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 is money RAW novel - Chapter 24
저보고 베르캄브의 서브로 뛰라는 말씀입니까?
“하카타역 광장! 그때 만났던 날라리 여고생이구나! 맙소사!”
개막 전날 유찬이와 마주쳤던 불량 갸루 여고생이었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찍어주었는데.
그때도 본판은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180도 변할 줄이야.
“내 인터뷰를 봤구나.”
나는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별생각 없이 대충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 청순한 스타일이 좋다고 했었는데 그걸 보고 스타일을 바꾼 모양이다.
뭐. 어쨌든 앞길이 창창한 소녀가 나 때문에 불량의 길(?)을 포기했다면 잘된 일 아닌가?
나에게 발리슛을 먹은 이후 삿포로는 전의를 상실했다.
맞불 압박 작전을 하다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이유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맞춤 체력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패배를 직감한 삿포로 관중들이 하나둘 먼저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우리는 나와 아우베스의 추가점을 더해 4대0 완승을 해냈다.
[하카타 블루샤크! 놀랍게도 잔여 9경기를 남겨두고 J2리그 출범 첫해 우승을 차지합니다! 하카타는 내년 시즌 J1리그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경기가 끝나고 우리는 몇 번이나 운동장을 돌며 푸른 물결을 일으키는 팬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애써 담담하려고 했지만 전생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프로 첫 우승이라 벅찬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르코와 피터도 오늘만큼은 활짝 웃었다.
라커룸에서 샴페인 샤워로 우승 파티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마르코 감독이 나만 불렀다.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딘데요?”
“삿포로 그랜드 로열 호텔 스카이라운지. J리그 간부들이 전체를 통째로 빌려 파티를 한다는군.”
“그래요?”
“벵커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해.”
“알겠어요. 제가 영어가 서툴러서 통역사를 데리고 가고 싶은데 괜찮죠?”
나는 마르코를 먼저 보내고 케빈 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호텔 근처 술집에서 자기들끼리 맥주를 마시며 우승을 자축하고 있었다.
“다들 주인공도 없이 기분 내요?”
“왜 왔어? 오늘은 동료들과 놀아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린 프로잖아요. 축구 동료들과는 축구장에서만 잘 놀면 되죠. 지금부터 일하러 가야 하니까 다들 일어나세요.”
“일?”
“케빈 에이전트님. 오늘 밤 비즈니스가 있습니다.”
“지금? 누굴 만나는 거야?”
“예.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르센 벵커라고.”
“벵! 커!?”
다들 너무 큰 소리를 내서 술집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
나는 일행들과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로 갔다.
케빈 킴과 김승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유럽 축구빠인 둘에게 벵커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짜… 내가 아르센 벵커를 만난다구…”
“우리 김구너가 로또 맞은 날이네. 건우 덕분에.”
케빈 킴이 꾸레(FC바르셀로나 광팬)라면 김승진은 구너(아스날 광팬)였다.
그런 김승진에게 갑자기 아스날의 수장 벵커를 만나러 가자고 했으니 깜놀할 수밖에.
1999년 당시 아르센 벵커는 EPL의 혁명가였고 아스날FC는 꿈의 축구를 하는 혁명군대였다.
“나… 안 되겠어. 못 들어가겠어.”
“승진 형님. 왜 그래요? 정신 차리세요.”
“내가 벵커를 직접 만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호텔에 도착해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는데 김승진이 파티장 앞에서 못 들어가겠다고 버텼다.
무슨 치과 앞에서 드러누운 애도 아니고.
“승진 형님은 일개 팬으로 벵커를 만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에이전시 임원으로 만나는 거에요. 앞으로 세계적인 거물들을 계속 만나게 될 텐데 그때마다 이러실 거에요?”
“…”
김승진은 나의 설득에 마음을 굳게 먹고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나, 케빈 킴, 사야카, 김승진, 이유찬이라는 눈에 띄는 조합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J리그 관련 거물들이었다.
기자 나부랭이나 평범한 에이전트들은 감히 들어올 수도 없는 고위층의 파티였다.
보안요원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김건! 여기야. 들어와.”
마르코가 룸에서 나와 손짓했다.
그가 부르는 곳으로 갔더니 VIP 파티 중에서도 VVIP만 들어올 수 있는 시크릿룸이 있었다.
“다 들어올 수는 없겠는 걸? 안이 좁아서.”
나는 결국 케빈 형만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김승진을 보니 도저히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김건우라고 합니다. 영어명은 김건이니까. 편하게 부르세요.”
“반가워요. 김건 선수.”
벵커가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교수라는 별명답게 꼬장꼬장한 인상이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몹시 애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게 부담됐다.
VVIP룸은 마르코의 말과 다르게 넓고 쾌적했다.
‘안이 좁다구?’
공간이 좁다는 뜻은 아니었던 거다.
슬쩍 주변을 살폈다.
얼굴에 ‘거물’이라고 적힌 남자 2명이 저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중 1명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살짝 벗겨진 머리에 덕이 있어 보이는 남자.
‘누구지?’
마르코가 내 생각에 불쑥 끼어들었다.
“벵커 감독님은 내가 모나코에 있을 적부터 은사님이셔.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지.”
“그랬군요.”
일단 대머리 남자는 잊고 벵커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르코는 정말 공손하게 벵커를 모셨다.
저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둘의 축구 스타일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뭘 배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르코는 벵커를 스승으로 모셨다.
“오늘 경기에서 왜 그런 식으로 공격을 풀어갔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제 영업 비밀인데요.”
실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하하!!”
나의 농담에 교무실처럼 답답했던 공기가 확 풀렸다.
“교수님한테만 살짝 알려드리죠. 삿포로는 오늘 익숙지 않은 전방 압박에 치중하느라 센터백과 풀백의 수비 지역이 겹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하프 스페이스를 공략했던 겁니다.”
“하프 스페이스?”
벵커가 ‘내가 모르는 축구 용어가 있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하프 스페이스 공략이란 화두가 축구계에 유행하는 건 앞으로 10년도 더 지나야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 그냥 제가 만든 단어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하프 스페이스가 정확하게 어떤 지역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어라.
이러다가 세계 축구 역사가 바뀌는 거 아닌가?
잠시 망설였지만 살짝 맛만 보여주기로 했다.
“하프 스페이스는 포백 기준에서 센터백과 풀백 사이의 공간을 뜻합니다. 그냥 제가 만든 단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흠… 그렇군.”
“공격수, 윙, 미드필더가 삼각대형을 만들어 하프 스페이스를 집중 공략하면 수비는 괴로울 수밖에 없죠.”
벵커는 별명대로 교수처럼 이것저것을 캐물으며 나의 축구 지능을 테스트했다.
벵커의 앞으로 축구 경력과 향후 20년간의 축구 전술 흐름을 다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답안지를 펴놓고 시험을 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짜 무서웠던 건 오늘 90분 동안의 내 플레이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는 거다.
역시 세계적 거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교수님을 상대로 강의 한 번 제대로 해봐?’
세계 최고의 감독 앞에서 더 잘난 척하고 싶은 욕구가 끌어 올랐지만 참았다.
내가 가진 미래 축구 지식을 밑천으로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벵커는 나와의 대화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짓더니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팀에서 뛸 생각 없나? 난 김건처럼 처진 위치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창의적인 공격수가 필요해. 맨유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옆에 있던 케빈 킴이 내 허벅지를 하도 세게 잡아서 깜짝 놀랐다.
놀랄 만도 하지.
지금은 1999년이었으니까.
박지승이 PSV아인트호벤에 입단하는 게 앞으로 4년 후다.
한국 선수가 유럽 축구팀에 입단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던 시절이다.
그것도 현재 최고로 핫한 EPL의 왕자 아스날FC의 영입제의라니!
“저보고 베르캄브의 서브로 뛰라는 말씀입니까?”
나의 말에 마르코 감독도 흠칫 놀랐고 케빈 형은 삿포로 얼음 축제 조각상이 되었다.
아니 벵커가 무슨 깡패도 아니고 다들 왜 이렇게 쪼는 건지.
“일단은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자네가 베르캄브 보다 좋은 폼을 보여준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줄 거야.”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미리 준비한 대사를 날렸다.
“당분간은 베르캄브를 이길 자신이 없네요. 죄송하지만 저는 저를 중심으로 플레이하는 팀을 원하고 또, 리그 전 경기 출장을 원합니다.”
“그렇군… 무슨 이야긴지 알겠어.”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미련 없이 일어나 룸을 나가다가 돌아서며 한마디를 던졌다.
“티에르 헨리 말입니다. 요즘 헤매고 있잖아요.”
“그렇지.”
“심리적 부담을 좀 덜어주면 금방 폼이 올라올 겁니다. 헨리의 축구가 세리에A에는 맞지 않았지만 EPL과 감독님의 축구와는 분명 잘 맞거든요. 필요한 건 약간의 적응 시간뿐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EPL팀들은 대부분 플랫 4-4-2를 쓰기 때문에 세리에A 팀들에 비해 하프 스페이스가 더 넓거든요. 윙 포워드에 가까운 헨리는 분명히 커트인과 커트아웃으로 그 공간을 잘 이용할 겁니다.”
“후훗. 고맙군. 내가 헨리에게도 알려주지.”
“그러시던지요.”
나는 VVIP룸을 나왔다.
목이 타서 섹시한 은빛 드레스 미녀가 서빙하는 은쟁반에서 샴페인을 받아 원샷을 때렸다.
“캬아~~ 좋다.”
“너 미쳤어!!?”
“형이야말로 미쳤어요?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요?”
“어떻게 그런 제안을 단칼에 거부할 수가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벵커였다구! 벵커!”
“소리 좀 낮춰요. 촌스럽게 왜 이래요.”
나는 흥분한 케빈을 데리고 일행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