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Older Brother, I Will Seduce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92)
라피네를 향해 다가오던 제르칸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셀레스티나가 눈을 내리깔며 인사했다.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우아한 자태였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끄는 미남, 미녀의 조합에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저, 황태자 전하……?”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고 있던 셀레스티나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왜 돌아오는 대답이 없지?’
고갤 들어 황태자의 얼굴을 확인한 셀레스티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태자는 마치 그녀를 투명 인간처럼 무시하며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인 라피네 에스턴이 보였다.
라피네는 어느새 몇몇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지?’
셀레스티나는 인상을 구기며 라피네와 제르칸을 번갈아 응시했다.
황태자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뚫어져라 라피네만 쳐다보았다.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벽처럼 말이다.
“비켜 주겠나.”
기다림 끝에 황태자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겨우 저거였다.
본인이 피해 갈 이유가 없으니 알아서 비키라는 오만한 말에서 황족 특유의 권위 의식이 느껴졌다.
셀레스티나는 기가 막혔지만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몰려 있던 사람들은 황태자가 지나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길을 터 주며 예를 올렸다.
‘라피네 에스턴이 하도 구애해서 받아 줬다던데……. 소문이 진짜이긴 한 건가?’
항간에는 그렇게 소문이 퍼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황태자를 따라다녔던 라피네가 먼저 청혼하며 울고불고 떼를 썼다고.
황태자는 그런 라피네를 어쩔 수 없이 받아 주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본 황태자는 소문과 조금 달랐다. 한순간도 라피네 에스턴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계획대로 쉽게 되긴 어렵겠어.’
황태자를 유혹하는 건 쉬울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랐다.
셀레스티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몇몇 귀족들이 황태자에게 대놓고 무시당한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사람들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편,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던 라피네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제르칸이 서 있었다.
‘어, 아까 분명…….’
그 성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아카데미 동기였던 영애들이 말을 거는 바람에 정신이 팔렸다.
금방 제르칸이 이곳에 온 걸 보면 별 대화를 나눈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상한데.’
확실히 이상했다. 원작에서는 눈곱만큼도 언급되지 않았던 성녀라는 존재. 대체 무슨 이유로 나타난 걸까?
인과 관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황후를 지지하지 않는 신전, 원작과 달리 견고한 황태자의 위치, 그리고 황제 부부의 온화한 사이.
원작과 달라진 여러 가지 이유가 성녀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
‘아무래도 신전을 더 주시해야겠어.’
“라피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제르칸의 목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그의 등장에 영애들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네, 네. 전하.”
라피네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제르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갑자기 고갤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놀라 움츠러드는 어깨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제르칸은 드러난 라피네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비밀스러운 말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보이도록.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어, 라피네.”
“아…….”
라피네는 그제야 깨달았다.
예식이 끝나고 긴장이 살짝 풀려서인가,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계속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제르칸이 고개를 들고 멀어지자, 라피네는 손을 들어 뺨을 가렸다. 마치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어머, 전하도 참…….”
라피네는 정말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어떻게 부끄럽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제르칸을 다시 쳐다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였다.
제르칸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얼굴이 확확 바뀌지…….’
라피네는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
라피네의 리얼한 연기에 제르칸은 정말로 본인이 애정이 듬뿍 담긴 부끄러운 귓속말을 한 것처럼 쑥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쑥스러워할 때 보통 얼굴이 붉어지는 것과 달리, 제르칸은 창백해졌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라피네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남들 눈에는 굉장히 싸늘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들리지 않게 속닥거렸다.
“전하께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저러는 걸까?”
“보나 마나 그렇고 그런 말 아니겠어? 저렇게 부끄러워하며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야.”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나?”
“그러게. 별말 아닌데 에스턴 영애 혼자 저러는 걸지도 모르지, 사실 짝사랑이나 다름없잖아?”
“그야 그렇지. 전하의 표정이 싸늘한 걸 보니 그런가 보네. 조금 안쓰럽군, 구애하던 영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전하의 표정 좀 봐. 정말 차갑다, 차가워.”
“그러게, 당장 칼이라도 꺼낼 눈빛인데? 라피에 영애가 마음고생 좀 하겠어.”
그렇게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라피네는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연회가 끝날 즈음엔, 참석한 귀족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라피네 영애가 정말, 정말로 황태자 전하를 깊이 흠모하는구나.’
귀족들은 저마다 그 이야기를 수군거리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연회가 끝난 후.
라피네는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했다. 엄마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 주셨고, 아빠는 눈물을 꾹 참았다.
“잘 자라, 라피네.”
루카와 로이스는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다정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아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라피네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가족들이 돌아가고, 라피네는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사파이어 궁으로 향했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처럼 라피네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그래서 더 큰 일이 남아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옷을 벗고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자, 임시로 배정된 시녀들이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 주었다.
몸이 노곤노곤해져 꾸벅꾸벅 졸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새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후였다. 그래도 잠깐 졸아서 그런지 약간의 개운함이 느껴졌다.
시녀들은 라피네를 어느 방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문이 열리자 라피네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라피네는 제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로 착각할 뻔했다.
방은 아주 화려하면서도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완벽하게 취향이라 마음에 들었다.
다만, 침대 위에 나이트가운을 입은 제르칸이 앉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제르칸 역시 라피네와 마찬가지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 떨어졌다.
“…….”
“…….”
두 사람 다 오늘 밤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이 순간이 다가오니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피네는 침대 옆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와인과 함께 치즈, 과일 같은 간단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제르칸의 시선도 라피네를 따라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준비하라고 시킨 게 아니야.”
제르칸은 저도 모르게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피네는 여전히 굳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르칸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라피네가 자신과 비슷한 디자인의 나이트가운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목구멍 안쪽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뒤.
“후우.”
라피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침대 옆의 테이블로 빠르게 다가가 착석했다.
“이 술, 뭔지 알아요. 선대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연도에 기념으로 담근 술이잖아요?”
라피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와인병을 자세히 살폈다.
“루카, 로이스 오라버니가 말해 준 적이 있거든요. 와, 폐하께서 이 술을 주실 줄이야…….”
제르칸은 떫은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라피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전하께서도 이 술 드셔 보셨어요?”
“……아니.”
“와, 그럼 저랑 처음 마시는 거네요?”
라피네는 들뜬 표정으로 비어 있는 2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묘하게 손이 떨렸으나 제르칸은 인식하지 못했다.
확실히 라피네는 연기의 귀재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떨고 있는데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미치겠다…….’
보통은 결혼식까지 한 뒤에 합방을 치르지만, 황족들은 조금 달랐다.
손이 귀한 만큼 무엇이든 서두르는 편이었다. 알게 모르게 허용되는 절차라고 할까.
‘예전에 황후가 그 이야기를 해 줄 때는 남 얘기라 생각하고 즐겁게 들었는데…….’
막상 자신의 이야기가 되자 미칠 지경이었다. 손발이 차갑고 발발 떨렸다.
‘어차피 계약 결혼인데 뭐 이렇게 떨리지. 진짜 그걸 할 것도 아닌데.’
이게 전부 제르칸이 너무 화려한 외모를 가진 탓이다. 딴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라피네가 술잔을 건네자, 제르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짧은 순간. 라피네는 제르칸의 가운이 살짝 벌어지는 걸 목격했다.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가슴팍이었다.
‘돌겠네…….’
라피네는 눈을 질끈 감고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래서인지 제르칸의 시선에 현재 라피네는 술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