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88)
제르칸의 표정이 급격히 싸해졌다.
라피네는 저도 모르게 그가 쥔 나이프로 시선을 돌렸다. 제르칸의 눈빛이 꼭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뭐, 하긴……. 제르칸은 원래 안토니오를 싫어하니까.’
제일 친한 친구의 동생이 짜증 나는 이복동생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데. 누구라도 저런 반응일 것이다.
라피네는 그렇게 납득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아예 듣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황태자 전하께 부탁드리려고 했죠. 마침 전하께서도 계약 결혼이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
“근데 뭐……. 결혼에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죠.”
“그럼 어떻게 하려고?”
“뭐. 청혼서가 들어온 다른 귀족 가문 영식을 알아보든가……. 아니면 끝까지 거절하는 수밖에요. 하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 봤자 안토니오 황자와 결혼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하하하. 라피네가 자폭하듯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제르칸은 따라 웃지 못했다.
라피네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려던 때. 제르칸이 손깍지를 끼며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사실,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정치적인 이득과 손해지. 마음은 그다음이라고 생각해.”
응? 갑자기?
라피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제르칸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가볍게 웃었다.
꽤 치명적인 미소라 라피네는 움찔했다.
‘뭐, 왜……. 왜 저렇게 웃지?’
제르칸은 계속 먹으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손짓했다.
“일단 식사 후에 자세한 계획을 듣도록 하지.”
“아, 아…… 네.”
그 뒤로는 무슨 정신으로 음식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맛있어서 열심히 먹긴 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르칸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테이블 위에는 디저트와 홍차가 차려졌다.
제르칸은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피네는 그런 제르칸을 빤히 쳐다보며 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제르칸이 갑자기 태세를 변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왔다.
‘그래, 내가 안토니오와 결혼하게 되면 제르칸은 에스턴 가를 적으로 돌려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아드리안과 절친한 친구인 제르칸으로서는 복잡한 상황일 것이다.
‘좋아, 그러면 그 핑계로 좀 더 꼬셔 보자.’
솔직히 제르칸과 자신이 손을 잡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연합이 없지 않나?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라피네는 일단 내가 살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전하, 그러면 혹시 제 제안을 받아 주실 의향이…….”
“일단 계획은 들어 보고.”
면접관 같은 제르칸의 태도에 라피네는 긴장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사람을 설득하고 말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라피네는 주변을 살짝 힐끔거렸다.
황태자의 맞선 자리로 선정한 만큼 이 장소의 보안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워낙 비밀스러운지라 조심하게 됐다.
“사실 제가 거절한다 해도, 황제 폐하께서는 겉으로는 불쾌한 내색을 안 하실 거예요.”
“……하지만 은근히 티를 내실지도.”
“그, 그렇긴 하죠……. 어쨌든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조금 꽁한 면이 있으시잖아요? 저는 그게 걱정인 겁니다.”
“많이 꽁하시지.”
제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네는 제 아버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저희 아버지도 제 일에 있어서는 좀 유난이신 편이라서요. 그래서 혹시라도 폐하와 그 일로 부딪친다면 저희 가문에 피해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죠.”
“폐하께선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다.”
제르칸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좀 말이 통하는 것 같아 라피네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피네는 그 외에도 자신이 다른 귀족 영식과 결혼할 경우, 황비나 안토니오가 벌일 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충분히 그럴 짓을 벌이고도 남을 인간들이지.”
제르칸 역시 그들의 반응이 쉽게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이제 밑밥은 충분하다.’
사실 한시가 급했다. 안토니오가 언제 황제를 찾아갈지 모를 일이니까.
라피네는 초조함을 숨기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로, 제가 안토니오 황자와 결혼하면 전하께서도 곤란하시지 않겠어요?”
라피네의 질문에 제르칸의 미간이 구겨졌다. 상상만으로도 짜증 난다는 듯이.
“그렇다고 에스턴 가문이 황비와 손을 잡진 않겠지만……. 황비는 얼마든지 저희 가문을 이용하려고 할 거예요.”
“그러겠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는…….”
라피네가 정말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제르칸을 쳐다봤다.
“저는 정말로 안토니오 황자와 결혼하기 싫어요. 차라리 제국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요.”
“…….”
“그래서 만약 전하께서 계약 결혼을 필요로 하신다면……. 저와 한번 손을 잡아 보시는 건 어떨까요?”
라피네가 눈을 깜빡이며 애처롭게 물었다. 꼭 아기 고양이 같은 모습에 제르칸은 잠시 멈칫했다.
제르칸의 표정이 굳어 있자 라피네는 우물쭈물하며 추가로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의 자리가 이미 견고하긴 하지만, 황비와 테들러 자작이 거슬리는 것 또한 사실이잖아요? 제가 완벽하게 전하의 오른팔이 되어 드릴 수 있어요.”
라피네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저만한 조력자는 이 제국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우실 거예요!”
어차피 라피네의 목표에는 제르칸이 무사히 황제가 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태자비가 되면, 황비와 테들러 자작을 견제하기 쉬워지는 것 또한 장점이었다.
“전하……?”
라피네가 간절히 그를 부르며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제발 잡아 달라는 듯이.
멍하니 라피네를 쳐다보던 제르칸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끝을 가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끝이 닿은 순간. 라피네는 꼭 물귀신처럼 양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잘 생각하셨어요!”
조금 전까지 간절함으로 촉촉했던 라피네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제르칸은 제 커다란 손을 꽉 잡고 흔들어 대는 라피네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계약 기간은 길지 않을 거예요. 전하께서 황제 자리에 오르는 날, 그날 저희 계약은 끝나는 걸로 하죠!”
라피네의 이어지는 말에 제르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 * *
두 사람은 좀 더 은밀한 대화를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에스턴 가 저택 인근, 제르칸의 마차 안이었다.
사실 보안을 위해서는 라피네의 방이나 황성이 안전하겠지만, 아직 대놓고 드나들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행히 마차가 넓어 계약 조건을 조율하기엔 충분했다.
마주 앉은 사이에는 간이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라피네는 원하는 계약 조건을 전부 적은 뒤 내밀었다. 그리고 제르칸에게 건네받은 종이를 확인했다.
서로가 원하는 계약 조건을 체크하는 과정이었는데……. 종이를 내려다본 라피네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래.”
제르칸이 라피네에게 바라는 계약 조건은 하나였다.
‘비밀을 엄수할 것.’
반면, 라피네가 적은 조건은 페이지를 꽉 채울 정도였다.
제르칸은 진지한 표정으로 모든 조건을 확인하고 종이를 내려놨다.
“계약 사항 전부 동의하시나요?”
“그래.”
조건이 정해졌으니 마지막 계약만 남았다. 라피네는 정령들과 계약할 때처럼 마나를 사용해 허공에 계약서를 만들어 냈다.
“추가할 사항이 있으면 상의하에 추가하는 걸로 하죠.”
계약서가 완성되자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마나를 이용해 작성된 계약서는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언제든 꺼내서 볼 수 있지만, 수정하거나 없애려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라피네가 악수를 권하며 손을 내밀었다.
제르칸이 마주 잡자 라피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제 그럼 전 이만…….”
그렇게 라피네가 그만 가 보겠다며 마차를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근데…….”
제르칸의 붙잡는 목소리에 라피네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하루아침에 우리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해하지 않을까?”
“아 참. 그 이야기를 빼먹었구나. 제가 준비한 시나리오가 있어요!”
라피네가 다시 의자에 제대로 앉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보라는 듯한 손짓에 제르칸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라피네가 귓속말을 시작하자 제르칸의 목덜미가 긴장으로 굳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가…….”
귓속으로 스며드는 라피네의 숨결이 가슴까지 간지럽혔다. 좋은 향기도 코끝을 통해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라피네가 세운 시나리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때요? 괜찮죠?”
“…….”
솔직히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제르칸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피네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마차를 빠져나갔다.
라피네가 가 버리고 나니 텅 빈 자리가 유독 넓게 느껴졌다.
제르칸은 그 후로도 마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