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CEREED RAW novel - Chapter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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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허의 상황
엠비 남작은 듀메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원래대로라면 제국으로 넘어가 만나기로 약속한 귀족을 만나야 했지만, 듀메인이 그것을 거부하자 엠비 남작은 무조건 그리 하겠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간간히 어디선가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듀메인의 명령에 나르디가 모두 해치웠다.
“저······.”
남작은 단 하나 남은 말의 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옆에서 조용하게 걷고 있는 듀메인을 쳐다보며 운을 띄었다.
한사코 말을 타고 갈 수 없다고 했지만, 듀메인이 이제 형식상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이니 말을 타야 한다고 딱 잘라 말하니 엠비 남작은 이번에도 들을 수밖에 없어서, 지금 이렇게 말을 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누가 봐도 듀메인과 나르디는 말 위에 앉아 있는 엠비 남작을 모시고 있는 개인 병사라고 믿을 정도였다. 다만 그 병사들이 좀 오싹한 기운을 풍기고 있지만, 겉보기에는 그리 보였다.
“뭐냐? 크크큭.”
듀메인은 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에는 자신을 두려운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
‘크크. 기분이 좋군.’
인간들이 힘에 굴복하여 자신을 두려운 모습으로 보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듀메인이었다.
“저······. 소년은 몇 살이신지······?”
남작의 말에 듀메인은 자신의 옆으로 조용하게 걷고 있는 나르디를 불렀다.
“나르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15살입니다.”
“들었나? 크크크.”
남작은 스스로 15살이라고 밝힌 소년의 무미건조한 말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이라면 분명 경지는 못해도 소드 마스터일 것이다. 자신의 힘과 빠르기를 능가하는 소년의 모습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15살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소년.
이게 가능키나 한 말인가?
남작이 살펴본 바로 소년의 몸에 축적된 기운은 뭔가 이상했다. 마나를 몸에 축적하고 있는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느낌이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
악마의 기운.
자신을 협박하여 계약을 해버린 악마 같은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악마 같은 인간은 얼마나 강한지 몸에서 아무런 마나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몸 밖에서만 그런 기운이 어렴풋 느껴질 뿐이었다.
‘소년이 소드 마스터인데, 저 소년를 마음대로 부리는 악마 같은 인간의 경지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엠비 남작은 이미 나르디의 경지를 소드 마스터라고 스스로 정해버리고,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듀메인을 더욱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듀메인은 남작이 다시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쳐다보자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큭큭큭. 또 뭔가? 남작 나으리.”
“아, 저, 저 그게······.”
남작은 자신이 두려움에 쳐다본 게, 무슨 용무가 있는 줄로 착각한 듀메인이 뭐냐고 묻자 당황해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악마 같은 인간은 기분 좋은지 큭큭 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면 그를 놀리는 것처럼 되자, 자신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꺼냈다.
여전히 더듬거렸다.
“소, 소년의 경지가 소드 마스터인지?”
엠비 남작은 자신의 말하고도 잘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만약에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면 큰일이 났으리라.
“큭큭큭! 생각보다 보는 눈이 있구나. 크크크!”
‘휴······.’
남작은 기분 좋은 듯 말하는 듀메인의 말에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은 나름대로 듀메인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고, 밉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럼 당신의······.”
남작은 다시 궁금한 점을 말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당신’ 이라는 말을 내뱉자, 크게 놀라며 듀메인은 주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실수를 했다는 표정이 여실히 들어났다.
악마 같은 인간에게 ‘당신’ 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사망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남작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불쌍해보였을까?
듀메인은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인’ 이라고 불러라. 크크.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계약서는 네놈의 저택에서 바로 적어주겠다. 크큭큭.”
듀메인은 자신의 이름 끝자리를 부르게 하고는 계약서를 운운했다.
이들은 계약서도 없이 그냥 구두로만 계약을 맺은 것이다.
남작은 이 어이없는 사실을 알면서 항변을 할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스스로 ‘인’이라고 한 자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목숨을 연장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듀메인은 자신과 계약을 맺은 엠비 남작을 죽일 생각이 지금으로선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계약 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칼에 쳐 죽이겠지만, 듀메인은 앞으로 남작의 저택에서 자신이 적을 계약서를 그대로 이행할 예정이니, 남작이 죽을 확률은 그만큼 적다.
문제는 듀메인이 어떻게 계약서를 적느냐는 것이겠지만.
“그, 그럼 인님이 저, 저 소년의 스승 되시는 겁니까······?”
듀메인의 기운과 소년의 기운이 비슷했고, 듀메인이 나이가 더 많고, 더 강하니 나름대로 짐작하여 물은 것이다. 둘이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듀메인의 말을 군소리 하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따르는 나르디를 보면 그런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들 끼리 듀메인과 나르디 같은 절대명령복종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
“스승? 크하하하! 스승이라······. 큭큭. 스승이라면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지. 크크크.”
듀메인의 웃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살기는 담겨 있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기운이 잔뜩 묻어난 웃음은 주변을 순식간에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작이 타고 있는 말은 멀쩡했다. 듀메인이 미리 파멸의 기운을 아주 조금 말에게 주입했기 때문이다. 파멸의 기운은 정체성을 파괴하고, 이성을 갉아먹으며 파멸의 기운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파멸의 기운이 가장 강한 존재의 말에 복종을 하는 것이다.
듀메인이 지닌 파멸의 기운은 파멸의 검 파흐샤즈에서 비롯된 것. 즉, 원조다.
더군다나 듀메인이 다른 생명체에게 파멸의 기운을 조금 건넨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른 생명체의 피를 흡수하면 그만큼 파멸의 기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엠비 남작은 진땀을 흘리며,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단지 웃음만으로 소드 익스퍼트인 자신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들고, 식은땀을 흐르게 한 것이다. 물론 심리적인 작용과 파멸의 기운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듀메인이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는 단편적인 증거였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구나. 크크큭. 그렇지 않나?”
남작은 허공을 보며 말을 하는 듀메인을 보며 다시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길을 가며 종종 지금처럼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남작이었다.
남작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간단했다. 파멸의 기운의 본질이자, 절대적인 파멸의 기운이 아무도 느끼지 못하게 공명을 울리며 듀메인의 머릿속에서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파멸의 검 파흐샤즈.
듀메인 다음으로 파멸의 기운이 강한 나르디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파멸의 검 파흐샤즈의 공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명만 느꼈을 뿐, 듀메인의 머릿속에 울리는 파멸의 검 파흐샤즈의 언어는 듣지 못했다.
*** *** ***
함정들은 부하들이 지나가 이미 파괴가 되어 있어서, 휘베리오와· 에나라는 여자가 나누는 잡담을 들으며 비교적 편하게 길을 지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나와 휘베리오는 동시에 걸음을 멈춰야만했다.
“꺅!”
에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니, 기절했다.
갑자기 나타난 강한 존재감 때문에. 그리고 어마어마한 기운 때문에.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평범한 사람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감의 기운이었다.
“이건······.”
놀랐다.
엄청난 존재감이다. 아주 또렷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나는 놀랐다.
엄청난 기운이다. 이 엄청난 기운 때문에 다시 놀랐다.
온몸이 쩌릿쩌릿하다. 그리고 왼 손등에도 짜르르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강자다.
보통 강한 게 아니다. 지금 느껴지는 존재감과 이 던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듯 한 기운으로만 본다면······.
“이 존재감은···.”
휘베리오가 중얼거렸다.
······내 옆에 있는 휘베리오보다도 강했다.
처음 휘베리오를 만났을 때 느꼈던 기운을 다시 떠 올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이런 존재감을 지닌 생명체가 나타나다니?
휘베리오보다 강하다. 이렇게 강한 자들을 갑자기 만나게 되다니.
큰일이다.
갑자기 나타난 생명체의 존재감과 기운 때문이 아니다.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에 내 부하들의 미약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들은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큰일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휘베리오를 쳐다봤다. 아직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절대로 놀란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놈이 지금 놀라고 있다.
존재감과 기운 때문에 그럴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선 이건 문제가 아니다. 내 부하들이 던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기운을 내뿜는 존재와 같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간다.”
나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손을 휘둘러 경락을 쏘아 에나의 수혈을 짚었다. 내가 수혈을 풀기 전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달리면서 전신으로 내공을 퍼트려 경공을 발휘했다.
몸은 가벼워졌고, 빨라졌다. 주변의 벽이 마치 하나의 깨끗하고 긴 바위로 연결된 듯 착각이 들었다.
우릉-
마치 던전 전체가 울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존재감이 한층 증폭되며, 그에 따라 기운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그것도 순식간에.
나는 속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경공을 발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있는, 고블린의 시체 주위로 녹색의 안개가 넘실거리며 사방을 천천히 장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독 안개다.
나는 이미 공기 자체가 치명적인 독으로 구성된 마계에서 근 100년을 살고, 현경의 경지에 올라 만독불침체(萬毒不侵體)가 되었다.
나는 독 안개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갔다.
따끔했다.
독 안개 속은 온통 녹색이었다. 안개 속에서 건너편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그리고 뒤에서는 휘베리오의 기척이 느껴진다. 조만간 나를 따라잡을 속도다.
순식간에 독 안개에서 벗어났다. 독 안개에서 벗어나자 따끔했던 몸은 입구로 들어서며 사라졌다.
입구로 들어서니 아주 좁았다. 고작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다.
텀벙-
따끔거린다.
나는 액체를 밟는 소리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신경은 온통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만 쫓고 있었다. 다만 몸은 액체가 무엇인지 느꼈다. 독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밝은 빛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발끝으로 내공을 보내며 발을 굴려 어기충소를 발휘했다.
내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쒜에엑-
강한 바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빛이 뿜어져 나왔던 입구로 몸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허공을 밟고 앞으로 빠르게 달렸다.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약간 변형해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내 몸은 허공에서도 아주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럴수록 몸의 내공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도 느꼈다. 순식간에 1갑자의 내공이 소모가 되었다.
번쩍-
어두운 통로 안에 다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나는 그저 살짝 눈을 찡그리기만 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휘베리오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군.”
나도 종종 의심이 들긴 하지.
휘베리오는 나와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말에 휘베리오는 그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릴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녀석이다. 휘베리오는.
나는 아직 웃지 못한다. 나는 그와 다르기 때문이다.
휘베리오과 같은 속도로 달리니, 나와 휘베리오만 가만히 서 있고 주변만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곳인가?”
앞은 막 다른 곳이다.
왼쪽과 오른쪽에 똑같은 모양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둘은 확연하게 틀렸다. 오른쪽 문에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몸을 멈춰 세우고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문 너머로 나를 이곳으로 부르게 한 생명체가 있을 것이다. 단지, 존재감과 기운만으로 나를 불러낸 것이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던전을 장학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강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존재감은 아직도 느껴지고 있었다.
뭐지?
문 안에서는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흑마법사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기운이다. 그럼 이곳의 던전 마스터는 네크로맨서가 확실하고, 문 너머는 네크로맨서가 기거하던 곳이 분명하다.
나는 손에 내공을 집중해 황금색 강기의 공을 두 개 만들어 굳게 닫힌 석문을 향해 던지며, 앞으로 쏘아져갔다.
슈우욱-
황금색의 짧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는 강기는 금세 석문과 부딪쳤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석문이 부서짐과 동시에 나와 휘베리오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내부로 들어섰다.
“카크님!”
나는 부하들이 부르는 소리에 내부를 훑어보았다. 일행은 모두 무사했다. 다만 케이프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기력이 많이 부족해 보였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흑마법사 녀석은 왜 쓰러져 있는 거지?
새하얀 피부에 다소 거칠게 생긴 외모와 호리호리한 체형의 처음 보는 인간이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인간에게서는 선명하다 못해 또렷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까의 그 강대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기운을 갈무리 해놨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느냐?”
내 물음에 부하들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읽을 수 있었다. 부하들의 얼굴에 묻어나는 희망을······.
[지옥의 4대 천문(天門)중, 2대 천문의 주인. 클로디아.]강한 존재감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는 생명체의 음성은 아주 권태롭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거칠게 생긴 외모에도 지긋지긋한 권태로움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하지만 진하게 느껴지는 권태로움은 그의 안식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는 권태로움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원치 않아도 고대 9클래스 마스터인 리자르트의 지식으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지옥이 어떠한 곳인지. 지옥의 천문이 어떠한 곳인지.
수문, 지문에서도 처리하지 못하는 강한 존재를 맡는 곳이 천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듣자 바로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맞다면 휘베리오를 능가하는 실력자이다.
저주스럽게도 강한 생명체.
스스로 지옥의 2대 천문의 주인이라고 밝힌 클로디아라는 생명체가 권태로운 눈길로 내가 있는 곳을 주시했다. 아니, 정확히 휘베리오를 주시하고 있었다.
착각인가?
지옥의 2대 천문의 주인인 클로디아의 눈에 생기가 감돈 것 같았다.
“그대는······.”
아까부터 아무 말 없던 휘베리오가 돌연 중얼거렸다.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일까?
[오랜만이구나. 우리의 친우 마족이여.]친우?
지옥과 마계의 사이라면 그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지옥의 2대 천문의 주인인 클로디아는 오랜만이라고 했다.
오랜만.
그렇다면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안면이 있는 사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투를 치를 리가 없다.
그나저나 놀랍군. 안면이 있다니.
달그락-
이상한 소리가 청각에 포착되었다.
무슨 소리지?
내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존의 경악성이 대전을 울렸다.
“해골이!”
해골이라는 소리에 나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손짓 한방에 부서지는 허약한 스켈레톤 이겠지.
존 혼자서도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휘베리오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천문의 왕이시여.”
[오랜만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군······. 1000여년 만인가?]하도 오래 살아서 시간 개념이 사라졌는지 지옥의 존재 클로디아는 의문을 드러냈다.
“그렇습니다.”
휘베리오가 대답하자 스켈레톤이 뒤섞여 움직이는 소리가 대폭 크게 들려왔다.
삐그덕삐그덕-
철그럭철그럭-
[무슨 볼일이지?]왜 이곳 인간계에 왔느냐는 물음일 것이다.
지옥의 2대 천문의 주인인 클로디아의 물음에 휘베리오가 가히 살인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 때문이지요.”
[호기심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지옥의 존재 클로디아는 수긍을 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천문의 왕은 무슨 볼 일이십니까?”
[강제 소환되었지······.]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긴 거짓을 말 할 존재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제소환이라는 지옥의 존재 클로디아의 말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지옥의 존재를 소환한다면 할 수 있다. 다만 아주 힘들어 며칠이나 요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강제 소환이 된 것이지?
설마?
짐작이 가는 녀석이 하나 있다.
“어떤?”
[나약한 인간에게 소환을 당했지.]휘베리오의 물음에 지옥의 존재 클로디아아는 한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의 시선도 절로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헌데 어떻게 소환을 한 것이지?
나는 쓰러져 있는 흑마법사 녀석을 쳐다보다 대전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대전 가운데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마법사의 호기심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억겁의 시간은 권태와의 투쟁이지······.]그 뒤로 휘베리오와 지옥의 존재 클로디아는 그냥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당연히 내가 듣기에는 사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마계와 지옥의 존재에게는 사소한 것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저 인간인 내 관점에서는 사소한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일단 지옥에서 온 클로디아라는 천문의 왕이 휘베리오와 아는 사이라 일단 한시름 놓았다.
그렇게 한시름 놓고 있는데 여전히 떨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부하들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냈다.
나의 갑작스런 전음을 받은 부하들은 깜짝 놀라며,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곧 나를 중심으로 모인 부하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잔뜩 두려움에 질린 몰골이었다.
벨하는 한쪽 어깨에 흑마법사를 들친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사신이 망자를 데려가는 모습 같았다.
서로 미워했던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벨하가 흑마법사 녀석을 챙기다니.
부하들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무슨 용건을 자신들을 불렀는지 의문을 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달그락달그락-
스르릉-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11개체의 스켈레톤이 방패와 무기를 엉성한 폼으로 집어 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한결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얼굴에 여실히 들어나는 두려운 기색은 별로였다.
나는 웅혼한 내력에 사자후의 묘리를 담아 부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군.
내 전음에 부하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두려운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존재가 내뿜는 기운도 없으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평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부하들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해골이 그다지 보기가 좋지 않군.”
해골 전사인 스켈레톤을 보니 처음 용병생활을 하면서, 첫 의뢰때 보았던 용병이 떠 오른다.
완전히 피골이 상접한 외모는 지금 덜그럭 거리는 소음과 함께 한손엔 방패를, 다른 한손엔 롱 소드를 한껏 쳐들며 다가오는 스켈레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자의 이름이 샤른이었지?
그리고 말처럼 대가리가 유난히 길었던 용병은······. 모르겠군. 썬 뭐였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카크님.”
“사이드의 날을 꺼낼 필요도 없군.”
“네, 알겠어요.”
부하들은 각자 말을 내뱉으며, 위풍당당하게 스켈레톤 무리로 다가갔고, 흑마법사는 내 옆에 놓였다.
그런데 뭘까?
경지가 높아짐에 따라. 그리고 마법의 경지 또한 높아짐에 따라 미래를 아주 미약하지만 단편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예견이 아니었다. 그저 무시 못 할 그런 ‘예감’이었다. 그런 예감이 지금 느껴진다. 일종의 불안감이라고 할까?
나는 그런 불안감에 고민을 하다가, 스켈레톤과 맞붙기 바로 전의 상태인 부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