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get My Husband, I’ll Go Make Money RAW novel - Chapter (33)
33화
밤바람은 정원의 꽃향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
완연한 봄, 밤에 부는 바람조차 온유하고 녹녹했다.
타르칸은 긴 회랑을 홀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신혼부부를 위해 마련된 신방이었다.
그게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첫날밤.
그 말이 그를 번뇌케 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그녀’ 이외의 다른 사람 을 신부로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이 결혼 역시 평화가 걸려 있지만 않았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왕명이라고 해도 끝까지 거부했을 터.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하지만 아내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려고 했다.
대신 아내에게는 왕자비라는 지위에 걸맞은 권력과 부는 모두 쥐여 주는 것으로.
정략혼을 치르는 자들 중에서 는 그마저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았고,사랑 역시 정략혼에 불필 요한 요소였다.
그러니 그 정도의 보상으로 황녀가 만족하길 바랐다.
어차피 황금의 피를 가진 실바누스 황녀라면 당연히 자신같이 천한 피를 품고 있는 남편을 경멸할 거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황녀는 그의 예상과 단 하나도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티네.”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어 서 혀끝에서 맴도는 발음이 어 색했다.
그의 시선이 회랑 너머를 향했다.
어둑한 회랑은 달빛과 옅은 조 명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크리스털 주렴이 눈부 신 햇살을 오색찬란하게 반사하던 한낮의 회랑이 겹치둣 떠오 튼다.
그 속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리스티네가 걸어오던 모습이 환영처럼 덧그려진다.
그를 보고 부드럽게 휘던 눈동자.
“하나도 닮지 않았어.”
타르칸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주지시키듯,소리 내어서.
그 말대로였다.
아리스티네에게서 그 아이와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왜.
타르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첫날밤 따위,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분명 그럴 텐데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먼저 비즈니스 관계라면서 선을 그은 것은 아리스티네 본인이다.
그러니 첫날밤에 대해서도 딱히 타르칸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을 터다.
‘하지만.’
정략혼에서 아이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두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은
아이야말로 진정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아리스티네 역시 당연히 첫날밤을 치를 거라고 생각 하리라.
〈푹신푹신한 거.〉
〈푹신한 거 몰라? 난 푹신푹신한 게 좋아. 누울 때 기분 좋은 거.〉
〈아니, 나는 넓은 건 딱히…. 너무 좁지만 않으면 돼. 넓어 봤자 공간만 남고.〉
아리스티네가 궁인들과 주고받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타르칸의 눈썹이 획 올라갔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그건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엄청난 밤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여자와 그…… 할 생각 없어.’
마음에 두지도 않은 사람과 함 께 몸을 겹칠 생각은 추호도 없 었다.
어떤 남자는 굉장한 미인을 아내로 맞은 것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녀를 사랑하진 않아도 기분 좋게 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 론다.
하지만 타르칸은 아니었다.
타르칸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그런 행위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슴에 다른 여자를 품고서.
야성적인 생김새와 다르게 순정적이고 조신한 타르칸은 번뇌 에 빠졌다.
아리스티네는 이상한 여자였다.
황당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
그리고,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무이한 파트너.
타르칸은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첫날밤을 거부하면 아리스티네는 상처받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문제의 푹신푹신한 것 외에 다른 사안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이 더 심각했다.
일주일 전,갑자기 궁인들이 우르르 찾아와 그에게 물었다.
〈타르칸 전하,한 가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비장한 물음에 타르칸은 다소 의아했다.
궁인들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그들은 묘하게 타르칸을 어려워 했다.
그런데 질문이라니. 무슨 일인데 그러나 싶어 타르칸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 말에 화색이 된 궁인들이 쥐고있던 것을 펼쳐 들었다.
파앗,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물체가 위풍당당하게 드러났다.
질문했던 궁인이 그걸 가리키며 힘차게 물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드시나요?〉
다섯 명 남짓한 궁인들이 각자 들고 있는 건…….
〈첫날밤을 위한 침의예요!〉
〈아리스티네 전하께서 입으실 거예요!〉
궁인들이 어서 자기가 준비한 옷을 골라 달라는 듯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렸다.
타르칸은 이 궁에서 살면서 궁인들이 이렇게 활기차게 구는 것을 처음 보았다.
무슨 어필이라도 하는 건지 그 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침의를 흔들었다.
펄럭펄럭!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가 거칠 게 흔들렸다.
그건 도저히 침의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타르칸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물었다.
삭풍보다도 더 차가운 한기가 궁인들의 몸을 꽁꽁 얼렸다.
〈화,황송합니다,전하…….〉
〈요,용서를…〉
새파랗게 질린 채 달달 떠는 궁인들을 보니 타르칸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쯧,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물러가라.〉
그 말에 궁인들이 오들오들 떨 면서 기어가듯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고 나니 타르칸의 기분 역시 편치 않았다.
그에게 궁인들을 겁주는 취미는 없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살기까지 홀려 버렸으니…….
겁에 질린 궁인들이 앞으로 타르칸의 그림자만 봐도 눈물을 쏟을 가능성이 컸다.
잠시 생각하던 타르칸은 방을 나섰다.
궁인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생각이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궁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정원 한구석에 옹기종 기 모여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게 아주 단단히 겁먹은 모양이었다.
타르칸은 조심스레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이걸로 해야 해. 이 란제리에서 전하의 시선이 0.3조 더 머물렸어!〉
〈0.3초나……! 그럼 그걸로 하자.〉
〈아냐! 이 란제리를 볼 때 전 하의 동공이 더 빠르게 흔들렸어! 음속의 속도였다고!〉
〈헉! 음속?!〉
궁인들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 천 쪼가리 사이를 오갔다.
그들은 침의一라고 주장했으나 어디로 보나 란제리인 것一를 쥐고 심각하게 토론 중이었다.
〈어쩌지…….〉
〈둘 다 예쁜데.〉
〈색이 다르니 황녀님께 더 잘 어울릴 색으로 고를까?〉
〈황녀님은 요정이라서 검은색도,흰색도 모두 잘 어울리셔.〉
〈그건 그래.〉
〈다 소화하시겠지.〉
〈뭐로 하지…….〉
하아아아,궁인들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에 이보다 더 까다로운 난제가 없다는 얼굴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섹시하게 검은색으로 하자.〉
〈첫날밤은 흰색이지!〉
〈그런 건 편견이야!〉
〈전통에는 이유가 있다고!〉
이게 뭐라고 궁인들이 투닥투 닥 싸우기 시작했다.
타르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흰색은 웨딩드레스도 입잖아! 벗겼을 땐 색다른 반전 매력을 보여 줘야지!〉
그 말에 궁인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과연 명답이었다.
둘 다 황녀님께 잘 어울릴 테 니 그 모습을 보게 될 사람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한순간의 침묵 후 응흐흐흐, 괴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궁인들의 광대가 하늘로 치솟았다.
〈후후,웨딩드레스를 입은 청초한 황녀님을 보다가 밤에 이거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아주 깜짝 놀라시겠지?〉
〈놀라기만 하겠어? 불끈하시겠지〉
〈아,어서 빨리 입으셔서 타르칸 전하와…….〉
〈황녀님이 이거 입고 타르칸 전하를 바라보기만 해도 게임 끝이야.〉
〈여자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한번 눈뜨게 되면 그렇게나 집요하다던데!〉
〈어머어머!〉
〈올해가 가기 전에 2세 소식이 들려오는 건 아닌지 몰라.〉
궁인들이 까르르르르,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은 웃음을 홀렸다.
타르칸의 살기에 겁먹은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타르칸은 어쩐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열 살에 대마수 무르지카를 앞에 두고서도 뒷걸음치지 않았던 그다.
그런데 궁인들의 웃음 앞에서 물러서다니.
그러나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
상처뿐인 회상에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궁인들이 고른 그 검은색 란제리는 정말 끔찍했다.
대체 어딜 가릴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그마한 천 쪼가 리였는데,그마저도 망사였다.
거기에 이상한 끈과 이상한……
하여간 그 혼란스럽고 괴상한 것이 실제로 존재 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벗겼을 땐 색다른 반전 매력을 보여 줘야지!〉
〈황녀님이 이거 입고…….〉
〈잘 어울리셔.〉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궁인들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응응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 가운데 아리스티네가 서 있었다.
검은 레이스와 끈이 달린,망사 란제리를 입고서.
타르칸은 차마 시선을 내리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녀린 목선과 다 드러 난 깨끗한 흰 어깨가 시야에 들 어 왔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一 타르칸.
그 목소리.
타르칸이 움찔,몸을 굳힌 순 간,아리스티네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타르칸은 잠잠한 허공을 보다가 하,하고 날카로운 숨을 내뱉 었다.
방금 그건 그가 원해서 떠올린 게 아니었다.
궁인들의 말 때문에 연상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뿐이다.
타르칸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뒤덮고 문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어?”
밤바람에 목소리가 실려 왔다.
타르칸은 천천히 눈가에서 손 을 내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이미 알아서.
그 한 음절 가지고.
아리스티네가 그를 보고 빙그 레 웃었다.
목욕을 마친 피부는 평소보다 한층 더 뽀얗고,머리카락은 살 짝 젖어 있었다.
발그레한 뺨, 물기를 머금은 입술.
그리고 침의.
다행히도 침의는 평범했다.
새하얀 얇은 원피스는 첫날밤 을 위한 옷이라기엔 노출이 아예 없었다.
궁인들이 가져온 침의 중에는 저런 옷은 없었다.
다 잠자리 날개같이 훤히 비치는 천으로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지금 아리스티네가 입은 침의는 가볍고 편해 보였다.
평범한 옷이니 타르칸 역시 놀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아리스티네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흰 발목이 드러났다가 치마 끝단에 가려지길 반복했다.
그녀의 복사뼈는 동그랗고 살 짝 분홍빛이 감돌았다. 매끈해 보였다.
타르칸은 획 시선을 위로 올렸다.
곧장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주 쳤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에 아무것 도 하지 않고 그대로 풀어 내린 채였다.
바람에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 살랑 흔들린다.
회랑 끝에서 자신을 향해 천천 히 걸어오는 모습이 낮의 모습 과 겹쳤다.
그때도 아리스티네는 이렇게 그에게 걸어왔다.
편안한 침의를 입은 그녀의 모습과 낮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그러나 같았다.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온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올려다보았다.
“타이밍이 딱 맞았네.”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밤의 정원에서 꽃밭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향기였다.
“긴 하루였지? 어서 자자.”
아리스티네의 손이 타르칸에게로 뻗어졌다.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손은 평소보다도 더 가늘고 유약해 보였다.
그 손이 타르칸의 팔목에 닿았다.
목욕을 마친 후라 그런지,서늘했던 낮의 감촉과 달리 따끈 했다.
타르칸은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닿은 감촉이 너무 여리고 보드라워,조금만 거칠게 대해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꽃잎이 짓이겨지며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타르칸은 하늘하늘 어둠 속을 유영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바라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뚝,아리스티네가 멈췄다.
타르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신방 앞이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