글로벌 마케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과감한 투자가 계속되고 뉴캐슬이 지금 같은 선전을 이어간다면 세계적인 빅클럽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닙니다.] [예전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죠. 북잉글랜드의 소도시를 연고로 한 축구단이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요.] [그렇죠.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는 세상에서 뉴캐슬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나는 피치에 서서 본부석에 놓인 FA컵 트로피를 보았다.
빅이어에 비하면 귀여운 귀를 가진 저 작은 트로피는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디자인이다.
잉글랜드 리그의 FA컵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대회니까.
다른 나라의 FA컵은 [K리그 FA컵] 같은 식으로 리그 이름을 앞에 붙인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FA컵은 그냥 FA컵이다.
자기들이 컵대회 원조라는 거지.
“자~ 컵 가지러 가 볼까?”
전반전이 시작되자 아스널은 평소보다 템포를 늦추며 후방에서 천천히 볼을 돌렸다.
포메이션은 언제나 그랬듯 4-4-2다.
오늘은 헨리가 부상으로 빠져 신예 네덜란드 공격수 반 페르지가 대선배 베르캄브와 투톱으로 출전했다.
“헨리가 없으니까 오늘 골 넣을 사람도 없겠네.”
“뭐 이 새끼야!?”
반 페르지는 네덜란드 시절부터 다혈질로 유명했다.
그의 성질머리 때문에 아스널 보드진은 그의 영입을 끝까지 망설였다고 한다.
“저 네덜란드 꼬마는 왼발밖에 없으니까 왼쪽만 막으면 돼. 오른쪽은 신경 쓰지 마.”
“저 새끼가 진짜!”
나는 우리 선수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반 페르지가 덤벼들려 하자 베르캄브가 말렸다.
“호오~ 그래도 선배님 말씀은 잘 듣네. 착한 네덜란드 아이구나.”
“건. 장난은 적당히 해.”
베르캄브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양측 선수들이 몰려들어 몸싸움을 벌이고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시작부터 양 팀 선수들의 해묵은 감정이 폭발했다.
“다들 적당히 하지? 김건. 처음부터 너무 열 내지 마.”
“알겠어요. 선배.”
나는 시어러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 초반부터 신경전이 대단합니다. 우리 잉글랜드의 전통 FA컵 결승전에서 또 한 번의 불상사가 벌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아스널로서는 뉴캐슬, 특히 김건이 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팀이 최고조를 달릴 때마다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으니까요.] [뉴캐슬은 오랜만에 투톱을 가동했습니다. 시어러와 김건이 최전방에 나란히 섰습니다.]클롬 감독의 선택은 투톱이었다.
아스널과 같은 4-4-2였지만 우리는 미드필더를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놓았다.
아스널의 중원을 지키는 두 거인 비에라와 시우바를 상대하기 위해 우리는 빠르고 에너지 넘치는 미드필더를 기용했다.
[모드라치! 밀러! 협력 수비로 비에라의 볼을 탈취합니다! 아스널! 중원의 지배력을 잃고 있어요!]우리가 중원에서 4대2의 수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양 측면을 혼자 책임지는 필립 롬과 다니 아우베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아스널 측면 미드필더와 풀백을 막아내면서 역습까지 감행했다.
[아우베즈! 볼을 빼앗아 그대로 오른쪽 측면을 가릅니다! 얼리 크로스!!]볼이 원바운드로 빠르게 날아왔다.
나는 볼을 때릴 것처럼 달려가며 센터백 캠블을 끌어당겼다.
팟- !
순간 다리 사이로 볼을 통과시켰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왼쪽에서 그 남자가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뻐어어어어엉- !! 촤르르르륵- !!
[고오오오오올~!! 앨린 시어러! 오른발 논스톱 슛으로 첫 골을 집어넣습니다!!] [너무도 강력한 슈팅에 골망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뉴캐슬 1 대 0 아스널]시어러는 자신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초강력 슛을 때려놓고 언제나처럼 팔을 들어 올리며 세리머니를 했다.
“참 세리머니도 멋대가리 없는 양반이라니까… 머리카락도 없지만…”
신중했던 아스널이 급해졌다.
골을 먹자 템포를 올리며 공세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반 페르지! 마스체라도의 태클에 또 당합니다! 너무 서둘고 있어요!]신예 공격수 반 페르지는 마스체라도에게 꽁꽁 묶였다.
특유의 스피드를 내기 전에 미리 끊어버리는 전략이 통했다.
약이 오른 페르지는 점점 더 급하게 움직였고 아스널팀 전체 리듬을 깨트렸다.
[아스널 선수 교체합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요. 벵커 감독. 애가 타는 모양입니다.]반 페르지는 전반 28분 만에 프랑스 공격수 알리아데르와 교체 아웃 되며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벵커는 측면 미드필더를 빼고 신예 플레이메이커 파브레가즈를 투입했다.
전술적으로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뉴캐슬…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첼시와 시즌 최종전을 했을 때보다 더 성장했습니다. 워낙 어린 선수들이 중심인 팀이다 보니까. 성장 속도가 무섭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전 맨유 유소년 출신 퍼기의 아이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선수는 실전 경기를 통해 성장한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연습시합이 경험치 1을 준다면 1부리그 정규 게임은 경험치 30을 준다.
중요한 토너먼트전은 경험치 100을 준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보스전과 같은 결승전에서는 경험치 몇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프로선수는 두 종류로 나뉜다.
결승전을 치르고 승리해서 두 손으로 트로피를 들어본 선수.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선수.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내 경험에 의하면 메이저 대회 결승전에서 받을 수 있는 경험치는 최소 500점 이상이다.
그만큼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 속에 자신을 던져놓고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곳이다.
빠아아아악- !! 삐이이익- !!
[비에라! 팔꿈치로 밀러의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주심! 달려가 카드를 들어 올립니다! 옐로카드네요! 김건 선수 주심에게 퇴장을 시켜야 한다고 격렬하게 어필합니다!]계속 볼을 빼앗기자 신경질이 난 비에라가 팔꿈치를 휘둘러 밀러를 쓰러트렸다.
아무리 밀러가 돌쇠라지만 팔꿈치에는 장사가 없었다.
눈자위가 찢겨서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상처가 금방 부풀어 오를 겁니다. 당장 교체해야 해요.”
의료진의 말에 밀러가 펄쩍 뛰었다.
“절대 안 돼요! 난 아무렇지도 않다구요! 감독님! 저 괜찮아요! 교체하지 마세요!”
“…”
클롬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밀러가 자신의 우군을 찾다가 잉글랜드 대선배 시어러에게 매달렸다.
“선배! 아시잖아요! 전 어릴 때부터 이 경기에서 뛰는 게 꿈이었단 말이에요! 비록 웸블리 구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의 FA컵 결승전이잖아요!”
“… 감독님.”
시어러가 입술을 깨물며 클롬에게 눈빛을 보냈다.
클롬은 결국 밀러를 피치로 돌려보냈다.
잉글랜드 축구 소년들에게 FA컵은 꿈의 대회다.
웸블리는 꿈의 구장이고.
소년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티비로 FA컵 결승전을 본 추억을 갖고 있다.
삑! 삑! 삐이이익- !
전반전이 1대0으로 끝났다.
격전을 마친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밀러의 오른쪽 눈은 너무 부풀어서 이젠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클롬 감독은 코치들과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이기고 있었지만 라커룸 분위기는 침울했다.
밀러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유찬이는 이 모든 걸 카메라에 담았다.
자신의 숨소리가 들어갈까 봐 침을 조심스럽게 삼키며 카메라를 조준했다.
“밀러. 수고했다. 후반전은 쉬어라.”
“감독님!”
밀러가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너의 마음 알아. 하지만 넌 아직 어려. 앞으로 너의 인생에 FA컵은 여러 번 있을 거야.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 선수 생활을 망칠 수 있어. 당장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도록 해. 팀 닥터가 안와골절이 의심된다고 하니까.”
“…”
밀러는 벤치에 앉아서라도 경기를 끝까지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클롬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우리에겐 5일 후 챔스 결승전이 남아있어. 넌 지금부터 그 경기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이스탄불로 데려갈 거야.”
밀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평생 꿈꾸던 무대에 섰지만 결국 엔딩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걸 찍고 있던 유찬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박준표 기자는 볼펜을 꼭 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밀러가 불쌍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기가 썼던 축구 기사들이 과연 얼마나 진짜 축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었는가.
하는 기자로서의 자괴감이 더 컸다.
“자. 상대는 아스널이다. 이대로 끝나진 않을 거야. 끝까지 방심하지 마.”
후반전이 시작되자 아스널은 총공세를 감행했다.
파브레가즈를 이용해 중앙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필립 롬! 중원에서 파브레가즈를 밀착 마크합니다! 마스체라도와 협력 수비! 볼 빼앗아냅니다!]필립 롬이 중앙으로 올라와 마스체라도와 더블 볼란치를 이루었다.
안토니오가 교체로 들어와 왼쪽 풀백을 맡았다.
필립 같은 폭발적인 오버래핑은 기대할 수 없지만 이탈리아 수비수답게 맡은 지역은 확실하게 커버해냈다.
“김건이 온다! 막아!”
나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아스널의 심장에 비수를 꽂기 위해 단독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