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78)
약속은 총 10번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전부 제르칸의 일정을 피해서 잡은 시간대였다. 아주 치밀하게.
‘아드리안에게 물어봤나 보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기가 막히는 메시지도 함께였다.
전하의 운명을 꼭 찾길 바랍니다!^^*
이를 꽉 깨문 제르칸의 턱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쥔 종이를 콱 구겨 버리려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냥 얌전히 접어 품에 넣었다.
왠지…… 굉장히 열 받긴 하지만 라피네의 필체가 쓰인 종이를 구기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왜냐하면, 라피네의 필체는 정말 우아하고 귀여웠다. 별 뜻은 없고 그 이유가 전부였다.
제르칸은 곧장 정령들을 소환했다.
온화한 빛을 뿜어내는 하얀색 구체와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 구체가 나타났다.
각각 빛과 어둠의 정령이었다.
“정령석에 관해 말해 봐. 대체 그게 뭐지?”
제르칸이 묻자, 빛의 정령이 대답했다.
「음, 나도 모르겠군. 대체 그게 뭐지?」
말 많은 빛의 정령이 저렇게 짧게 대답한 거면 정말 모른다는 뜻이었다.
어둠의 정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정령석? 그건……. 어둠, 어둠의…….」
「아니 이 새끼 또 말 지어내려고 하네.」
빛과 어둠의 정령이 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난 지금 니들끼리 싸우는 걸 구경하려고 부른 게 아니야.”
제르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빛의 정령은 다시 고민했다.
「정령석이라……. 그, 성물인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정령석이라는 단어는 잘 안 쓰지만 말이야. 내가 볼 땐 그냥 헛소리하고 떠난 것 같은데. 내 의견이 왜 맞냐면…….」
“성물? 그건 뭐지?”
제르칸의 물음에 내내 상황 파악 못 하고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던 어둠의 정령이 대답했다.
「흥, 성물? 그딴 건 나약한 놈들에게나 필요한 거지.」
「그건 맞지. 그건 맞지.」
빛의 정령이 동의하자 어둠의 정령은 으쓱한 듯 후후 웃었다.
제르칸은 혼란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일단 정령석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라피네가 공작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떠난 거라는 건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가족들을 두고 떠난다고? 대체 왜?’
제르칸의 고민을 읽은 빛의 정령이 말했다.
「내가 볼 땐 말이지, 그 애는 너 때문에 떠난 거야.」
제르칸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어렸을 때 결혼 약속을 했다며? 네가 진짜로 결혼하자고 할까 봐 겁먹은 거지!」
“…….”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라피네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그건 네 생각이고. 걔는 모르잖아? 그러니까 겁이 난 거지. 맞선 리스트를 뽑은 것도 그것 때문인 거야. 자기한테 들러붙지 말고 이 여자들이나 만나라고! 어때, 내 추리가? 완벽한가?」
“…….”
「걔는 널 엄청 싫어하나 봐. 결혼하자고 할까 봐 도망까지 간 걸 보면 말야.」
빛의 정령은 속을 후벼 파는 말을 잘도 했다. 어둠의 정령 역시 합세했다.
「도망을 가다니. 비겁한 자로군. 당장 추적해서, 어둠의 칼로 피의 복수를……!」
그러나 정령들이 무어라 떠들어도 제르칸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전, 화살이 관통하듯 새로운 의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잠깐. 설마 어제 청혼한 그 미친놈이랑 떠난 건 아니겠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충 봐도 그놈은 귀족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떠날 이유는…….
‘잠깐. 이미 결혼을 한 자라면?’
추가된 의혹에 제르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냐, 라피네가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눈이 낮아도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놈이 있나?’
그래서 어제 그 미친놈의 청혼을 거절하고, 다른 놈과 도주한 건가?
도망갈 정도라면 에스턴 공작 부부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놈이라는 건데…….
제르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라피네는 눈이 낮다. 게다가 순수하고 맑은 아이니, 별 이상한 미친놈의 꼬드김에 넘어갔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게다가 혼자 떠났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나?
그러나 공작 부인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예전부터 여행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제르칸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공작 부인은 라피네가 정령사라 안심하는 것 같았지만…….
‘정령사라서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나?’
정령사는 희귀한 만큼, 많은 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건 신전일 수도 있고, 제국을 시기 질투하는 타국일 수도 있다.
그러니 정령사는 제국이 꼭 지켜야 할 존재인 것이다. 국가적 자산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하지.’
결론을 내린 제르칸은 곧장 호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아드리안이 책임지는 푸른 기사단이 아닌,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황태자의 비밀 기사단을 움직이라고.
명령은 간단했다.
라피네 에스턴을 추적하라.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라피네는 정령사이니 위험할 수도 있어서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 그러니…….’
제르칸이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자, 정령들은 작게 중얼거렸다.
「약간…… 개오버 같은데?」
「구질구질한 변명 같군.」
제르칸은 곧장 정령들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쓰레기 사이코 같은 놈과 더 멀리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 * *
한편, 라피네는 오르파나가 상단에서 가져온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라피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좌표를 확인했다. 의아함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잠깐. 얘들아, 있지. 이 좌표…….”
「왜 그러세요?」
곧바로 나타난 오르파나가 좌표를 확인했다.
라피네는 좌표와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설마 이 좌표 말야……. 저 설산은 아니겠지?”
라피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오르파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것 같은데요.」
“…….”
라피네는 떨떠름하게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을 바라보았다.
계절에 상관없이 만년설이 내린 위험한 설산이었다. 지형이 워낙 험해 절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일단 라피네는 다시 말을 몰았다.
이윽고 산 아래에 도착하자 막막함이 밀려왔다. 좌표는 여과 없이 산꼭대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치겠네…….”
산 아래 지하가 아닌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지만, 눈이 쌓인 위험한 산을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자 막막함이 눈 앞을 가렸다.
「주인님 힘내세요!」
오르파나가 마음을 담아 응원했다.
그래, 10년 넘게 자신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고생했던 오르파나를 위해서는 가야 한다.
라피네는 뒤집어쓴 로브를 단단하게 여민 뒤, 마음을 굳게 먹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머지않아 그 마음은 추운 날씨에 꽁꽁 얼기 시작했다.
“으……. 너무 추워.”
내가 무슨 언니를 찾아 설산을 헤매는 어느 애니메이션 속 공주도 아니고. 역시 이런 난이도 높은 산을 로브 하나 믿고 아무런 장비 없이 올라가는 건 무리였던 걸까?
한참을 묵묵히 올라가던 라피네는 돌연 주저앉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쌓인 눈이 많아지고 칼바람까지 불어왔다. 체온이 뚝뚝 내려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과 짐 가방을 아래에 두고 오는 바람에 뭘 더 걸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챙겨 온 건 루비가 깃들어 있는 작은 곰 인형뿐이었다.
라피네는 주저앉아 신발을 벗어 발을 살펴보았다. 얼어붙은 눈에 긁혀 난 상처가 가득했다.
“후우…….”
손에 입김을 불어 발목을 따뜻하게 감싸 보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루비한테 본모습으로 현신해서 꼭대기까지 태워 달라고 해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성물을 얻기 위해서는 정령사 본인이 직접 가야만 한다.
작은 도움을 얻는 정도면 몰라도, 그곳까지 루비의 힘으로 올라간다면 성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때,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루비야.”
「왜 그러냐, 아가?」
“내 발목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어?”
이 정도의 도움이라면 분명 상관없을 것이다. 루비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지칠 때마다, 체력을 가득가득 충전해 줘. 그것도 되나?”
「가능하긴 할 거다.」
힘과 생명력의 정령이니 그 정도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루비가 상처 위로 손을 올리자 하얀빛이 다리를 감싸 치유했다.
오르파나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상 라피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미안하기도 하면서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곰탱이의 도움을 받다니…….」
본인의 성물을 얻는 데 루비의 도움을 받아서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이라 라피네는 웃음을 삼켰다.
두 정령이 늘 티격태격하긴 하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제는 꽤 친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다시 산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오르파나, 이제 네 성물은 내 도움으로 얻은 거나 마찬가지다.」
「곰탱아 미쳤니? 그게 왜 네 도움으로 얻은 거야?」
「넌 내게 빚을 진 거다.」
「이……! 안 닥쳐? 누구 맘대로 단정 지어! 난 너 같은 무식한 놈 도움받을 생각 없어!」
라피네의 뒤를 쫓아오며 두 정령이 내내 시끄럽게 싸워 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피네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니 힘이 나서 더 열심히 올라갈 수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