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91)
서명 절차가 끝나자, 라피네는 제르칸의 팔을 두드리며 제안했다.
“그럼 전하, 제 방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어서 가요, 네?”
“그…… 러지.”
제르칸은 반항 없이 라피네를 따라나섰다. 가족들과 시종들은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문은 닫지 마라, 라피네…….”
에스턴 공작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으나,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다.
다들 측은한 눈으로 에스턴 공작을 쳐다봤다.
특히 제르칸과 함께 온 황성 시종은 거의 울 기세였다. 딸을 둔 아버지로서 공작의 상황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라피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르칸과 떨어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셨어요.”
라피네는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왔다.
제르칸은 얼떨떨했다.
말투도 말투지만, 라피네는 눈빛마저 바뀌었다.
아까와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라피네의 현재 눈빛은 정말이지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바뀌지.’
솔직히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제르칸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라피네가 정말 날 아직 좋아하나?’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그 순간 자신을 향한 라피네의 눈빛이 사랑스럽게 반짝거렸었다.
“뭐 하세요? 앉으세요.”
“……그래.”
제르칸은 소파에 앉으며 이상하게 씁쓸한 마음을 외면했다.
“그래서 황비 쪽 반응은 어때요? 안토니오는요?”
“조용하더군. 아마 당장 대놓고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잘됐네요.”
라피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청혼하던, 아니 그게 청혼인가? 아무튼 깡패처럼 결혼을 요구하던 안토니오를 떠올리면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결혼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은……. 진짜 소름이 돋았다.
안토니오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귀찮아질 뻔했는데.
이게 다 제르칸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라피네의 제안을 수락해 준 덕분이다.
라피네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전하께서 후회하지 않도록 최고의 황태자비가 될게요.”
라피네가 미소를 띠며 말했으나 제르칸은 따라 웃지 못했다.
라피네의 눈빛은 흡사 전장에 나가기 직전, 반드시 적의 목을 가져오겠다고 충성 맹세를 하는 기사 같았다.
딱히 뭘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비장해질 것 없어. 나야말로 노력하지. 좋은…….”
‘좋은 남편이 될게?’라고 말하는 게 맞나. 뭔가 이상해서 제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라피네는 됐다는 듯 손을 젓고 말했다.
“그럼 다음번엔 황성에서 뵙겠네요?”
약혼식을 치르고 나면 라피네는 예비 황태자비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된다.
정식 결혼식은 몇 달 후 치러질 것이다.
“그래, 그렇겠군.”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앞에서도 잘해야 할 텐데…….”
라피네가 중얼거렸다. 아마 ‘연기’를 말하는 거겠지. 제르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잘하던데?”
“뭐가요?”
“……나한테 푹 빠진 연기 말이야.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
칭찬을 받자 라피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정도 연기쯤이야 뭐, 아무것도 아니죠.”
솔직히 상대가 제르칸이라 무척이나 쉬웠다. 다른 남자였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피네의 으스대는 반응에 제르칸은 또다시 씁쓸해졌다.
* * *
제르칸이 황성으로 돌아가고, 라피네는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속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체한 건가 싶었지만 그 느낌은 아니었다.
묘한 두통과 함께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급한 소식 아니기만 해 봐라…….”
오르파나가 라피네를 부르는 게 분명했다.
라피네가 마력을 차단하면 오르파나는 꼭 이런 방법으로 라피네를 불렀다.
원래는 두통뿐이었는데 성물을 찾은 뒤부터는 반응이 꽤 격해졌다.
마력으로 만든 막을 해제하자 오르파나가 나타났다.
“뭔데.”
「주인님, 주인님이 황태자와 결혼하게 되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라피네의 이마가 구겨졌다. 급한 소식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이 뻔했다.
「어둠의 정령과 마주치면 어떻게 해요! 저는 황성에 가기 싫어요!」
“나 자야 되니까 조용히 해라.”
「그렇지만……!」
오르파나는 계속해서 칭얼거렸다. 루비한테 쟤 좀 어떻게 해 달라고 하려는데, 루비는 이미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라피네는 분홍색 곰 인형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흐느끼는 오르파나를 달랬다.
“오르파나.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는 게 어때? 나 피곤한데.”
「흐윽.」
“어둠의 정령과 마주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야.”
「거짓말! 주인님이 황태자비가 되면, 이제 매일 밤 황태자랑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될 거 아니에요! 그럼 저는 어둠의 정령과 매일 마주치잖아요!」
어……?
라피네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다른 것들을 신경 쓰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남들 눈에 황태자비 부부는 신혼 그 자체였다. 당연히 한 침실을 쓰게 될 것이다.
“이거 큰일 났네.”
라피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제르칸과 한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빨리 도는 것 같았다.
매일 자기 전에 그 얼굴을 보며 잠들고, 눈뜨면 그 얼굴을 본다고?
상상만으로도 황홀하긴 하지만, 심장에는 유해했다. 이러다가 자신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게 되면…….
「주인니임!」
오르파나가 계속 찡얼거렸지만, 라피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눈이 말똥말똥해져 잠도 잘 수가 없었다.
* * *
그날 이후로 라피네는 약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드레스를 맞추는 과정 내내 멍한 상태였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 약혼식 당일 가족들과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가는 도중에도.
심지어는 약혼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이제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혼의 맹세를 나누십시오.”
신관의 말에 라피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제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예복 차림의 제르칸이 보였는데……. 머리를 단정히 넘긴 제르칸은 오늘따라 얼굴에서 빛이 더 났다.
‘그러니까 앞으로 매일 아침, 이 얼굴을 보게 되는 거라고?’
꿀꺽.
침을 삼키는 도중, 제르칸이 먼저 반지를 꺼내 라피네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라피네가 가만히 있자 제르칸이 그녀의 손을 쥐며 재촉했다.
‘아, 참.’
라피네는 제르칸이 한 것처럼, 반지를 꺼내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
마지막 예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밝게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웃지 않는 얼굴들도 보였다.
안토니오는 대놓고 무표정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테들러 자작 또한 떫어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또 특이하게 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한쪽에 선 에스턴 공작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바이올렛 역시 엉엉 울고 있었다.
이제야 현실감이 좀 느껴지는 것 같아 라피네는 긴장을 풀었다.
‘본분을 잊지 말자.’
제르칸의 얼굴에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원작의 흐름에 따르면 황후는 조만간 죽을 예정이었다.
오늘부터 라피네는 황성에서 지내게 될 테니, 황후를 더욱 가까이에서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이 황성에는 적도 함께 있지만.
‘자고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지.’
라피네는 피로연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저 멀리,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레베카 황비를 눈여겨보았다.
황비의 근처에는 최근 새롭게 친해진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테들러 자작은 그런 황비를 못마땅해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틀어졌나 보네.’
자세히 보니, 테들러 자작이 흘겨보는 건 정확하게는 안토니오였다.
안토니오를 두고 자작과 황비의 신경전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쟤는 왜 저렇게까지 표정 관리를 못하냐.’
안토니오는 내내 뚱한 표정이었다. 순간 라피네는 안토니오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빛에 살기가 담기는 것을 보고 홱 눈을 피했다.
“라피네!”
마침 다행히도 바이올렛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바이올렛은 붉어진 눈으로 라피네를 바라보다 꽉 끌어안았다.
“바이올렛, 이젠 포기해…….”
옆에 선 아드리안이 바이올렛을 진정시키려 했다.
“라피네는 내가 결혼해서도 딸처럼 데리고 살려고 했는데…….”
바이올렛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니…… 세상에 4살 차이 나는 딸이 어디 있어…….
라피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작게 웃으며 바이올렛을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바이올렛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 마음이 새삼스럽게 가득 느껴졌다.
“누가 괴롭히면 언제든 내게 말해, 라피네. 응?”
“알겠어, 언니.”
아드리안은 또 훌쩍이기 시작하는 바이올렛을 데리고 사라졌다.
라피네는 주변을 둘러보며 제르칸이 어디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황실 종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제르칸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걸어갔다.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시야를 가로막았다.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저 사람은…….’
라피네는 걸음을 멈추고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수도원에서 황비와 함께 왔다던 성녀 아닌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