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48)
잠시 후.
라피네의 손에는 수염 뭉치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도서관의 커다란 창문 앞.
“…….”
“…….”
라피네와 제르칸은 숙연한 표정으로 라피네의 손에 담긴 수염 뭉텅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렝치스트 남작의 비명에 문밖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라피네를 말렸다.
〈꺄악! 아가씨!〉
〈이것 놔라! 이 못된 계집애가! 감히 누구를……. 아아악!〉
그러나 라피네는 더욱 세게 수염을 잡아당겼고……. 이게 그 결과물이었다.
턱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한 렝치스트 남작은 꼴딱 기절해 버렸고,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치료를 받으러 갔다.
그렇게 도서관엔 제르칸과 라피네만 남았다.
“……도서관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거잖아.”
라피네가 제 손에 가득 담긴 수염 뭉치를 보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라피네 네 말이 맞아.”
제르칸은 떨떠름하게 옹호하고는 라피네의 손을 잡았다.
“이제 이건 내려놓자.”
“응.”
파사삭.
라피네의 손을 벗어난 수염들이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제르칸은 라피네의 손에 남은 수염을 탁탁, 다정하게 털어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씻으러 간 다음, 산책을 하기로 결정했다.
* * *
황태자가 머무는 서궁에도 아주 예쁜 정원이 있었다.
라피네는 아름다운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제르칸을 힐끔힐끔 살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연해 보여서 더 신경 쓰이네…….’
정령들이 그런 라피네에게 속삭였다.
「아까 그 노인네를 내가 죽여 줄 걸 그랬지, 아가?」
「……제가 볼 땐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주인님. 턱에서 피가 막 나던데요.」
「다시는 수염이 안 날지도.」
그 목소리들을 무시한 채, 라피네는 생각에 빠졌다.
왠지 제르칸을 보니 전생에서 어린 시절, 늘 외로웠던 자신이 떠오른 것이다.
제르칸에게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르칸만 혼자잖아?’
사이좋은 삼총사인 3명의 친구들 중에서 제르칸만 외로운 신세였다.
아드리안은 엄하지만 다정한 아버지, 다정하지만 엄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거기에 귀여……업진 않지만 말썽꾸러기 쌍둥이 남동생과, 자신처럼 착한 여동생도 있다.
바이올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동딸이지만,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게다가 바이올렛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집사와 하녀들이 있었다.
‘반면 제르칸은…….’
우선 첫 번째로, 바람난 여자를 집구석에 데려온 등신 같은 아빠.
둘째, 엄마를 모함하고 제르칸을 괴롭히는 못된 황비.
셋째, 틈만 나면 속 뒤집는 배다른 형제.
넷째, 아빠랑 사이가 틀어진 외로운 엄마.
다섯째, 입으로 똥만 싸지르는 교육 선생.
여섯째, 제르칸을 두려워하는 시종들.
‘이런 것뿐이잖아…….’
곁에서 제르칸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가정환경과는 별개였다.
‘이렇게 보니 성격이 틀어질 만하네…….’
라피네는 괜히 숙연해졌다.
원작이 피폐물이 된 이유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 라피네. 네가 혼날 일은 없을 거야.”
라피네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고, 제르칸은 라피네가 혼날까 봐 겁먹은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라피네는 이 와중에 다정하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제르칸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날 걱정하다니. 역시 근본은 훌륭하다니까…….’
라피네는 걸음을 멈추더니 제르칸의 손을 꽉 잡았다.
제르칸의 손은 긴장으로 인해 차갑게 질려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교육 선생이 올 시간이라며 가 버리는 제르칸의 손끝은 이렇게 차가웠다.
‘매일매일 웃고 떠들어야 할 나이인데.’
라피네는 최근 제르칸이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 이유가 우울감 때문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바이올렛과 아드리안에게도 말할 수 없었겠지.’
제르칸은 아주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친구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제르칸은 누구보다 바이올렛과 아드리안을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이대로는 안 돼.’
늘 불안감을 느끼며 자라는 아이는 커서도 건강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제르칸은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걸어가고 있다.
그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언제 발밑이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위로해 주고 싶다…….’
라피네는 그저 제르칸의 손을 잡고 우물쭈물거렸다.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제르칸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이 다치지 않게, 다정하게 위로해 주고 싶은데…….’
라피네는 입술을 깨물다가 제르칸의 손을 꽉 잡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차갑게 질린 제르칸의 손이 긴장이 풀려 따뜻해질 때까지.
그렇게 정원을 한참이나 걷던 도중, 라피네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어? 저기 좀 봐.”
“응?”
라피네의 말에 제르칸 역시 고개를 돌렸다.
산책로의 화단에는 싱그러운 풀잎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대뜸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장미였다.
“우와, 초록색 풀잎 사이에 어떻게 혼자 꽃이 피어 있지?”
라피네가 꽃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중얼거리자, 제르칸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마 전에 심어져 있던 꽃이 저 꽃이었을 거야. 얼마 전에 성화목으로 전부 새로 심었거든.”
“아하. 그럼 장미 씨앗 하나가 혼자 살아남았었나 보다. 그렇지?”
“응, 그런가 보네.”
제르칸은 겨우 꽃 하나를 보고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라피네를 보며 웃었다.
그때.
“혼자 외로웠겠다.”
라피네가 꽃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제르칸은 가만히 라피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장미가 엄청 붉다. 제르칸 오라버니의 눈을 닮았어.”
“…….”
“그러니까 이 꽃의 이름은 제르칸으로 하자.”
“뭐?”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제르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라피네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예쁜 것도 똑 닮았잖아.”
“무슨…….”
“혼자 이렇게 잘 자라다니, 되게 대단한 꽃이야. 그렇지?”
“…….”
“우리 같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자.”
라피네의 말에 제르칸은 멈칫했다.
그러고는 작은 손을 들어 꽃을 살살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라피네를 멍하니 쳐다봤다.
“잘했다. 잘 자랐다. 대견하다. 훌륭하고 멋지다.”
“…….”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유치한 칭찬에 제르칸은 어이가 없었다.
아직 8살이라 어쩔 수 없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라피네가 손을 잡아당기며 “따라 해.” 하자, 제르칸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이상하게 온몸에 힘이 쭉 빠져 그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라피네는 시범을 보이듯 꽃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다. 외로웠지? 이제 내가 지켜 줄게.”
“…….”
“오라버니도 빨리 따라 해. 나만 하면 이상하잖아. 빨리 잘했다, 대견하다. 해 줘.”
라피네가 다그치자, 제르칸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잘했다, 대견…….”
그러나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제르칸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하고 목구멍이 조여 왔다.
제르칸은 한숨을 내쉬며 팔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
라피네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제르칸이 혼자 마음 놓고 울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와, 저기에도 꽃이 폈네! 나는 저기 구경하고 올게!”
그러고는 바로 옆 화단에 가서 쪼그려 앉아 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는 제르칸을 안아 주고 달래 주며 직접 ‘잘했다, 대견하다.’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등 뒤에서 제르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피네는 힐끔 고개를 돌려 제르칸을 쳐다봤다. 눈가가 붉어진 게 조금 귀여웠다.
‘늘 어른스러운 척하더니.’
라피네는 속으로 웃으며 벌떡 일어나 제르칸을 껴안았다.
‘우는 도중에 안아 주면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
제르칸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라피네를 밀어내지 않았다. 어차피 라피네는 제르칸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안기곤 했으니까.
라피네는 가볍게 제르칸의 등을 토닥이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혼자 피어 있는 붉은 장미를 다시 바라보며 다 들리도록 말했다.
“제르칸 꽃은 진짜 예쁘다. 그렇지?”
“…….”
제르칸은 얼굴이 붉어져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오빠를 놀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연못에 빗물이 떨어져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제르칸은 곧장 외투를 벗어 라피네의 머리 위에 걸쳐 주었다.
“비 오니까 어서 가자.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알겠어.”
라피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외투를 여몄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두 아이는 탁탁 물소리를 내며 빗길을 뛰어갔다.
작은 파문이 일었던 연못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점점 잠기기 시작했다.
제르칸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