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87)
라피네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아, 차라리 황후 폐하를 찾아가 볼까?’
황후 폐하라면 분명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잠깐……. 그랬다간 황비랑 또 엄청나게 피 튀기는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몰라.’
난데없는 사면초가의 상황.
라피네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꼭 궁지에 몰린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제국을 뜰까?’
아니면, 청혼서 중 아무나 골라서 일단 결혼 약속을 잡아?
미리 사정을 말하고 계약 결혼을 제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아니 잠깐, 계약 결혼?’
그 순간. 라피네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영웅처럼.
“……제르칸.”
한번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콸콸 물이 흐르는 것처럼 쏟아졌다.
라피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라피네가 일반 귀족 중 아무나 붙잡고 계약 결혼을 한다면……?
‘안토니오나 레베카 황비가 그 남자를 가만두지 않겠지.’
자존심 강한 그 두 사람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체면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 집안을 짓밟을 것이다.
‘황비가 건드리지 못할 거물급 가문에는 나랑 결혼할 만한 또래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제르칸이 딱이었다.
‘그래, 제르칸이라면…….’
그 예민한 황제의 기분도 거스르지 않고 안토니오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르칸이야말로 황비 쪽에서 대놓고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니까.’
라피네는 손끝을 깨물며 계속 고민했다.
‘좋아. 어차피 제르칸 역시 계약 결혼이 필요한 상황이잖아?’
사실 레베카 황비와 테들러 자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제르칸과 손잡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만…….
라피네는 어제 제르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네 말대로 계약 결혼이든 뭐든 결혼이 중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네게 강요하거나 제안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네가 먼저 제안했다면 모르겠지만 내 쪽에서 네게 결혼을 강요할 일은 없다는 소리야.〉
희망이 있나 싶다가도…….
〈결혼 상대는……. 네가 준 리스트 중에 알아보도록 하지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군.〉
〈그러니 더 이상 날 피할 필요 없어.〉
다시 착잡해졌다.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일단은 만나서 부탁해 보자.’
제르칸이 거절한다면 그땐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고.
뭐가 어떻게 되었든, 안토니오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베카 황비 같은 사람을 시부모로 두어야 한다는 것도 끔찍했고, 무엇보다 안토니오는 원작에서 나라를 망치는 망군이었다.
게다가 더 최악인 건…….
‘안토니오는 원작에서 여성 편력이 엄청 심했지.’
황제가 된 안토니오는 이 여자 저 여자 건들다가 여러 번 망신을 겪었다.
‘그런 놈과 결혼하느니, 황제와 적이 되는 게 나아.’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는 것이 옳다.
라피네는 곧바로 편지를 적어 가문의 기사를 통해 아드리안에게 전달했다.
제르칸과 약속을 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 * *
저녁 무렵이 될 때쯤 답신이 도착했다.
라피네는 종이에 적힌 약속 장소로 향하며 멋쩍은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은 바로…….
‘제르칸의 맞선 약속을 잡았던 식당이잖아.’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제르칸의 네 번째 맞선이 이곳에서 치러지는 날이었다.
‘약속을 취소한 건가? 아니면 맞선 끝나고 날 보겠다는 건가?’
라피네는 혼란스러워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분위기 좋은 식당의 넓은 홀 가운데에는 한 테이블만 놓여 있었다.
‘직원들은 없나?’
라피네는 우물쭈물 저 자리에 가서 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제르칸의 맞선 상대가 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숨어야겠다.’
라피네는 그렇게 조용하고 은밀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한구석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 걸 발견하고 그곳에 앉았다.
서빙을 하는 직원이 잠시 대기하는 자리인 듯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제르칸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도중.
의식하지 못한 사이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라피네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전하.”
제르칸이었다.
라피네가 어정쩡하게 일어나자, 제르칸은 대체 왜 이런 곳에 앉아 있냐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오늘 약속하신 상대가 올까 봐서요.”
“그 약속은 취소했어.”
“네?”
제르칸은 대답 없이 한쪽을 턱짓했다.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자리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고, 라피네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테이블로 향했다.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그 부분이 활활 불타는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은 뒤에도 라피네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말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대신 다른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다.
‘제르칸이 맞선 약속을 왜 취소한 거지? 설마…… 이미 계약 결혼 상대를 정했나?’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뒷북이 아닐 수 없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직원이 다가와 두 사람의 빈 잔에 물과 포도주를 따라 주고 식전 수프를 두고 갔다.
라피네는 물을 한잔 마시고 제르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르칸은 서늘한 얼굴로 라피네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라피네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일단 확인부터 해야 했다.
“저, 오늘 원래 약속은 왜 취소하신 건가요? 혹시 벌써 계약 결혼 상대를 구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 네가 약속을 미리 잡아 준 건 고맙지만……. 난 당분간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야.”
제르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라피네에게 득도 실도 아닌 묘한 대답.
“왜, 왜요?”
“결혼하지 않아도 내 위치는 확고해.”
“그렇지만……. 결혼을 서두를수록 여러모로 편하실 텐데요.”
“…….”
그 말에 제르칸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고, 제르칸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마치 날씨를 물어보듯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라피네, 넌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지?”
“예?”
“난 결혼은…… 정치적인 이득과 손해보다 마음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원작에서는 희대의 미친 집착남이었던 제르칸이 이렇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다니.
한편으로는 뿌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 쓰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겠다는 거 아니야.’
저런 말을 한 제르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제르칸의 물음에 라피네는 그제야 자신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 제 표정이 어때서요……?”
뒤늦게 억지로 미소 지어 봤지만, 제르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인데.”
“…….”
라피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확했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엎드려서 엉엉 울고 싶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르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 서로 윈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희망에 빠져 있었는데…….
제르칸의 가치관이 저렇다니, 기대했던 계획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라피네는 허탈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전하께 계약 결혼을 제안하려고 했거든요.”
“누가?”
“제가요.”
“누구한테?”
“전하께요.”
“…….”
제르칸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가 뭐라고 더 물으려던 사이, 직원이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라피네는 테이블 위에 스테이크와 샐러드가 올라오는 걸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배고파 죽겠네. 일단 모르겠다. 먹고 생각하자.’
여전히 제르칸의 앞이라 긴장되긴 했지만, 그래도 음식이 있어서인지 아군이 생긴 것처럼 든든했다.
라피네는 곧장 스테이크를 썰어 한입 먹어 보았다.
‘와, 유명한 레스토랑이라고 하더니. 진짜 장난 아니네.’
에스턴 저택의 요리사도 훌륭하지만, 이 레스토랑의 요리사 역시 실력이 뛰어났다.
오르파나가 자신 있게 이곳을 맞선 장소로 정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라피네가 열심히 음식을 먹는 사이. 제르칸은 그런 라피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라피네가 한 말이 씨앗이 되어 그의 마음속에 여진을 일으켰다.
‘나한테 계약 결혼을 제안하려고 했다고? 맞선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왜? 갑자기?
혼란스러운 와중, 맛있다는 듯 웃으며 스테이크를 먹는 라피네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도 뭐든 저렇게 잘 먹었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갑자기 계약 결혼이라니. 왜지?”
“네?”
라피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내 ‘아.’ 하며 대답했다.
“그게, 사실은 안토니오 황자가 저한테 청혼을 했거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