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77)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변화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부터 제르칸을 모셔 온 퍼시는 누구보다 그 변화를 잘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무척이나 빡치셨군.’
제르칸은 대개 표정 변화가 없는 편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표정할 때도 눈썹이 구겨져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잠을 못 주무신 게 분명하다.’
안색이 퀭하거나 눈 밑이 검은 건 전혀 아니었다. 오늘도 제르칸의 피부 결은 완벽했다.
하긴, 전쟁터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도 혼자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한 형상을 한 인간이 바로 제르칸이었다.
퍼시는 그런 그의 눈의 흰자가 평소와 달리 살짝 붉은 걸 보고 알아챌 수 있었다.
“대답해,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각설하고, 저렇게 따지는 것만 봐도 느껴졌다. 제 상관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는 걸.
“오늘 모든 일정은 취소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능숙한 보좌관인 퍼시는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제르칸은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자꾸 화가 나네.’
제르칸은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서류를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피네가 그 형편없는 망할 쓰레기 놈의 청혼을 받아 주었는지만 신경 쓰였다.
궁금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잠시 고민에 빠졌던 제르칸은 쉽게 답을 내었다.
‘난 원래 호기심이 뛰어난 편이었나 보군.’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했다.
24년 만에 안 사실이었다. 자신은 궁금한 게 있으면 그게 해결되기 전까진 아무것도 못 하는 성격인 것이다.
결국, 제르칸은 직접 라피네를 찾아가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것은 아드리안이었다.
제르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어젯밤에 아드리안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뭘 하고 있었길래 그런 미친놈이 저택 앞으로 찾아오는 걸 모르고 있던 거야?
저런 녀석이 푸른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자신의 여동생도 제대로 못 지키는 놈이?
묘하게 분노의 화살이 아드리안에게 날아갔다.
제르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드리안은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와 물었다.
“어제 라피네와 저녁 식사는 어땠어? 라피네한테는 일부러 묻지 않았는데…….”
제르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문이 막혀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라피네가 뭐래? 응? 말 좀 해 봐, 궁금해서 기사단 오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라고.”
“후우…….”
제르칸은 애써 화를 누르며 심호흡했다. 이상하게 자꾸 화가 나서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는 것도 짜증 났다.
“비켜, 나도 궁금해서 지금 달려갈 참이니까.”
“뭐? 무슨 말이야? 어제 어떻게 됐냐니까? 응? 뭐야, 어디 가!”
제르칸이 아드리안만 덩그러니 둔 채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아드리안은 멍하니 열린 문만 바라보았다.
“전하?”
문 앞에 대기 중이던 호위 기사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르칸을 따라갔다.
“당장 에스턴 저택으로 간다.”
“지, 지금 말입니까? 에스턴 공작은 현재 황성 집무실에 와 있는데요?”
“공작을 만나려는 게 아니다.”
제르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호위 기사는 입을 꾹 닫고 시종을 시켜 말을 꺼내 오라 명령했다.
시종이 말을 데려오자마자 제르칸은 곧장 말에 올라타 황성을 빠져나갔다.
라피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운명은 야속했다.
그 시각, 라피네는 이미 한참 전에 저택을 나선 참이었다.
* * *
오늘 이른 오전.
라피네는 누군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번쩍 눈을 떴다.
‘어, 이게 뭐지.’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이 이상했다.
정령들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던 라피네는 곧장 두 정령을 소환했다.
「주인님! 주인님!」
「아가야!」
소환하자마자 오르파나와 루비의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아악.”
라피네는 귀를 막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두 정령은 라피네를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좌표! 성물의 좌표가 떴어요, 주인님!」
「아가야!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
10년이 넘도록 이 순간만 기다렸던 정령들은 급박했다.
라피네 역시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성물의 좌표? 그럼……. 어, 어디부터 가야 해? 둘 다 뜬 거야?”
「그래, 아가야! 내 거부터!」
「웃기지 마 곰탱이! 내 거부터야!」
라피네는 두 정령이 으르렁거리도록 내버려 두고 서둘러 외출 준비부터 시작했다.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땐, 본 모습의 오르파나와 아기 곰 인형이 서로의 목을 조른 채 탈탈 흔들고 있었다.
“……일단 둘 다 진정해. 지도부터 보여 줘 봐.”
라피네의 말에 둘은 씩씩거리며 각자의 좌표가 뜬 지도를 내밀었다.
‘아니, 왜 이렇게 멀어?’
라피네는 속으로 경악했지만, 티 내지 않으며 두 지도를 꼼꼼히 살폈다.
루비의 좌표는 대륙 동부 쪽이었고, 오르파나의 좌표는 북쪽이었다.
직선 거리상으로만 보면 동부 쪽을 먼저 가는 게 낫지만, 지형을 고려했을 땐 북쪽을 우선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라피네는 슬쩍 정령들의 눈치를 살폈다.
두 정령 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일단 내가 어떻게 해서든 둘의 성물을 다 찾아 줄 거니까 걱정 말고…….”
「……누구부터요?」
「누구부터!」
“…….”
라피네는 곤란한 듯 구구절절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직선거리상으로는 동쪽이 가까운데, 사실 지형을 따지면 북쪽을 먼저 가야 일정을 빨리…….”
「오예! 그럼 그렇지! 주인님! 당장 출발해요, 당장!」
「그렇구나…….」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조금 해진 느낌의 아기 곰 인형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라피네는 유독 루비가 불쌍하고 측은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 루비야. 대신 내가 최대한 빨리 서두를게. 응?”
「……알겠다.」
“일단 짐부터 좀 싸자.”
라피네는 곧장 여행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에게는 이날을 대비해서 미리부터 밑밥을 잔뜩 깔아 두었다.
‘정령들 때문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이지.’
처음에는 두 분 모두 펄쩍 뛰었지만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세뇌한 결과, 겨우 허락을 받아 둘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가피한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라피네는 짐 가방을 꾸리자마자 우당탕탕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아가씨?”
“……!”
라피네가 별안간 짐 가방을 끌고 나오자 각자 할 일을 하던 사용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머, 아가씨가 가출을 하시려나 봐!”
하녀 1명이 들고 있던 손걸레를 내팽개치더니 집사를 부르러 뛰어갔다.
라피네가 변명하려 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엄마를 비롯해 집사와 모든 사용인들이 현관 앞으로 모였다.
“라피네! 이게 무슨 일이니!”
엄마는 라피네의 팔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옆에 선 실레인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가문도 없는 이상한 놈의 청혼을 받아 주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의 도피를 하시려는 거지요!”
“라피네! 나는 네가 누굴 선택하든 응원할 거란다. 그러니…….”
“그런 게 아니에요! 다들 진정, 일단 진정해요!”
라피네는 손을 들어 한껏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엄마, 제가 저번부터 말씀드렸죠? 정령……. 정령석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요.”
“…….”
정령석은 라피네가 대충 지어낸 이야기였다.
정령들의 힘이 너무 커서, 정령석을 지녀야만 자신이 그 힘을 버틸 수 있다는…….
오르파나가 각본을 맡은 내용이었다.
“금방 돌아올 거예요. 제겐 정령들의 힘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갑작스러운 건 라피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펄쩍 뛰는 정령들을 두고 서두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루비와 오르파나가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루비와 오르파나는 그간 라피네를 위해 모든 잡일을 맡아 주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두 정령에게 얻어맞게 될지도 몰랐다.
* * *
그리하여 제르칸이 에스턴 저택에 도착했을 땐, 라피네가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정령석을 찾으러 갔다고 했습니까?”
“예, 전하.”
공작 부안의 설명에 제르칸의 표정이 구겨졌다. 정령석이 대체 뭐지?
그 역시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이지만, 그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 앞에서 내색할 순 없기에 일단 알았다고 말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제르칸은 연달아 뺨을 맞은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손에 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공작 부인이 그에게 전해 준 종이였다.
〈아 참, 전하. 라피네가 아드리안을 통해 이걸 전하께 전해 드리라고 하던데…….〉
밀봉되어 있던 편지를 열어 내용을 읽은 제르칸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종이에는 다음 맞선의 약속 장소와 시간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