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20
119 협객인 줄(2)
무림은 신화마정갑이란 말만 나와도 칼부림이 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비도를 쥐고 있는 무진은 늦장을 부리기 일쑤였다. 가식을 떤다거나 진심을 숨긴다고 보기도 힘들다.
하늘의 무를 창안한 천무자가 알면 어떤 기분일까? 무덤가에서 기어 올라오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내 주제에 무슨!’
나릉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주인의 저주에서나 벗어나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나릉의 심정을 읽은 무진은 미끼를 던졌다.
“천무자의 무공을 갖고 싶냐?”
“……아닙니다!”
“싫으면 하는 수 없지.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진심이십니까?”
“늦었어, 기회는 원래 한 번뿐이야.”
이 망할 주인이 사람을 놀리나!
준다고 했을 때 받지 못한 후회가 밀려오지만, 나릉으로선 당연한 의심이었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천무자의 심득이 담긴 무공이다. 그걸 내어 준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익히고 싶습니다!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좋아.”
“……예?”
이렇게 쉽게!
“자꾸 병신처럼 대답할래?”
“성심을 다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천무를 익힐 기회를 얻다니, 나릉은 믿기지가 않았다. 주인은 삼류 시정잡배의 박투술로 치부하지만, 천무자의 무공은 진짜였다. 천무를 익힌다면 능히 강호 최정상의 고수로 활보할 수 있었다.
거짓일까?
의외로 나릉은 무진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신화마정갑조차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을 하는 인간이었다. 굳이 천무를 가지고 자신을 시험할 이유가 없다.
‘보기보다 쓸모가 있단 말이야.’
철호에게는 변장술 따윈 잡술이니 상종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지만, 천면호리 나릉의 천변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여기에 무공까지 더해진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보물은 다 내 거다. 무공 외에 탐내면 알지?”
“아무렴요. 다 가지십시오! 전부 주군의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자기 딴에는 천무를 얻어 패력을 억제하려고 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꿈에도 모를 거다. 패력을 심을 때 마왕과 작당해 투심마안까지 사용했다.
‘둘 다 강해지면 나야 좋지.’
아주 훌륭한 고기 방패…… 충성스러운 노예……. 듬직한 제자와 수하를 얻을 기회였다. 철호에게 얼굴에 대한 불만족은 강해질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당연히 천변술 따윈 배워선 안 되지.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곤란했다.
‘내가 이렇게나 너희들을 생각한다.’
-두 번 생각해 줬다간 주화입마가 올 텐데.
‘너도 많이 생각한다.’
-닥쳐!
육칠이 객잔으로 돌아왔다.
개방의 분타라고 해서 긴급 소식을 당장 듣기는 어렵다. 사전에 가는 장소를 밝혔기에 전서를 통해 보고한 것이다. 홍무개가 신경을 써 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동문이라 짝짜꿍이 잘 맞았다. 알지만, 무진은 대범하게 넘어가 주었다.
“습격은 성공했습니다.”
“좋은 것부터 말하는 걸 보니 꼬리는 못 잡았을 테고, 암중 세력을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겠네.”
“어떻게 아신 겁니까?”
“금제를 풀려다 죽었을 거 아냐.”
“……정확합니다!”
“난 분명 말해 줬다. 어설프게 풀려다간 꼬리만 자르는 격이라고.”
무진의 말대로 습격은 성공했지만, 꼬리를 자르고 도망쳤다. 생포한 놈들도 금제를 풀려다 사망하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말았다. 성과라고 한다면, 암중 세력의 실체를 확인한 것뿐이었다.
“위험한 놈들입니다. 반드시 실체를 밝혀야 합니다!”
“무슨 수로?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여태 긴장하지 않고 살았으니 바늘방석에도 앉아 봐야지.”
꼬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으면 직접 나섰지.
철저히 점조직으로 되어 있는 마신교의 실체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으로선 평화에 젖어 있던 나태함을 쇄신하고, 전력을 모을 구실을 찾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림맹으로서 전력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문을 봐서 알겠지만, 내부에 독버섯들이 고루 자라고 있을 수 있어. 간자들 색출하기도 간단하지 않을걸.”
육칠도 더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당문의 일도 그렇고 남궁세가도 그렇고, 사안의 경중이 무거웠다. 무진이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 가는 곳마다 문제가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지?’
역사를 상기해 봐도,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무서웠다. 자칫 힘을 하나로 모으기는커녕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당문의 예만 봐도, 깊이 관여되었다면 외부인으로선 간자를 찾기도 어렵다.
“낙심하진 말자. 믿을 만한 곳이 생겼잖아. 전혀 희망이 없진 않아. 지금처럼 저들보다 먼저 움직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무진은 금광혈투를 거론하려다 그만두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고, 당장은 확인하기 어렵다. 마신교도 이쯤 되면 개방과 남궁세가를 예의 주시할 테니, 섣불리 행동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일단은 신화마정갑부터.’
마신교가 노렸던 만큼, 지보 쟁탈전은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신화마정갑에 대한 정보를 흘린다면 마신교는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해 올 것이다. 그러려면 나릉의 협조가 필요했다.
‘나 때는 훨씬 힘들었으니까.’
-잘난 체는 사육사를 이기고 난 후에나 해.
마신교가 침공했을 때의 무림과 현재를 비교하면 아주 준수하다. 지금 상태를 유지만 해도 그때보단 절망적이지 않았다. 다만, 마왕의 얘기대로 사육사란 놈을 조심해야 한다. 놈의 무력과 목적이 여전히 모호하다.
정리한 후에 쉬려고 하는데.
응?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무진은 방안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누군가 무진의 마차를 살핀 후 사라졌다. 도둑놈이 마차를 훔치려고 확인한 걸 수도 있으나 미심쩍었다.
‘이건 또 뭐지?’
-역시.
‘아니라니까.’
-넌 사고상이다.
이러면 오기로라도 관심을 끊어야겠다.
안타깝게도 객잔은 꽤 소란스러웠다. 확실히 객잔 안 식당에서의 식사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분란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방에서 식사해야지. 이는 객잔 혈사를 피하는 지름길이었다.
상쾌한 오후.
해가 중천에 오른 화창한 날.
무진은 서두르지 않고 방에서 아침과 점심을 챙겨 먹은 후 간식을 챙겼다. 청성산도 식후경이라고, 가다가 배고프면 소풍 겸 간식을 먹기로 정했다.
포구에서 배를 타진 않았다.
선약을 했다면 또 모를까, 말과 마차를 실을 배를 당장 구하긴 어렵다. 강가를 따라 이어진 길이 있어, 마차를 몰았다.
마차의 창문을 열어 햇살에 반사되는 강물을 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불어와 무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것들이!’
얌전히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지랄이었다. 어제 순순히 보내 줬으면 ‘예, 고맙습니다!’ 하고 다른 목표를 골랐어야지.
-역시!
‘닥쳐.’
일부러 아침에 일찍 나서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가 있어서 사라질 때를 기다렸다가 이동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눈치도 없이 사람을 자꾸 끌어들이고 있었다.
당문의 표식이 보이지도 않나?
-당문임을 알면서도 건드린다는 건데, 이건 좀 그렇지 않냐? 이쯤 되면 인정해라.
‘웃기지 마.’
당문에서 내어 준 마차는 귀빈 전용이었다. 가문에서도 가주나 장로들만이 타고 다닐 수 있었다. 눈깔이 장식이 아니면, 사천성에서 당문의 마차를 노리진 않는다.
그런데도 당당히 노린다면 의도가 다분했다.
***
하아, 하아!
숨을 토할 때마다 열기가 육신을 괴롭혔다. 온전했던 백의는 군데군데 베어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도망치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꿈을 꾸고 있다면 지독한 악몽이었다. 동고동락하며 함께 검을 수련했던 사매가 어째서 자신과 사저를?
그녀는 사저와 함께 쉬지 않고 경공을 시전했다. 그러나 점점 기력이 무너지는 사저였다.
“사저, 정신 차리세요!”
“서린아, 나는 틀린 것 같…….”
사저의 혼절에 그녀는 절망했다.
오랜 수련으로 지친 심신을 다독일 겸 아미산에서 내려왔다. 경치를 구경하고 사람들을 만나 교류를 했을 뿐인데 사저와 자신은 중독이 되었고, 어느새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마저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사저를 끌고 여기까지 왔지만, 유도한 대로 끌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차작!
추격자가 주변을 포위했다.
아미파의 신녀 적서린은 임연홍을 원독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매가 자신과 사저를 중독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를 잘 따랐던 과거를 상기할수록, 작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끈질기네요. 그만 굴복하세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해할 수 없나 봐요. 하지만 당연한 거예요. 난 아미파를 이끌어 가는 차세대 검후가 되고 싶거든요. 한데, 사저는 너무 뛰어나요. 하나를 알면 열을 터득하는 건 너무 재수 없잖아요.”
꼭꼭 감추어 놓았던 시기와 질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임연홍이었다. 지금까지 순순히 따르고 말을 잘 들었던 사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늘을 위해 평생 가면을 쓴 채 연기를 한 것이다.
임연홍의 좌우로 복면을 한 자들이 섰다. 평복을 입고 있어, 복장만으로는 상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검을 사용하는 검사로서 능숙했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기본 검식만 펼쳤지만, 검에서 전해지는 기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가진 자들이 평범할 리 만무했다.
“청성파가 어째서?”
“신녀답군. 기본 검식만으로 알아볼 줄이야.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군.”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사내에게서 짙은 살기가 풍겼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비정함이 비쳤다. 그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청성파의 절기를 숨기고 있었다. 몸이든 주변이든 검식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다고 흔적이 남지 않을 것 같아? 본파에서 당신들을 꼭 추적할 거야!”
“사저, 우리가 그런 것조차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날 너무 띄엄띄엄 보셨네요.”
적서린은 사매와 저들의 의도에 치를 떨었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건 눈치챘다. 문파의 절기를 펼치지 못하는 걸 이용하지 않았다면, 중독된 자신과 사저가 도망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적서린을 능욕하듯 임연홍은 차분히 타일렀다.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악의가 충만했다.
“발버둥 칠수록 괴로울 뿐이에요. 이쯤 했으면 부처께서도 감복했을 테니, 쫓아온 성의를 봐서 이분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보시나 하고 가세요. 또 알아요? 부처께서 가엽게 여기실지. 아, 눈이 빠져서 알아보질 못하려나.”
“악독한!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넌 대체 누구야!”
“불쌍하고 우매한 우리 사저,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하늘이 보고 계신다! 네 뜻대로 될 성싶어!”
“호호호, 순진하시네요. 하늘 따위가 보면 어쩔 건데요. 지금 저 벼락 맞고 싶은데, 왜 안 칠까요? 그리 착한 척 위선을 떠니 하늘이 짜증을 내는 거잖아요.”
의식을 잃은 무애 사저를 뒤로한 적서린은 치를 떨었다. 차라리 혼절한 무애 사저가 나았다. 저 아이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여렸던 임연홍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사매로 위장했다면 모를까.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사매, 제발 그만해!”
“시간은 끌 만큼 끌었으니 이만 끝낼게요.”
대화를 이어 나가려던 적서린은 임연홍의 영악한 수작에 말렸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벌려는 건, 자신이 아닌 사매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다그닥, 다그닥!
해를 등지면서 마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차의 형태와 문양이 드러나자 적서린은 사매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리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설마?”
“사천의 주인은 우리와 청성이잖아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정도의 명문으로서 세를 넓혔고, 함께 마와 사를 처단해 왔다. 정의와 협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착화한 정도의 세상이었다. 대외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어도 반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사천성은 아미파, 청성파, 사천당가가 치열하게 서로의 영역을 확장했다.
문제는 구파와 오대세가의 지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부처와 도를 따르는 아미파와 청성파의 입장에서 사천당문의 확장은 부담이 되었다.
그에 따른 마찰은 번번이 생겼지만, 겉으로 드러내기가 불편했다. 이해관계와 실리를 따지는 당문이 훨씬 유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사태는 핑계에 불과했다.
당문을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저들을 이용해서 아미파와 청성파가 하나가 된다면 당문을 견제하기 수월해진다.
“패악을 저지른 주제에 문파를 위한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 따윈 집어치워!”
결의를 다진 적서린이었다. 중독은 되었지만,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 산에서 죽는다고 해도 같이 가겠다는 동귀어진의 수를 각오했다.