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6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69화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간다.
[한국과 포르투칼 0:0의 상황에서 후반전 시작되었었는데요. 그라운드의 테리우스라 불리는 안정환 선수의 화려한 드리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패스를 받은 이영표 선수 빠르게 볼을 차고 나갑니다. 이영표 선수의 센터링을 이어받은 박지성, 박지성! 가슴 트래핑에 이은 왼발 슛―!]대한민국이 떠나가리만큼 뜨거운 환호성이 집집마다 울려 퍼졌다.
이촌동 저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치킨을 먹으며 월드컵을 시청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던 행복이를 돌보던 부모님 또한 환호성을 삼키며 서로를 얼싸 안았다.
포르투칼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국가대표팀의 쐐기 골이었다.
21살에 불과한 박지성의 강력한 왼발 슈팅이 대한민국 16강행을 결정지었다.
“강서방, 내 말이 맞지 않나! 우리 대한민국은 16강을 갈 수 있다니까!”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 삶에도 이미 보았던 장면이지만 이촌동 저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청을 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
특히 박지성의 가슴 트래핑에 이은 왼발 슈팅은 다시 봐도 영화와도 같은 한 장면이었다.
“장인어른, 제가 내기에서 졌지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도 보세요. 얼마나 기쁜지 행복이가 계속 웃고 있잖아요. 우루루 쭈쭈.”
아버지는 남동생 행복이를 품에 안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행복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갓난 애기가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방실 웃는다. 꺄르르 하며 웃는 웃음소리가 그 어느 선율보다도 아름답게 들려왔다.
그때 할아버지가 강현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현아, 아직도 4강이라고 생각하느냐? 할애비는 사실 16강만 올라와도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이제는 8강을 바라고 있구나.”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은 전문가들 또한 어렵다고 점쳤다. 그만큼 대진표가 좋지 않았지만 결국 대한민국이 똘똘 뭉쳐 해내고 말았다.
강현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4강 진출입니다.”
강현의 호기에 찬 확신에 할아버지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암, 남자라면 목표는 크게 가지는 게 좋은 것이지. 할아버지는 그냥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하자고 소리치며 국가대표팀을 응원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다시 없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16강 진출, 8강 진출을 이뤄낸 것도 모자라 유럽의 강호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첫 주자로 황선홍 선수가 나왔습니다. 믿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가대표팀을 믿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자, 주심 휘슬 붑니다―!]해설의 목소리는 떨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현의 손을 꽈악 움켜쥔 유하의 숨소리 또한 떨리고 있었다. 아무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지금 이 순간 떨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찬 공이 골대의 그물을 출렁이게 만들자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환호가 비집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과는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마지막 승부차기 주자로 주장 홍명보 선수가 키커로 나왔습니다. 이번 골을 넣으면 대한민국 4강 진출입니다. 홍명보 선수 공을 슈팅 합니다!]모두가 긴장하는 그 순간,
[골이에요, 골―!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합니다! 국가대표팀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획을 그었습니다. 정말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기쁨의 순간입니다―!]대한민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울의 모든 거리에는 붉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나와 환호를 질렀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함성소리가 전국을 뒤덮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촌동 저택에서 다함께 모여 월드컵 경기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흥분한 유하가 강현과 있는 힘껏 포옹을 한 것도 모자라 몰래 뽀뽀 세례까지 퍼부었다.
쪽쪽쪽.
부모님도 함께 포옹을 하고 얼마나 좋아하는가. 요람에 몸을 눕힌 행복이도 그 광경을 지켜보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손일선 사장 또한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임혜라 대표가 남편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스럽게 몸을 기댔다. 왕회장은 그 모든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할아버지가 묘한 시선으로 강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4강에 진출했구나.”
꿈 같았던 4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생각이 났다. 월드컵이 시작하기도 이전부터 강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언을 했던 것을.
* * *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강현 때문이었다.
휠체어를 탄 구스타프는 비서의 도움을 받아 강현의 작업실을 찾았다. 강현은 꽃잎이 띄워진 차를 구스타프에게 대접하며 그를 반겼다.
“마에스트로,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제가 그간 연락을 자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따금 자네가 보내주는 편지를 통해 이 늙은이가 활력을 얻고 있으니 그런 말은 말게나. 오랜만에 자네의 얼굴이 보고 싶어 한국을 찾았지. 불쑥 찾아와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그간 자네의 음악에는 어떠한 성과가 있었는지 궁금한 늙은이의 주책일세.”
“마에스트로의 방문을 꺼리는 음악가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저를 기억해 주시고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에스트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간 작곡했던 악보들을 구스타프에게 건네었다. 휠체어에 앉은 구스타프는 강현이 손수 그려 나간 악보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현이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알고 있었다. 크나큰 인기에 음악을 소홀히 할 법도 하건만 강현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악보들이 눈앞에 가득하지 않은가.
비옥한 양분 위에 자라난 꽃들처럼 악보 위의 음표들은 구스타프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현, 자네의 무한한 재능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아. 이렇게 늙은이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하니까 말일세. 그간 수많은 음악인들을 만나왔지만 자네만큼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설레게 하는 이는 야사 다음으로 처음일세.”
구스타프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손으로 강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가 이토록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음악인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강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영원한 마에스트로의 눈빛이 할아버지와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초이, 그 물건을 가져오게.”
구스타프가 말하자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왔다.
강현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일전에도 이미 구스타프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것이기에.
“야샤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지이자 그의 정수가 담긴 바이올린일세. 일전에도 자네에게 주려했지만 자네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받지 않았었지.”
20세기의 서막을 열었다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가 사용했던 바이올린이다.
지평선 끝의 노을을 바라보듯 붉은빛이 감도는 바이올린은 그 누가 봐도 관리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신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하물며 금방이라도 선율이 울려 퍼질 것처럼 번들거리는 은빛 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사정없이 뛰게 만들고 있었다.
“La felicità, 그 아이의 이름일세.”
라 펠리시타.
“이탈리아어로 행복이라는 뜻이지.”
강현은 조심스럽게 라 펠리시타를 받아 들었다. 야사 하이페츠가 사용했다는 전설의 바이올린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감응하듯 현을 얕게 떨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예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는 지나간 추억들을 되짚는 감정이 물결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연주해 줄 수 있겠나?”
어떻게 영원한 마에스트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라 펠리시타를 손에 집어 들자마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진한 감동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강현은 영원한 마에스트로를 위해 그의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세에 라 펠리시타가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 20세기를 풍미했던 야사 하이페츠와 함께 했을 때처럼.
* * *
겨울의 첫눈이 내렸다. 새하얀 눈송이 위에 강현과 유하는 함께 발자국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유하는 약속한 것처럼 아이비리그에 진학을 하자마자 한국을 찾아왔다.
눈발 위에서 발자국을 아로 새기던 강현이 유하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
그 순간 유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오빠는 아니야?”
강현은 유하의 선택이 일시적으로 피어난 감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지난 삶 마주했던 얼음여왕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괴리가 있었기에.
하지만 지금 유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강현은 이제 그녀의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서로가 있기에 그 모든 변화가 가능했으리라.
“이렇게 너랑 같이 등산을 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강현은 산을 오르며 함께 걸음을 옮기는 유하가 힘들지 않게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다.
천혜의 절경 부럽지 않은 겨울의 한라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기암절벽 위로 누군가 설탕을 뿌린 것처럼 달콤하게 눈을 현혹했다.
운무에 가득 찬 눈 덮인 대지 위로 노루가 뛰어노는 것을 보고는 유하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 덮인 한라산의 주위로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분명 이 겨울왕국 또한 새로운 봄날의 새싹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어!”
그 순간 돌계단을 오르고 있던 유하가 몸의 균형을 잃었다. 유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눈밭 위에 넘어질 거라 생각했던 유하의 몸은 강현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강현이 재빠르게 균형을 잃은 유하의 손을 잡고는 껴안은 것이다.
“칠칠치 못하게.”
강현은 유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제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하는 어렸을 적부터 변하지 않는 강현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느꼈다.
“오빠아!”
유하가 강현을 세차게 껴안으며 고개를 올려 강현을 바라봤다. 조형물을 빚어 놓은 듯 매끄러운 콧날과 깊은 눈빛아래 도톰한 입술은 키스를 하기 딱 좋았다. 더군다나 뒤따르는 등산객도 없어 타이밍이 좋았다.
쪽.
유하가 강현에게 입을 맞추고는 부끄러운지 앞장서 잰걸음으로 뛰어가자 강현이 혹시나 또 유하가 넘어질까 싶어 부리나케 뒤따랐다.
겨울의 산은 고요하다. 눈이 쌓이 산등성이를 타고 바람이 불어와 두 남녀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새하얀 세상에 단 두 사람만이 남은 기분이었다.
강현은 유하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꽈악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만의 미래를 향해.
“소나무에 눈꽃이 피었네.”
구불구불하게 피어난 노송 위로 눈꽃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환경에 따라 다르게 자라는 노송은 인간의 삶과 같았다. 분명 강현의 마음속에 자리한 노송 또한 유하라는 여자를 만나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일 테다.
그 순간 유하가 눈을 주워 들고는 강현의 머리 위로 흩뿌리며 미소 지었다. 강현 또한 지지 않을세라 마주하며 눈을 흩뿌렸다. 두 사람을 축복하듯 하늘 아래 하얀 눈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강현은 지난 삶 도저히 알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